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린터의 편지.
To: 이 편지를 읽는 너에게 (어디서든 잘 지내고 있지?)
아, 벌써 귀찮아진 거 아냐? 그래도 조금만 참아봐. 이왕 시작했으니 끝까지 읽어줘. 내가
이런 거 잘 안 하는 거 알지? 그러니까 한 번쯤은 들어주라.
나는 프린터야.
사람들은 내가 그저 원본을 똑같이 복사하는 기계 같다고 생각해. 그리고 그걸 비웃지. 솔직히 말할까? 처음엔 나도 그런 말에 휘둘렸어. 나를 기계 취급하는 그 말들이 너무 싫었거든. 아무리 열심히 그려도, 사람들은 "네 그림엔 "창의성이 없다"라고 했지. 그럴 때마다 나도 생각했어. ‘정말 내가 그저 따라 그리기만 하는 사람인가?’ 하고.
근데 더 웃긴 건, 내 그림이 똑같이 완벽한 것도 질투하더라고. 어쩌라는 거야, 대체? 창작이 부족하다고 욕하고, 잘 그리면 잘 그린다고 질투하고. 그 사이에서 진짜 나를 잃어버릴 것 같았어.
한때는 정말 그만두고 싶었어. 펜을 놓고 싶었거든. 근데 그때 자비와 선희, 노블이 나한테 다가왔지. 아니, 이 사람들이 나한테 왜 이러는지 이해가 안 됐어. 나한테 **"네 빛을 나눠달라"**고 하질 않나. ‘이게 무슨 소리야?’ 싶었지. 빛이라니, 난 그런 거 몰라. 내게 무슨 대단한 빛이 있다고. 그냥 평범한 펜질이나 하는 사람일 뿐인데.
하지만 걔네가 계속 옆에 있어줬어. 거짓말처럼 말이야. 내가 아무리 시비를 걸고, 짜증내도 말이지.
"꺼지라고."
"신경 쓰지 말라고."
내가 몇 번을 말해도, 그들은 그냥 웃으면서 말했어.
"우리가 도와줄게."
이젠 조금 알 것 같아. 사실 나도 그게 싫지 않았다는 걸. 뭔가... 이상하게 기분이 좋더라고. 이렇게 누군가가 나를 믿어주고, 내 꿈을 응원해주는 것. 어쩌면 나도, 다시 시작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펜을 들었지.
그리고 알았어. 내가 찾고 있던 게 완전히 새로운 아이디어가 아니었단 걸. 내 감정과 이야기를 담는 게 창작이더라고.
그래, 나는 프린터야. 남들이 기계처럼 단순하다고 욕을 해도 상관없어. 내 그림은 내 것이고, 내가 여기까지
그려온 모든 선들은 다 나를 만들어준 흔적이야.
근데 아직도 가끔 두렵긴 해. 나 스스로를 완전히 믿기 어렵고, 남의 시선에 휘둘리기도 하거든. 그러니까, 혹시 너도 그런 날이 있다면 이 말을 기억해 줬으면 좋겠어.
너는 이미 충분히 잘하고 있어. 남들이 뭐라 하든 네가 그려가는 길은 네 것이니까.
자비가 나한테 해준 말을 너한테도 해줄게.
"너의 빛을 나눠줘." 그게 어떤 모양이든, 누군가를 감동시킬 수 있을 거야. 실패해도 괜찮아. 나도 매일 실수하고 있거든. 그럼에도 계속 그리고 있다는 게 중요한 거야.
이런 말 내가 자주 안 하잖아. 그러니까 오늘만 특별히 해주는 거야. 네가 어떤 꿈을 꾸고 있든, 나는 응원할게. 물론, 티는 내지 않을 거야. 하지만 그거 알지? 내가 은근히 신경 많이 쓰는 타입인 거. 그러니까 네가 무너지면 나도 좀 기분 나쁠 테니까, 알아서 잘해.
끝까지 이 편지를 읽었다면... 뭐, 고맙다고는 해줄게.
하지만 너도 알잖아? 이런 말 입 밖에 꺼내는 거 잘 못하는 거. 그러니까 티는 내지 마. 그냥 우리 둘 다 포기하지 않고 계속 나아가자. 너도, 나도, 각자의 펜을 놓지 않는 한 언젠가 그 선들이 모여서 멋진 그림이 될 거야.
...자, 이제 됐지? 됐으면 얼른 네 꿈 그리러 가라. 내가 여기서 너를 응원하고 있을 테니까.
- 언제나 어딘가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너의 친구 프린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