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을 앞둔 딸의 아버지를 위한 저녁 식탁 차리기
축. 하. 합. 니. 다. ♪ 트. 리. 의. 생. 일. 을. 축. 하. 합. 니. 다. ♬
태어나 서른한 번의 생일 축하를 하고, 서른두 살이 되었다.
'이십 대 때는'이라고 서두를 꺼내고 싶지 않다. 그러나 정말 이십 대 때는 생일은 친구들과 모여 노는, 그 정도의 날이었다. 어쩌면 노는 데에 핑곗거리가 된 날이었을 수도 있겠다. 나 자신보다는 주변 사람을 통해 나를 세워가던 시기여서 그랬을까, 오히려 그저 주인공이기만 하면 좋았던 십 대 때의 생일이 더 특별했다.
집에서 요리를 하는 사람은 나 하나, 고로 생일상을 직접 차려야 한다. 32년간 훈련받은 대로, 생일이라고 미역국은 끓였지만 이상하게 9월 22일에 끓인 미역국에는 손이 가질 않는다. 그래서 내 생일상은 늘 나 대신 아빠가 받는다. 요즘 일이 많은 아빠에게 고기가 필요한 시점이기도 하고, 삼겹살은 굽기 싫어서 겸사겸사 항정살 김치볶음을 했다. 반찬 하나에 국 하나지만, 이 정도면 잔칫상이다.
당신과 나의 열한 번째 이별 식탁
항정살 김치볶음 재료 : 항정살, 김치, 양배추, 대파
항정살 김치볶음 만들기
항정살을 굽는다.
어느 정도 익으면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른다. 기다란 항정살 본연의 모양이 좋다면 자르지 않아도 좋다.
양배추와 김치, 김칫국물을 넣고 함께 볶는다.
양배추, 김치가 익으면 대파를 썰어 넣는다.
빛깔이 고와질 정도로 더 볶으면 완성!
짝짝짝. 항정살을 김치와 볶아서 먹기엔 아까운 재료가 아니냐는 말을 들었지만, 김치와 볶아서 먹으면 그냥 먹을 때보다 항정살을 더 많이 먹을 수 있다. 항정살의 느끼함을 김치가 잡아줘서 매큼함과 고소한 풍미를 조화롭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앉은자리에서 600g은 뚝딱이다.
항정살 김치볶음과 잘 어울리는 미역국은 나 대신 아빠가 밥까지 말아서 아주 맛있게 먹었다. 소고기 미역국이라서 더 맛이 좋았을 것이다.
31년 전 오늘, 미역국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엄마의 것이었다. 그 미역국을 이제 당신이 먹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을 그날의 아빠는 1989년 9월 22일을 이렇게 기록했다.
가시나가 태어났다. 꼭 E.T 같이 생겼다.
그런데 간호사 선생님들은 다 예쁘다 카더라.
아빠의 단 하루뿐인 육아일기의 전문이다. 2.5kg 저체중으로 태어나서 다른 신생아보다 작고 쭈굴쭈굴했었다는 나를 아빠는 E.T라고 표현했다. 아빠의 글씨는 아주 예쁜 명조 체다. 곱고 곧은 명조체의 알파벳 E와 T사이 점까지 확실하게 찍은 E.T를 보고 있으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라 눈은 찡긋, 입은 싱긋이 된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첫째 딸을 굳이 E.T로 표현한 것이 기가 막히기도 하고, 그래도 옛날 사람인 아빠가 육아일기를 썼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뭉클함으로 보기엔 하루치밖에 되지 않아 어이가 없기도 한, 이렇게 장황하게 표현할 수밖에 없는 기분이다.
31년 뒤, E.T는 아빠에게 미역국을 차려주고 선물로 용돈을 받는 철딱서니가 되었다. 그리고 E.T는 단 하루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1주도 모자라 2주, 3주까지 파티를 여는 삼십 대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아빠의 작은 성에 숨겨둔 빠다코코넛을 하루가 멀다 하고 훔쳐 먹는 과자 도둑이 되었으며, 결혼하라는 잔소리에 아빠부터 먼저 하라고 헛소리를 하는 맹랑한 늙은 아이가 되었다.
이런 E.T를 보고, 성식 씨도 할 말이 많으리라.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는, 1989년 9월 22일 이후 우린 그땐 생각지 못했던, 그런 사람, 그런 사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