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7살이 된 1월의 어느 날, 딸은 글씨 쓰기를 하고 싶다고 했다. 조금 더 준비가 되면 한글 공부를 하려고 했는데 벌써?
여자 아이들은 6살 무렵부터 편지를 즐겨 쓴다. 딸도 몇 가지 아는 글자를 사용해 비슷한 레퍼토리로 편지를 써서 주곤 했다.
"사랑해요."
"엄마 키워주셔서 고맙습니다."
"엄마, 멋져요."
(사진 속 단어는 '맛져요'지만 '멋져요'인 걸로)
한글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전이라 그림 그리는 것처럼 글씨를 썼다. 그러다 보니 글씨 획순이 엉망이었다. 획순을 가르쳐주다가 연습장에 선을 그어 따라써보라고 하니 30분이 넘도록 앉아서 쓰는 게 아닌가.
딸은 재미있다며 글씨 쓰기를계속하고 싶다고 했다. 이 마음이 사라질까 봐 얼른 10칸 공책을 장만했다. 아이가 배움에 열의가 있을 때 시작하는 게 좋기에 내 생각보다는 조금 일찍 한글 쓰기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글씨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위에서 아래쪽으로 쓴다고 기본 규칙도 가르쳐줬다. 올바른 획순으로 써야 글씨가 바르게 써질 확률이 높다.
욕심이 생겨 한글뿐만 아니라 숫자 쓰기도 은근슬쩍 집어넣었다. 숫자는 생각보다 쓰기 어려워해서 고학년이 되어도 이상하게 쓰는 친구들이 더러 있다. 저학년 아이들은 5자를 거꾸로 쓰고 10을 01로 쓰기도 한다. 습관을 잘 잡아주기 위해 숫자도 쓰기 시작했다.
나는 우리 반 아이들을 가르칠 때 글씨를 굉장히 강조하는 편이다. 글씨는 내가 없는 곳에서도 나를 표현하는 매체라고 생각한다. 정갈한 글씨체는 학교 생활에서 큰 무기가 될 수 있다. 예쁘지않아도 정성껏 쓴 글씨또한 노력하려는 태도와 성실함이 엿보인다.
인간에게 가장 해로운 곤충인 '대충'이라는 마음이 들면 글씨는 날려쓰게 된다. 하지만 정성껏 최선을 다하고 싶을 때 우리는 글씨를 반듯반듯하게 쓴다. 글씨는 마음가짐에 따라 달라진다. 바른 글씨를 통해 아이의 마음가짐도 바르게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한글 공부를 시작하는 유아시기에 글씨 쓰기를 더 신경 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배움의 열정은 잠깐 피어올랐다가 다시 사그라들었다. 며칠 쓰더니 하기 싫다고 한다.
"한글 공부 시시해."
쓰는 중간중간마다 꼼지락거리며 놀고, 집중력이 낮아졌다. 먼저 하고 싶다던 사람이 누군데. 변덕쟁이 7살 아이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이해는 된다. 공부는 지루한 활동이니 당연하다.
"그래. 유대인이 성경에 꿀을 발라놓은 것처럼 한글 공부할 때 간식이라도 팍팍 줘야겠다."
조금이라도 즐거운 시간이 되도록 말이다. 아이가 공부할 때 달달한 코코아를 타줬다.
코코아 한 모금, 글자 하나 쓰기.
코코아 후루룩. 글자 하나 쓰기.
세월아, 네월아! 공부 시간이 배나 더 걸리는 게 아닌가. 이러려고 코코아를 준 게 아닌데 보고 있는 내 속이 답답해졌다.
그래도 칼을 꺼냈으면 무라도 썰어야겠다는 마음으로 10칸 공책 1권을 다 쓰긴 했다. 어르고 달래고 칭찬해 주면서, 부글부글한 내 속을 다독이면서.
그리고 그만뒀다. 중간에 포기한다는 느낌은 주고 싶지 않아서 1권을 다 끝낸 다음에 그만둔 것이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좋아하는 그림책을 필사하는 것으로 글씨 쓰기 연습을 해도 좋았을 것 같다.지루하게 가, 나, 다, 라.. 를 쓰게 했으니 아이가 싫어할만했다. 자음과 모음이 소릿값을 알고 한글을 읽는 원리를 가르쳐주고 싶었던 건데 욕심이 앞섰다. 그리고 쓰기보다 읽기가 먼저인데 읽기도 잘 안 되는 친구에게 쓰기까지 가르쳤으니 아이가 힘들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