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오늘보다는 분명 훨씬 선선했던 것 같은 작년의 오늘, 나는 하늘에 있었다. 퇴사하고 무료한 며칠이 얼마나 반복됐을까, 여전히 새벽 다섯 시까지 잠자는 법을 까먹고 있었던 나는 갑자기 너무 자고 싶었다. 그냥 잠에 드는 것도 아니고 지쳐서 쓰러지는 그런 기절을 원했다. 사실은 이 지겨움이 반복되는 공식을 좀 풀고 싶었는지도. 가타카나로 쓰여있는 호텔을 세 밤 예약하는 것으로 비행의 시작을 알렸고 곧바로 인천에서 시작하는 여섯 시간 뒤의 입장권을 구매했다. 나는 이제 기절할 자격이 생긴 셈이다. 그래서 노래를 틀었다. 한 도시의 이름을 제목으로 한 그 도시로 떠난 여자를 그리워하는 노래를.
도착해서 호텔로 가는 택시 안에서 잠깐 졸았던 것도 같다. 아니면 끔찍하게 아찔한 구름 아래 전경을 뒤로하고 퀸 베드에 누워 기절했던가. 아무튼 나는 자고 싶다는 소망을 결국은 이뤘다. 한 곡만 계속 재생되고 있는 아까 그 노래가 슬슬 시끄러운 것만 빼면 제법 완벽한 몇 시간이었다. 이제 나는 아주 깊게 숨겨뒀던 마음 하나를 꺼낼 수 있게 됐다. 어쩌면 나는 일 년 전 ‘오늘’을 떠올리며, 오늘에서야 솔직한 그리움을 늘어놓고 있는 것이려나. 그래서 네가 있는 그 도시의 하늘은 지금 어떠하니?
이 년 전에 시드니로 가는 비행기에 탄 날, 왜 하필 멜버른이 아니라 시드니였을까 생각해 본 적 있습니다. 뉴사우스웨일스 미술관에서 프란시스 베이컨의 자화상을 마주한 것으로 그 대답을 대신할 수도 있겠지만 생각했습니다. 그때도 그냥 갑자기, 골드코스트 바다가 마침 지겨웠던 터라 어디라도 떠나고 싶어서 그나마 더 가까웠던 시드니로 가는 비행기를 탔던 겁니다. 만약 오늘 다시, 그니까 또 한 번 떠날 자격이 주어진다면 나는 네가 있는 멜버른으로 기꺼이 몸을 맡길까요? ‘네가 있는’과 ‘멜버른’ 중에서 뭐가 먼저인지는 밝힐 수 없지만, 여전히 나는 아무것도 못 할 것 같습니다.
아무것도 못 했습니다. 다자이 오사무의 책을 읽기 한참 전부터 이미 인간으로서는 나 자신이 싫증 난 터라, 매일 부끄럼 많은 오후를 보내고 있었던 그때도 나는 아무것도 못 했습니다. 그 남자처럼 기꺼이 죽어버리지도, 행여 내가 사라질까 먼저 떠나지 못하는 너를 껴안지도 못했습니다. 결국 너는 비행기를 탔습니다. 오빠가 생각하는 예술이 뭐냐며 소리쳤던 네게 이제는 대답할 수 있는 것들이 잔뜩 생겼는데, 나는 이렇게 아무것도 못 합니다. 와중에 깨닫습니다. 애당초 이건 그리움이 아니란 것을. 이건 사랑과 비슷한 어떤 애달픈 마음이 아니라 내가 내내 갖고 있던 죄책이었습니다. 네, 이건 죄책입니다.
죄책감에 내 심장을 꺼내어 마주합니다. 쿵, 쿵, 쿵, 박자에 맞춰 문장을 하나씩 삼킵니다. 숨이 멎기 전까지 이 시는 끝나지 않습니다. 내 죄책도 그러하겠습니다. 언젠가, 열 시간이 넘는 비행을 했던 날 아주 잠깐 숨이 멈췄던 순간이 있습니다. 짧았지만 그때 나는 가장 자유로웠습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어릴 때보다 더 자주 비행기를 타게 됐습니다. 추락도 도착도 하지 않고 그냥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그 순간이 행복했으니까요. 쿵, 쿵, 쿵. 심장이 다시 뜁니다. 남겨진 나는 다시 그리워합니다. 나는 누구를 그리워하는 일을 자책이라고 부릅니다.
한껏 궁상을 떨다 보니 오늘은 금방 어제가 됐다. 내일은 떠나기로 마음먹었는데 오늘에서야 그건 아직 이르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도 내일은 정말 떠나야겠다. 떠난다면 다음은 어디로 할까. 사랑할 것도 없고 그리워할 것도 없으니 이번 비행은 먹먹함 자체를 즐길 수 있겠구나. 누구도 마중 나오지 않게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으로 가자. 오슬로. 오슬로가 좋겠다. 에드바르 뭉크의 그림을 보고 한껏 울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