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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 생각이 귀찮아졌다

조지 오웰이 말하는, 피곤한 시대의 자기 검열

by 신세연

《1984》는 읽을 때마다 낯설면서도 기이하게 친근한 소설이에요. 1949년에 쓰인 이야기인데 지금의 현실을 거의 그대로 비춰주는 거울처럼 느껴지니까요. 저는 이 소설이 결국 이렇게 묻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지금도 생각하고 있는가. 아니면 생각하는 일이 귀찮아져서 멈춰버린 것인가.


오세아니아의 세계는 강압적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건 사람들이 서서히 생각하기를 귀찮아한다는 점이에요. 진실을 따지는 일은 피곤하고 거짓에 동조하는 일은 편안합니다. 진실을 말하려면 근거를 찾고 논쟁을 견디고 관계가 틀어질 수도 있죠. 반면 분위기에 맞춰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는 일은 아무런 비용이 들지 않습니다. 그 편안한 침묵이 인간을 가장 빠르게 무너뜨립니다. 오웰은 공포가 아니라 피로 때문에 생각을 포기하는 인간의 모습을 아주 서늘하게 그립니다.


주인공 윈스턴이 끝내 무너지는 과정도 그렇습니다. 그는 거대한 악과 맞서 싸우다 쓰러진 인물이 아닙니다. 체제의 안락함과 무력감 사이에서 조금씩 닳아 없어진 사람에 가깝죠. 당의 슬로건처럼 무지는 힘이 됩니다. 모르는 척 넘어가는 일이 오히려 평온을 주는 세계. 질문하지 않는 자만이 안정을 얻습니다.


저에게도 이런 순간들이 점점 많아졌습니다. 어릴 때의 저는 할 말은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어요. 납득이 안 되면 따지고 아니다 싶으면 얼굴을 붉혀가며 논쟁도 벌였습니다. 그땐 침묵이 비겁함이라 여겼습니다. 옳다고 믿는 것을 말하지 않는 건 나를 속이는 일처럼 느껴졌으니까요.


그런데 나이를 먹으니 이상하게 변하더군요.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말이 점점 편하게 들렸습니다. 너그러워진 게 아닙니다. 솔직히 말하면 체력이 없었습니다. 회의 자리에서, 밥 먹는 자리에서, 단톡방에서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 한 줄을 삼키고 나면 묘하게 안도감이 찾아옵니다. 분위기는 평온해지고 저는 까칠한 사람이 되지 않으니까요. 나 혼자 넘어가면 다들 편할 거라는 합리화도 자연스럽게 따라옵니다.


문제는 그 편안함에 익숙해지다 보니 명백한 문제 앞에서도 입을 닫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선을 넘는 행동을 보고도 그냥 지나치고, 예전 같으면 분명히 말했을 장면에서도 조용히 시선을 돌립니다. 갈등을 만들기 싫어서 이해하는 척 넘어가는 거죠. 그런데 이런 태도는 관용이 아니라 방관입니다. 잘못된 걸 알면서도 말하지 않는 건 상대를 배려하는 게 아니라 나를 보호하는 일뿐이니까요. 우리가 이렇게 서로의 오류를 눈감아주는 순간들이 쌓일 때 사회의 기준선은 점점 흐려집니다.


그럴 때 문득 《1984》가 떠오릅니다. 오웰이 말한 ‘생각 없는 인간’은 고문이나 감시 때문에 만들어지는 존재가 아닙니다. 피곤함 때문에 먼저 입을 다물고 스스로 검열하는 사람들. 거창한 사상 검증이나 폭력이 없어도 체제는 무너질 수 있어요. 오히려 피곤하다는 이유로 하나씩 눈감기 시작할 때 우리는 더 빨리 빅 브라더의 세계에 가까워집니다. 기준이 사라지고 예의가 무너지고 진실이 흐려지는데 아무도 말하지 않는 사회. 피곤하다는 이유로 합의된 침묵이 쌓이면 결국 비상식이 상식을 덮습니다. 그 침묵의 카르텔을 만드는 건 독재자가 아니라 바로 저 같은 ‘피곤한 개인들’ 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윈스턴의 일기장을 자꾸 떠올립니다. 그가 목숨을 걸고 쓴 건 대단한 이념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자기 눈에 보이는 것을 사실대로 적는 일이었죠. 세상이 모두 거짓을 말할 때 ‘2 더하기 2는 4’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 오웰이 말하고 싶었던 저항은 아마 이런 것일 겁니다. 피곤하다는 이유로 눈감지 않는 일.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말 앞에서 속으로라도 선을 분명히 긋는 일. 그것이 자기 정신을 지키는 최소한의 방어선입니다.


《1984》의 결말은 비극적이지만 메시지는 오히려 선명합니다. 생각하기를 멈추는 순간 우리는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 그저 존재하는 무언가가 된다는 사실.


그래서 저는 오늘도 조금 피곤하더라도 눈을 한 번 더 뜨려고 합니다. 편안한 침묵보다는 조금 불편하더라도 깨어 있는 피로함을 선택하고 싶어요. 그게 무력감에 먹히지 않고 인간으로 남는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투쟁일 테니까요.


s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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