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오스틴이 말하는, 사랑이 진짜로 시작되는 그 순간
《오만과 편견》은 읽을 때마다 다른 결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한때는 로맨스의 틀을 쓴 고전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지금 다시 읽어보니 인간관계의 가장 미묘한 지점을 정확하게 찌르는 이야기처럼 느껴졌습니다. 저는 이 소설은 결국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나는 이 사람의 진짜를 보고 있는가, 아니면 내가 마음속에서 만든 모습을 보고 있는가.
우리는 가끔 참 쉽게 사람을 판단하곤 합니다. 첫인상 하나로 단정해버리기도 하고 때로는 고작 말 몇 마디를 나누고는 성격까지 판단해 버리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한 번 마음속에서 결론을 내리면 그 뒤의 이야기들은 전부 그 결론에 맞게 재해석되기도 하고요. 그래서 그렇게 오만이 생기고 그래서 그렇게 편견이 따라오는 것 같기도 합니다. 《오만과 편견》소설 속 두 사람도 “나 정도면 사람 좀 볼 줄 알지”라는 자신감에서 시작했고 그 확신이 결국 가장 위험한 순간을 만들어냈습니다.
엘리자베스와 다아시는 그 착각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인물들입니다. 엘리자베스는 총명하고 자신감도 있지만 그만큼 자신의 판단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죠. 다아시는 그가 자라온 기준을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였고 그 기준을 조금이라도 벗어난 사람을 보면 자연스럽게 무의식적으로 낮춰 봤습니다. 둘은 서로의 진짜 모습을 본 것이 아니라 서로의 겉모습과 서로가 가진 배경만을 보고 그것을 각자의 방식으로 해석했을 뿐이었어요. 제인 오스틴은 이 것이 얼마나 쉽게 틀어지고 얼마나 자연스럽게 무너지는지를 놀라울 정도로 섬세하게 보여줍니다.
이 소설이 진짜 빛을 발하는 장면은 둘이 사랑을 확인하는 순간이 아니라 각자 자신의 오해를 인정하는 바로 그 순간입니다. 다아시는 자신의 첫 청혼이 얼마나 무례했고 그 오만함이 엘리자베스와 그 가족에게 어떤 상처를 줬는지 깨닫습니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확신했던 판단이 사실은 자존심과 누군가의 말에 기대 만든 오해였음을 받아들이죠.
“이 순간까지 나는 나 자신을 알지 못했어요.”
이 한 문장이 저는 이 소설의 심장이라고 느껴졌습니다. 사랑 이전에 자기 인식이 먼저 온다는 걸 정확히 보여주는 문장이니까요.
우리는 아마도 역사상 가장 빠르게 타인을 판단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SNS만으로 성향을 파악하고 직업이나 말투 하나로 사람의 전체를 결정해 버리기도 하니까요. 저도 그런 실수를 했습니다. 예전에 꼭 함께 일하고 싶었던 사람이 있었는데 자리에서 제 이야기에 집중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고 저는 그게 곧 성격이라고 판단해 버렸죠. 나중에 알게 된 건 그날은 그 사람에게 정말 버티기 힘든 날이었다는 사실이었어요. 그때 깨달았습니다. 그 사람의 태도나 행동이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던 제 문제가 더 컸다는 걸요.
그 이후로 저는 첫인상이라는 걸 조금은 천천히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말을 고르고 표정을 살피기 전에 제 마음에 먼저 묻곤 합니다. 오늘 이 사람에게 어떤 사정이 있지는 않을까. 별것 아닌 질문 하나지만 이 질문을 한 번 거치면 관계의 온도가 놀랄 만큼 달라지곤 해요. 이해는 거창한 배려에서 시작되는 게 아니라 섣불리 결론을 내리지 않겠다는 작은 멈춤에서 시작되는 것 같아요.
《오만과 편견》은 사랑은 이해라는 과정을 통과해야만 시작된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단점을 본 뒤에야 마음을 열 수 있었고 각자의 실수를 받아들인 뒤에야 서로를 향해 진심으로 움직였습니다. 그 느리고 조심스러운 과정이 저는 참 인간적이라고 느껴졌어요. 오해를 걷어내고 다시 바라보는 일. 그게 얼마나 어려운지 또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인지 오스틴은 아주 잘 보여줍니다.
그래서 이 소설을 읽을 때마다 저는 조금 부끄럽기도 하고 동시에 위로를 받기도 합니다. 저 역시 엘리자베스처럼 누군가의 말을 너무 빨리 믿었던 적이 있었고 다아시처럼 내가 옳다는 생각을 너무 쉽게 당연하게 여겼던 순간도 있었으니까요. 그래도 이렇게 조금씩 반성하고 천천히 다시 나 자신을 살펴보는 지금의 제가 어쩌면 앞으로는 조금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어 설레기도 합니다.
사랑은 이런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눈앞의 사람을 이해하려는 생각과 행동이 결국은 나 자신을 더 정확히 알게 만드는 과정이 되니까요. 오해를 걷어내는 동시에 서로에게 조금씩 다가가는 이 느리고 서툰 과정 자체가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진심 어린 사랑이 아닐까 합니다.
ss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