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을 앞둔 딸의 아버지를 위한 저녁 식탁 차리기
좋아했던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 하고는 간지러운 연애보다는 안락한 결혼생활을 하고 싶었다.
그때 내 인생은 많이 지쳐있었고, 이 풍파 속에서 날 건져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운명처럼 그때 만난 그 친구가 내 남은 생의 짝꿍이 되길 바랬다. 친구도 이성도 아닌 어중간한 기로에서 마음을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한참을 애먹던 나는 만두전골을 만들어서 그 애에게 가장 뜨겁게 마음을 전했다.
혹시나 입맛에 안 맞으면 어쩌나 싶어서 국간장 한 방울에도 심혈을 기울이던 내 노력을 그 애는 눈치채지 못했다. 손이 굳고 빨개질 정도로 추웠던 날, 말 대신 전했던 국물 안에 있던 메시지는 온기에 녹아버렸다.
당신과 나의 이별 식탁
알배추를 씻어서 서걱서걱 썰어줍니다.
김치도 섭섭지 않게 서걱서걱 썰어주세요.
팽이버섯도 깔끔하게 씻고 다듬어 주세요.
애호박, 당근, 대파도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주세요.
냄비에 배추를 깔고 그 위에 애호박, 당근, 팽이버섯, 김치, 왕만두를 빙 둘러서 앉혀주세요.
멸치 다시마 육수와 다진 마늘, 국간장, 새우젓, 후추를 다 때려 넣고 끓여주세요.
만두까지 다 익으면 아주 쉽게 완성!
만두전골을 만들어준 남자가 그 애가 처음은 아니었다. 즐겨보던 웹툰에 소개된 만두전골을 보고 만들어보고 싶다는 강한 욕구에 꽂혀서 쑥갓까지 넣어서 완성한 내 첫 번째 만두전골은 성식 씨와 앞집 처자 미미에게 대접했다. 왕크니까 왕 맛있는 왕만두 한 봉을 다 먹은 미미의 극찬에 어깨뽕이 저절로 솟았다. 미미와 아빠는 그날 각 한 봉씩, 두 봉의 왕만두를 해치웠고, 아마 그 지점에서 그 애에게 만들어줘도 되겠다는 자신감이 움텄을 것이다.
자신감을 갖고 재료들을 식탁 위에 올렸지만, 느닷없는 걱정들이 손끝을 붙잡고 놔주질 않았다.
너무 부담을 주는 것은 아닐지. 질척거리며 징그럽게 구는 것은 아닐지.
짝사랑은 영원한 을의 사랑이다. 걱정되는 손끝을 쥐었다 풀고 조리를 시작했다.
성식 씨를 위한 전 날의 정성과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성식 씨 미안해. 그래도 어떡해. 이게 다 나를 시집보내고 싶어 하는 아빠를 위한 길이야.'
행여 모양이라도 흐트러질까 냄비채 들고 그 애의 집으로 가던 그 날 그 길은, 추운 겨울임에도 땀이 많이 났다.
차 히터를 너무 세게 튼 탓일까. 요리하면서 힘을 너무 뺀 탓일까. 입 밖으로 꺼내는 고백도 아닌 데 긴장을 한 것일까. 이상한 날이었다.
그 애와 식사를 하던 장면들은 머릿속에서 가위질을 많이 당했다. 맛있게 먹는 너, 너의 그릇이 비면 정성스럽게 떠주는 나. 식탁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이 드라마 몽타주 씬처럼 조용히 지나간다.
나는 기억력이 꽤 좋은 편인데, 그날의 기억은 대사 대신 그 애가 좋아하던 커피소년의 음악으로 남았다.
몇 년 뒤, 커피소년을 좋아하던 그 애는 행복한 웨딩마치를 올렸다.
그 애는 그날 식탁의 따뜻함을 닮은 아이였다. 그래서 내 마음 알아주지 않았다는 원망 한 마디도 입 끝에 걸려 있다가 언어가 채 되지 못하고 삼켜지곤 했다. 내 만두전골로 배 채우고 다른 년 손에 반지 끼워주었다는 욕도 상상만 하다가 묻어버렸다.
그 뒤로 한동안 한 적이 없던 만두전골을 오래간만에 식탁 위에 올렸다.
국물 속 채소를 먹는 법이 없었던 성식 씨가 웬일인지 당근 한 조각 남기지 않고 깨끗하게 비워냈다.
이 요리에 담긴 딸내미의 가슴 아픈 짝사랑 이야기를 모를 성식 씨.
결혼하라는 당신의 잔소리에 늘 성을 내는 이 딸내미에게도 남은 생을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을 품었던 남자 하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