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을 앞둔 딸의 아버지를 위한 저녁 식탁 차리기
의식이 들었을 때는 핸드폰 시계가 두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일찍 못 일어날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오늘은 원래 먼 거리에 있는 대형 마트에 가서 아보카도와 명란젓을 사 와, 아보카도 명란 비빔밥을 해 먹을 계획이었다. 그런데 다 틀렸다. 주말만 되면 타고난 체질인 올빼미로 돌아가는 바람에 당최 수면시간을 습관화시킬 수가 없다. 건물주의 딸로 태어나 직장이라는 굴레에 얽매이지 않고 한량처럼 살았더라면 올빼미든, 박쥐든 상관없었을 텐데. 새벽 5시에 잠들어서 오후 2시에 일어났으니 그렇게 늘어지게 자지도 않았는데, 아침형 인간으로 살아야 하는 직장인으로서 괜히 잠에 대한 부채감만 든다. 늦은 기상에, 배는 더욱 고파서 고롱고롱 우는 소릴 내고, 아빠의 작은 성으로 가보니 여태 굶은 성식 씨도 울상을 하고 있다. 마트까지 갈 시간 없이, 부엌에 있는 재료로 점심 겸 저녁을 만들어야 한다.
냉장고에서 양파와 애호박, 달걀을 꺼내고 찬장에서 스팸을 발견했다. 각이 보인다. 오늘 내가 연성해야 하는 메뉴의 각이. 채소와 달걀, 스팸으로 밥 전을 만들어 보자.
당신과 나의 스물세 번째 이별 식탁
애호박, 양파를 잘게 썰어 주세요.
스팸에 밥이 들어갈 공간을 만들기 위해 칼로 선을 긋고 수저로 퍼주세요.
수저로 퍼낸 스팸은 잘게 썰어서 애호박, 양파와 함께 알끈을 제거한 계란 3알과 밥 2 공기를 섞어 주세요.
공간이 생긴 스팸 가운데에 섞은 밥을 차곡차곡 채워 주세요.
밥을 채운 스팸을 굽고, 채우고 남은 밥은 적당한 크기로 구워 주세요.
단순한 요리라서 맛이 예상 가능했지만, 예상한 그대로 맛있고, 만족도는 더욱 높았으며, 중독성은 와우, 속된 말로 지렸다. 오늘 오후 식탁, 스팸 밥 전이 찢었다!
처음 구운 전을 맛 본 이후, 남은 모든 전을 구우면서 손을 멈출 수 없이 절반은 입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런 게 바로, '손이 가요 손이 가'로구나. 성식 씨도 별 거 없어 보이는 이 요리가 맘에 들었는지 사진보다 두 배나 많은 밥 전과 라면을 남김없이 모두 해치웠다.
그럴싸해 보이고 손이 많이 가는 요리만이 높은 정성으로 쳐 줄 것 같지만, 오늘 같은 요리로 배불리 기분 좋아질 수만 있다면 이것으로도 족하다. 한편으론, 누군가에겐 이 과정이 결코 단순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조금 더 단순함의 미학을 향해 나아가는 이들이 있겠지.
때론 단순한 게 답이다. 조금 더 단순하게 생각하고, 단순하게 살 필요가 있다.
나는 온갖 맞지 않는 것들이 뒤섞인 복잡한 모순 덩어리다. 사회가 정한 잣대가 싫으면서도, 그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고, 자유로운 작가가 되고 싶으면서도 한 손으로는 돈과 명예를 좇는다. 아빠가 턱 받치고 앉아서 나만 기다리는 게 싫으면서도, 저녁 식사 담당으로 나선 것도 나 자신이었다. 대체 나는 뭘 원하는 애새끼일까.
오랜 휴학 끝에 어렵게 하게 된 복학. 요즘은 중간고사 기간이다. 코로나로 인해 오프라인 수업을 할 수 없는 시국이라, 모두의 편의를 위해 카톡방이 만들어졌는데, 나에겐 회사 단톡 방이 4개는 더 생긴 것과 다름없었다.
쌓이는 카톡 메시지들을 보며 잠깐 숨이 막혔지만 그래도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건 일이 아니고 공부니까, 내 맘 같지 않은 세상 일보다는 훨씬 나을 거야. 라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러나 거듭된 이직으로 쌓인 피로와 산만해진 정신머리로는 도저히 이 모든 것들을 감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일도, 학교 공부도, 글 쓰는 것도, 고양이를 키우고 나를 돌보는 것도 모두 잘하고 싶었는데,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것 없이 엉망진창이다. 해야 할 일은 많고, 몸과 마음은 따라주지 않는 이 상황에 엄두가 나지 않아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주말 이틀이 가 버렸다. 밥을 먹으면서 만족감에 기분이 슬슬 좋아지려고 드릉드릉 시동이 걸리면서도, 가슴 한편에 붙은 걱정과 불안, 자책의 딱지들로 어쩔 줄 몰라하는 내게, 아빠가 물었다.
"행정실은 언제부터 출근이냐?"
"저번 주부터 하고 있었는데."
"그래? 거긴 사립학교야?"
"응."
"지금 수업 듣고 있는 학기는 곧 끝나나?"
"응, 12월 초에 끝나겠지."
"한 학기 더 남았잖아."
아빠의 말에 숨을 크게 몰아 쉬었다. 땅이 꺼지기엔 부족한 깊은 한숨으로.
"등록금, 힘들면 말하고."
아빠는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빈 그릇들을 싱크대에 넣고 방으로 들어갔다. 쿨가이의 무심함이란 이런 것이다.
그래, 등록금 힘들면 아빠한테 손 벌리면 되고, 쌓인 일들은 하나씩 퀘스트도 깨고, 포기할 것들은 포기하면서 정리해야지. 전전긍긍 속 끓인다고 안 될 일이 갑자기 기적처럼 이뤄지진 않는데 말이다.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이 없겠네.
완벽주의는 무기력의 다른 이름이라고 했다.
'잘'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하기만 해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