brunch

미안하다, 생각한다.

'사랑한다'는 말이 나오지 않을 때, '생각한다'라고 말해본다.

by 봉봉
KakaoTalk_20220114_221209560.jpg 결혼은 드라마와 달랐다. 살아보겠다고 여기저기 기웃거렸다. 결혼 3년이 평생을 결정한다고? 정말? 진짜?


사랑이 뭘까.

보이지도 않고 잡히지도 않고,

바로 옆에 있는 것 같다가도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는

신기루 같은 그것.


연애를 책과 드라마와 영화 등 매체를 통해 배운 사람에게

실전은. 달랐다.

연애와 사랑도 다르고

사랑과 결혼도 다르고

결혼과 사랑도 달랐다.

무튼 달랐다.

그래도 사랑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던

사람이었기에 함께 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헌데, 가만 생각해보니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하는 내가 좋았던 것 같다.

남자 친구가 생겼다고 깨춤을 추던 나,

'오빠'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뱉기 위해 연습하던 나,

나보다 큰 남자 친구와 키를 맞추기 위해 구두를 사던 나,

남자 친구가 생기면 하고 싶었던 리스트들을 하나씩 완수(?)하며

세상 다 가진 것처럼 신나 하던 나.

'대장을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나'라고 우기던 나.


얼굴만 보고 있어도 좋고

방금 헤어졌는데 보고 싶고

뒤돌아서면 아쉽고


그랬구나. 우리. 아니 나.


처음 샀던 구두. 키 큰 남자 친구와 같은 공기를 마시기 위해 저런 구두를 장만했다. 몇 번 신지도 못했다. 저기서 떨어지면 추락사다. 가만 보니 셀프로 장만한 유리구두 같다.



결혼식을 마치고, 신혼여행 비행기를 기다리며 인천공항 한편에 누워

머리에 박힌 무수히 많은 고정핀들을 뽑아주던 그때,

가끔 다정하고 따뜻했던 그 순간이 생각난다.


신혼 대전 중 남편이 들고 온

<다섯 가지 사랑의 언어>라는 책에서 게리 채프먼(오늘 처음 알았다. 그 이름)은

(신혼 대전 중 잠시 휴전 상황일 때 남편이 사다준 책이다. 남편은 그 책을 2번 사 왔다.)

사람마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달라

어떤 사람에게는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이 중요하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인정하는 말이 중요하고,

또 다른 사람에게는 선물, 봉사, 스킨십 등이 중요하다고 했다.

하지만 저 아래 단전부터 처 오르는 분노와 딥빡을 달래주지는 못했다.


한 구절을 읊어보자면 다음과 같다.

여기, "남편에게 페인트칠을 해달라고 9개월 전에 이야기했는데 아직도 안 했다"라고 찾아온 아내가 있다.


5D 마크 투 들고 다닐 때에도 멀쩡하던 손목이 1일 3식 밥상에 솟구쳤다. 발사 준비 완료.

(여기서 잠깐. 엄마 죄송해요. 엄마가 "너는 하숙생이냐, 잠만 자고 나가게."라며 청소하라고 할 때마다 귓등으로도 안 들어서. 그때 못한 청소며 밥이며 지금 다 하고 있습니다.)


"아주머니는 무엇을 하셨나요?"

"남편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죠. 날씨는 좋은데 페인트칠 대신 컴퓨터만 손보고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남편이 페인트칠을 했나요?"

"아니요, 아직도 안 했어요.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어요."

"남편에게 다시는 페인트칠 얘기는 하지 마세요. 그리고 남편이 좋은 일을 하면 칭찬을 많이 해주세요."


3주 후 그녀는 "그 방법이 통했다!"며 기뻐한다.

잔소리 대신 칭찬이 통했다는 뜻이겠지.


그래 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것을.

근데, 내가 결혼을 고래랑 한 건 아니지 않은가.

포유류는 맞지만, 고래는 물에 살고 내가 결혼한 포유류는 뭍에 산다.


그 책 뒤표지에는 '사랑은 배우고 익혀야 할 기술'이라고 적혀있는데

내가 배우고 싶은 건 다른 사랑의 기술이었지,

먹물 냄새나는 철학자들의 가르침은 아니었다.

역시 세상살이 내 맘 같지 않다.


그래도

지난 글에 썼던 '개털 둘이 결혼했다'는 자조적인 표현이 자꾸 걸리는 건

혹여 그... 잘 생긴 소개팅 남이...

그 글에 상처받지는 않았을까 염려되기 때문이다.


애틋한 추억 대신

살벌한 현실을 선택한 나에게

그리고 (그의 말에 따르면) 인생 최대 용기를 내준 잘생긴 남자에게.

(당신의 아픈 부분을 깐 것 같아)

미안하다,


혹시라도 이 글에 다쳤다면,

부디 모르는 척 넘어가 주시라.

아직 낯설고 어색한 공간에

잠시 주저앉아

내 인생을 돌아보는 것은 아니고,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치는 것이니.


미안하다,

그래도 당신을 생각한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