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 늘 꿈같은 순간만 있는 것이 아니다. 계획이 틀어져서 난감한 경우도 많으며, 같이 여행 간 사람과 의견이 맞지 않아 짜증나는 경우도 많다. 엄청 기대했던 장소에 직접 가봤을 때 실망을 하게 된다던지, 입맛에 맞지 않은 현지 음식에 고생을 하게 된다던지 하는 여행의 에로사항은 늘 있기 마련이다. 그 중에서 최악의 상황은 바로 인종차별을 당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한달의 스페인에서 가장 서러웠던 순간의 기억을 떠올려보고자 한다. 그 것 또한 나의 여행이므로.
스페인 한달살기의 첫 일주일은 마드리에서 머물렀다. 낮에는 일을 하고 일을 마친 다음에 하루에 하나씩 미술관 도장깨기를 했었다. 그 중 하나의 미술관이 바로 '티센-보르네미사 미술관'이었다. 스페인 내에서는 프라도, 소피아 미술관 못지 않게 유명하며, 르네상스 이전의 작품부터 팝아트까지 전 세기에 걸친 미술작품들을 연대별로 볼 수 있는, 미술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멋진 미술관 이기도 하다.
미술관 안의 작품들. 일부작품은 촬영금지.
나는 주로 혼자 다니다 보니, 식사 할 때가 제일 힘들었다. 나처럼 극 소심하고 남의 눈치 잘 보는 사람이 혼자서 식당에서 밥을 먹기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아무도 나에게 관심이 없을진데, 괜히 나혼자 다른 사람이나, 식당 직원 눈치를 볼 때가 많다. 이런 점을 혼자 여행할 때 제일 힘든 점이기도 하다. 그래서 미술관 가는 날은 식사를 미술관에서 해결할 때가 많다. 미술관은 왠지 사람 눈치가 덜 보인다. 왜 그런지 나조차도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그 날도 나는 미술작품 관람을 마치고, 한국어 오디오 가이드를 반납하고(티센 보르네미사 미술관은 한국어 오디오 가이드를 대여할 수 있다.) 늦은 점심이자 이른 저녁을 해결하기 위해 미술관 안의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입구에 서서 서버가 안내해주기를 기다렸다. 덩치가 크고 뾰루퉁한 표정의 직원이 영어로 바에 앉을거냐, 테이블에 앉을거냐 묻길래, 나는 식사를 하기 위해 테이블에 앉을 목적으로 테이블을 이야기 했다. 그리고 서버가 테이블로 안내해 주었다. 평소 친절한 유럽의 식당 직원들을 많이 보다가 뭔가 뾰루퉁하게 안내하는 직원의 태도가 낯설기도 했지만, 그냥 피곤해서 그런거겠거니 하고 넘어갔다.
주문을 하고, 식사를 기다렸다. 이윽고 식사가 나왔다. 자리를 안내해 준 서버와 다른 남자 직원이었다. 음식을 주기 전에 포크와 나이프를 주는데, 식탁에 던지듯이 주는 것이었다. 보통 냅킨 깔고 포크랑 나이프를 셋팅해 주는데 그런 것도 없이 그냥 던지듯이. 순간 살짝 기분이 나빴지만 그 직원도 피곤해서 그런거겠거니 하고 넘어갔다. 그리고 식사를 하면서 할게 없어서 계속 주위를 둘러 보았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여인들도 있었고, 우아하게 커피 한 잔 하면서 독서를 즐기는 중년의 여인도 있었다. 이런게 유러피언의 여유구나 하고 느끼고 있을 때 어느 중년의 여인과 노년의 할아버지가 식당에 들어왔다.
직원이 그 손님들이 자리에 앉기 전에 분주하게 테이블 셋팅을 했다. 테이블보를 이쁘게 깔고, 포크와 나이프를 셋팅하고...... 그 때 머릿속을 확 스친 생각
"테이블보?? 왜 저 사람들한테는 테이블보를 깔아주지?"
그리고 주위를 둘어보았다. 식당안에는 나를 제외하고 모두 서양인 이었고, 그들의 테이블에는 모두 테이블보가 깔려 있었다. 그런데 내가 앉은 테이블에는 테이블보다 없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불친절한 직원의 태도, 그리고 던지듯이 준 포크와 나이프, 나에게는 없는 테이블보..... 인종차별이구나. 그 순간 목구멍이 울컥하고 올라 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스페인어도 영어도 못하는 처지였다. 게다가 소심쟁이였다. 왜 나한테 이런 불합리한 대우를 하냐고 따질수가 없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이미 다 식은 감자튀김을 삼키면서 눈물도 같이 삼켰다. 그리고 나는 팁 한푼도 주지 않고, 계산을 마무리하고 그 식당을 나와버렸다.
그 순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내 자신이 너무 한심하고, 그 식당 직원들에게 너무 화가 났다. 숙소로 돌아와서 이 울분의 찬 마음을 어찌하면 좋을까 삭히고 삭히다가, 구글맵을 켰다. 그리고 미술관 후기에 인종차별 당한 후기를 적었다. 다른 한국 사람들은 나와 같은 상황을 겪지 않기를 바라며.
아직도 그 순간을 생각하면 화가 난다. 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하나도 잘난 것이 없는데, 이런식으로 인종차별을 하다니. 그 사람들이 다른 나라에 여행 갔을 때 똑같이 당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인종차별을 당하다 보면 내가 이런 대접 받기 위해 우리나라 떠나서 다른 나라에 돈쓰고 여행하나 싶기도 한다. 하지만 그 나쁜 기억을 커버해줄 수 있는 순간들과 사람들이 많기에 나는 여행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왕이면 앞으로의 여행은 그런 기분 나쁜 인종차별을 당하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