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을 앞둔 딸의 아버지를 위한 저녁 식탁 차리기
한때 난 순두부찌개를 일주일에 세 번씩 먹던 순두부 처돌이였다.
세상 가장 맛없기로 소문난 병원밥을 먹던 때였는데, 보호자 식사를 신청해서 먹었다가 일주일도 안 되어 포기했고, 좋아하지도 않는 편의점 음식으로 연명하다가 병원 지하 식당에서 찾아낸 보물 같은 메뉴였다.
병원은 식당까지 맛을 통일하기로 결의한 것인지 대부분의 메뉴가 심심하다 못해 그 맛이 참 지루했다. 유일하게 순두부, 이 순두부찌개만이 바깥세상의 맛을 지니고 있었다. 외래진료로 병원에 방문한 날에는 어김없이 엄마와 지하 식당으로 가서 순두부찌개 2인분을 시켰고, 입원해 있는 날에는 눈 비비고 일어나 지하 식당부터 찾아갔다. 따분한 병원 생활에 유일하게 칼칼한 재미를 주었던 순두부찌개. 이 칼칼함에 기대어 그곳에서 나날들을 어기적 어기적 보냈다.
당신과 나의 서른다섯 번째 이별 식탁
냄비의 1/4 정도로 물을 담아 끓이세요.
물이 끓으면 중불로 줄이고 순두부찌개 양념을 넣고 (시판용이 맛있어용) 스팸, 양파도 썰어서 넣어주세요.
양파가 익으면 순두부를 넣고 대파도 썰어서 넣어주세요.
순두부까지 익으면 완성!
정성이 넘쳐흘렀던 과거에는, 순두부찌개 양념을 직접 만들었다. 그러나 시판 양념을 접한 뒤, 내 정성은 수고에 비해 맛이 현저히 떨어진 다는 것을 알았고, 가성비의 시대에 뒤쳐질 수 없어서 시판 양념을 애용하게 되었다. 집사는 시판 음식을 애용, 고양이는 애옹 애옹.
순두부찌개는 시판 양념만 있으면 조리가 굉장히 간단해서, 식탁에 꽤 자주 등장하는 메뉴다. 아빠도 순두부찌개를 좋아하고 자주 올라오는 것에 대해 특별히 불평한 적이 없어서 앞으로도 치트키처럼 사용할 예정이다.
오늘은 온라인 마켓에서 주문한 반찬이 배송 온 날이다. 내가 좋아하는 무 장아찌, 아빠가 유일하게 먹는 밑반찬 세 가지 중 하나인 오징어 젓갈 (나머지 두 개는 어묵볶음과 장조림 달걀) 그리고 불고기 밀 키트가 스티로폼 박스에 예쁘게 들어 있었다. 어떤 언박싱보다 설레는 반찬 택배 뜯기. 거침없는 커팅으로 테이프들을 뜯어내고 광채가 찬란한 반찬들을 보자 마음이 든든함으로 채워졌다 차곡차곡.
배송 온 반찬 덕에 부자가 된 듯 여유가 생기자, 왠지 모르게 오늘의 순두부찌개는 특별했으면 하는 마음이 생겼다. 병원에서 먹던 순두부찌개에서 부족했던 한 가지, 그것을 넣어 이 찌개의 화룡점정을 찍으리라. 이름만 들어도 순두부찌개에 무척 잘 어울리는 그 주인공! 스팸을 넣기로 했다. 스팸과 함께 보글보글 끓는 순두부찌개 냄새가 먹기 전부터 맛있다.
스팸이 들어 간 순두부찌개와 전문가가 만든 불고기, 오징어 젓갈로 구성된 오늘의 식탁이 완성됐고, 후루룩 촵촵 성식 씨의 맛있는 디너 타임이 시작되었다. 30분 뒤, 아빠가 밥 솥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아까 차려진 밥이 마지막 밥이었다. 예상치 못한 사태에 거실로 나가서 살피자, 밥 솥을 닫으며 아빠가 말했다.
" 아니 그냥, 조금만 더 먹었으면 해서."
아쉬움을 다 지우지 못한 그의 말. 그대로 다시 자리로 돌아가 앉은 아빠는 남은 오징어 젓갈을 밥도 없이 촤촤촤촵 싹싹 긁어먹었다. 그동안 내가 해준 밥을 만족하며 먹은 줄 알았는데, 오늘 두 그릇이나 시도하는 아빠를 보니 그것은 내 착각은 아니었을까. 바람을 빙자한 오해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밥 두 그릇은 육십 줄에 들어서며 졸업한 줄 알았다. 몇 년 전부터 지금껏 아빠가 두 그릇이나 먹은 일이 내 기억에는 없다.
그렇다면 이것은 야심 차게 준비한 이 전의 저녁 상과 달리 전문가의 손길이 많이 닿은 이 음식들을 아빠의 혀가 알아챈 것일까.
나는 내 손맛이 이제는 아빠 입맛의 최적화된 것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 마주한 못 보던 광경에 조금은 멋쩍어 뒤통수에 물방울이라도 새겨지는 듯했다.
병원에 있을 때, 이모는 보호자 식사에 손을 대지 않는 날 위해 반찬과 밥을 갖다 주곤 했다. 강변 집에서 서초 병원까지 반찬을 해다 나르는 이모의 정성으로 마음은 따뜻해졌지만 내 입맛은 그 정성을 외면했다.
순두부찌개 처돌이는 병원 지하 1층 식당을 향해 달려가기 바빴다. 냉장고에 남은 음식을 발견하면 또 바깥 음식을 사 먹은 거냐며 이모가 핀잔을 줬지만 내 입맛은 철저히 이모의 정성을 거부했다. 지루한 손맛보다는 칼칼하고 매큼한 식당의 맛이 더 매혹적이었으므로.
성식 씨도, 사람을 사로잡을 줄 아는 전문가들의 맛에 매료되었으리라.
그래, 우리에겐 가끔, 어쩌면 자주, 이런 자극적이고 재밌는 맛이 필요할 것이다.
지루하고 장황하며 지질한 삶 속에서, 잠들어가고 있는 우리의 감각을 깨울 이런 맛들이.
감각을 깨울 때의 그 짧은 짜릿함으로 못 버틸 것 같았던 순간들을 버텨내고, 그 순간들이 모여 일상이 된다.
우리는 이런 작은 순간에 기대어 사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