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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dd Oct 18. 2023

천국으로 도피

생존전략 ep.8

*현재


우리가 사는 세상은 눈에 보이는 이 넓은 세상이 아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신체 꼭대기에 있는, 단단한 뼈로 둘러싸인 구불구불하고 붉은 세상이다. 각자가 각자의 세상 속에서 상상하고 규정하고 판단하고 현실이라 믿으며 살아간다. 사실 현실이란 제각각 다른 것이고, 사는 세상이 다르니 현실 또한 다른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리도 대화가 통하지 않을 수는 없지 않은가.


지훈은 벤치에서 일어섰다. 합의점이 없는 대화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래. 형 멋대로 생각해. 나도 멋대로 생각할 거니까. 각자 하고 싶은 대로 하자.”

“네가 무슨 짓을 하는지는 알고 그러는 거지?”

“어. 잘못된 걸 바로잡는 중이지.”

“누군가의 삶을 망치는 중은 아니고?”

“그건 형이 하는 짓이지.” 지훈은 걸음을 옮겼다. 궤변이라면 더 이상 들어줄 용기가 서지 않았다.

“내가 예전에.” 민준은 목에 힘을 주고 말했다.

“예전에 닭갈비 집에서 잠시 일했었거든. 그 사장님이 그러더라. 좋다고 생각하면, 진짜 좋은 게 되는 거라고.”

“그래서?”

“네가 현주한테 무슨 말을 하든, 현주한테 악마는 너야.”

“아니. 악마는 형이지. 일을 이렇게 만든 건 형이잖아. 나는 진실을 말하는 거고.”

“네가 아는 게 진실은 맞고? 맞다 한들, 진실이 그렇게 중요한가.”

“그건 현주 씨가 판단할 일이지. 생존전략이야. 나도 도저히 보고만 있을 수는 없을 거 같아서. 살기 위해서 하는 짓이야. 각자 할 일을 하자.”

“그래 그럼. 네 마음대로 해.”

지훈은 걸음을 옮겼다. 걸어왔던 그 길 그대로 한 걸음 한 걸음. 이제 공기는 조금 차가워졌고 주변은 어두워졌다. 그에 따라 초록빛으로 빛나던 나무들도 빛을 잃었다. 

현주 씨가 있는 2인실은 여전히 고요했다. 아직 맞은편 자리에는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으니 1인실이라 하는 게 맞는 표현일까. 어쨌든 현주 씨는 그 점이 퍽 마음에 드는 듯했다. 


“생각보다 일찍 오셨네요. 민준 씨가 없으면 이렇게 누워서 그냥 이런저런 생각을 좀 해요. 저 혼자 있으니까 고요한 게.. 생각 정리하기에는 딱 이거든요.” 현주는 양손을 곱게 모은 채로 고개만 돌려 말했다.

“아, 혹시 제가 방해했을까요?”

“아니, 아니요. 막 끝나던 참이었어요. 민준 씨는요?”

“형은 아직.. 산책을 좀 더 하고 싶다네요.”

“아 네. 대화는.. 잘하셨나요?”

“네.” 지훈은 짧게 대답하고는 “뭐..” 하며 말꼬리를 늘렸다.

“하고 싶은 말씀이라도?”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어떤 말로 어떻게 시작해야 현주 씨가 덜 아파할까.

“흠.. 그게.. 현주 씨. 질문 하나만 해도 될까요.”

“네 얼마 든지요.” 현주 씨는 다소 당황해하며, 이런 상황을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답했다.

“저희 형 이랑은 어떻게 만나신 거예요?”

“아.. 하.. 하.. 그거 물어보시려고 이렇게까지 분위기를 잡으신 거예요?” 

현주 씨의 얼굴에는 다시 웃음이 피었다. 지훈은 여전히 진지함을 잃지 않았고.

“그냥.. 어느 날 갑자기? 다들 그렇잖아요. 어느 날 갑자기. 인연.. 인 거죠.”

그녀는 흘러나오는 미소를 막기 위해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럼에도 설레는 미소를 막을 수는 없었고, 그럼에도 작정한 지훈의 입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의심 가는 행동은 없었나요? 뭐.. 보험 수혜자 명의를 바꾸자고 하던가..”

“네?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지금?”

그녀의 표정은 고작 몇십 초 만에 빠르게 변했다. 굉장히 부자연스럽게, 상반된 표정이 자리싸움을 펼치다 결국에는 미소가 자리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아 죄송합니다. 사실.. 제가 꼭 드려야 하는 말이 있어서요.” 민준은 숨을 크게 들이쉬고 다시 내뱉은 뒤 말을 이었다. “형에 대해서 얼마나 아세요?”

“..” 현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형이 현주 씨한테 무슨 일을 한다고 하던가요? 조금.. 이상하지 않나요? 알고 지낸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남자가 시한부 삶을 살고 있는 현주 씨를 위해서 직장도 포기하고 간호에만 몰두한다는 게.”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거예요.”

“현주 씨 보험금을 보고 접근한 거예요. 혼인 신고도 보험금 때문에 한 일입니다.”

“나가세요.”

“네?”

“나가시라..!” 쿨럭. 또 한 번 쿨럭. 

현주 씨의 무리한 외침은 기침을 불러왔고, 성마른 기침은 눈물을 불러왔다. 그녀의 눈은 붉어지기도 전에 눈물부터 쏟아냈다.

“현주 씨.”

“제 이름..” 쿨럭.

 “부르지도 마세요. 지훈 씨가 뭘 안다고.. 뭘 안다고 그렇게 말해요? 민준 씨가 진심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고 그렇게 말해요? 저는 진심이라 믿어요. 민준 씨는 충분히 제가 진심이라 느낄 수 있을 만큼 노력했고, 저는 그런 사람이라면 아, 내 보험금이 아깝지 않겠구나 하면서 살았어요. 저는 행복했고 앞으로도 행복할 수 있었어요. 근데 그걸..”

지훈 씨가 다 망친 거예요.

지훈은 그녀가 끝마치지 못한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우리는 각자의 눈으로 각자의 세상을 본다. 각자가 보는 세상은 전부 다르지만 그것들 모두가 각자에게 현실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누군가의 믿음은 현실이다. 그의 삶에서만큼은 현실인 것이다.

이제 현주의 현실은 바뀌었다. 지훈이 덧붙인 진실 한 점 때문에. 

지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냥 가만히, 눈도 끔뻑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동시에 현주도 지훈의 삶에 한 점의 진실을 덧붙인 것이다. 여태 쌓아 올린 현실을 와르르 무너뜨릴, 억지로 버틸 수 없을 만큼 무거운 현실을. 지훈이 알던 정의는 무너져 내렸다.




@현주의 삶


현주는 그날 분홍 드레스를 입었다. 분홍색 구두도 신고 머리도 양 갈래로 이쁘게 묶었다. 그날의 목표는 오직 하나, 엄마의 말대로 ‘새로 만나게 될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기’. 목표는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이쁘다.”

현주는 유치원의 커다란 거울 앞에서 화려하고 아름다운 공주 한 명과 마주했다. 새로 만나는 친구들을 위해 특별히 꺼내 입은 분홍 드레스는 아주 옳은 선택이었다. 아쉬운 점이 하나 있다면 토끼 인형을 가져오지 못했다는 것. 토끼 인형, 하다못해 요술봉이라도 손에 쥐고 왔다면 더 완벽한 모습이었을 텐데. 가끔 심술 가득하고 사악한 마녀로 변하곤 하는 엄마의 제안 때문에 현주는 아쉬운 대로 만족해야 했다.

“그건 안돼.”

“아니야, 가져갈 거야.”

“김현주. 안돼.”

“가져갈 거야.”

“너 그거 가져가면 아이스크림 안 준다. 알아서 해.”

엄마는 알아서 하라고 했지만 그것은 사실상 반강제적인 제안이었다. 어떻게 아이스크림을 포기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살면서 아이스크림을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은 이상 불가능한 것이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현주는 당연하게도 토끼 인형을 두고 아이스크림을 쥐었다.

그러나 거울을 보고 있는 지금, 현주는 과거의 선택을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다. 아이스크림은 고작 5분도 버텨내지 못하고 그녀의 뱃속으로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그녀의 손에는 아이스크림도 토끼 인형도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할짝. 

현주는 아쉬운 마음에 혀로 인중을 한번 쓸었다. 사실 아쉬운 것과는 별개로 얼마 전부터 생긴 버릇이었지만 그럴 때마다 엄마의 호통을 들어야 했기 때문에 이제는 미리 마땅한 핑계를 하나 생각해 두는 것이다.

이를테면 혹시라도 엄마가 “김현주! 엄마가 그거 하지 말랬지!”라고 말한다면 현주는 “아니 방금은 엄마 때문에 그런 거잖아요. 엄마가 인형 못 가져오게 해서..”라고 답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물론 둘은 전혀 상관관계가 없긴 하지만 뭐. 당시 그녀의 나이는 고작 여섯이었고, 그녀의 생각으로는 충분히 그럴싸한 대답이었다. 

현주는 엄마의 눈치를 한번 보고는 재빨리 인중을 한 번 더 쓸었다. 그리고 또 한 번. 또다시 한번.

가능하다면 할 수 있을 때 많이 해둬야 했다. 그래야 나중에 더 잘 참을 수 있을 거라는 일차원적인 생각이었다.

“현주야 오늘..” 

선생님과 대화를 마친 엄마의 눈이 현주에게 닿았을 때, 그녀의 얼굴에 피어있던 웃음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것은 어른들의 특별한 능력이었다.

“너 그거 하지 말랬지.” 엄마는 검지를 들이밀며 위협적으로 말했다.

“저 안 했어요.” 현주는 억울하다는 듯 말했지만 그녀의 인중은 이미 물기로 촉촉했다.

엄마는 말없이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 

그럼 엄마도 그거 하지 마세요,라고 현주는 말하고 싶었으나 그 말은 마음속 깊은 곳에 묻어두기로 하고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오늘은 엄마 때문에 그런 건데. 미리 준비해 둔 말도 물론 속으로 삼켰다. 

“어머니 이제 들어가 봐야 될 시간이 다 돼서..”

“아, 네. 현주 오늘 친구들 많이 사귀고 와. 알겠지?” 

엄마의 얼굴은 선생님을 볼 때 한번, 현주를 볼 때 다시 한번. 불과 2초 정도 되는 시간 동안 두 번이나 바뀌었다.

현주는 여전히 시무룩한 표정으로 몸을 배배 꼬며 고개를 끄덕했다. 

엄마는 몸을 틀어 유치원을 빠져나갔고 현주는 선생님의 손을 잡고 반으로 향했다. 이제 이 나무 문만 넘으면 새로운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다. 아,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려왔는가. 얼마나 많은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을까. 얼마나 많은 친구들이 나를 보며 이쁘다 말해줄까. 현주의 머릿속에서 몇 초 전 엄마의 위협은 깔끔히 사라졌고 오직 설렘과 긴장으로 채워져 있었다. 

현주는 괜히 부끄러운 마음에 몸의 절반을 선생님의 허벅지에 감추고는 할 짝. 부끄러움에 인중을 한번 쓸었다. 

드르륵- 거리는 소리와 함께 나무 문이 열리고. 현주는 선생님의 허벅지에 딱 붙어 반으로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선생님은 반에 들어서며 큰 소리로 말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선생님의 인사에 몇몇 활발한 아이들이 큰 목소리로 인사를 반복했다. 정신이 없기는 했으나 그런 몇몇 친구들 덕에 전체의 목소리가 올라가고 반에는 활기가 띠는 것이다. 현주도 그 덕에 긴장되는 마음을 잠시 내려두고 키득거리며 웃을 수 있었다.

“자, 만나서 반가워요. 새싹 반 친구들.” 선생님은 유치원 선생님답게 활기차고 반가운 표정으로 인사하고는 “현주는 저쪽 가서 앉을까?” 하며 맨 뒤쪽 비어있는 자리를 가리켰다.

현주는 고개를 끄덕하고는 선생님의 허벅지를 빠져나왔다. 그 순간이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현주는 자신도 모르게 인중을 할짝대고 몸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어! 분홍 돼지다!”

현주의 몸이 선생님의 허벅지를 빠져나와 완전히 노출되었을 때, 저 멀리서 누군가 외쳤다. 씩씩하고 우렁찬 목소리였다.

반은 순식간에 웃음으로 소란스러워졌고 현주는 ‘분홍 돼지’가 자신을 의미한다는 것을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반 어디를 둘러봐도 분홍색 옷은 자신밖에 없는 데다, 저 멀리서 우뚝 선 채로 손가락질하는 남자의 검지가 본인을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들 조용. 친구한테 그런 말 하면 안 돼요. 현주가 얼마나 이쁜데.” 

선생님이 얼른 중재에 나서봤지만 아이들의 자유분방한 입을 막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현주는 그 자리에 서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눈물을 닦았고 현석이는 본인의 의견을 굽히지 않는 지조 있는 남성이었다.

“맞잖아요 분홍 돼지! 난 그냥 맞는 말 한 거뿐인데!”

아이들은 솔직하고 순수해서 머리에서 나오는 말을 거짓 없이 그대로 내뱉는다, 고 몇몇 어른들은 갖다 붙이곤 한다. 그렇게 현석이의 행동은 정당화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간과하고 있는 한 가지. 아이들의 솔직함과 순수함은 언제나 본인의 이익 관계를 떠나 있을 때만 발동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머리는 아직 새하얀 백지로, 채워 넣고자 하는 것들로 채워 넣을 수 있으나 생존본능, 자신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만큼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설정돼 있는 기본 세팅 값인 것이다.

혹여나 본인에게 약간의 위협이라도 될 만한 상황이 온다면, 그들은 망설이지 않고 거짓을 내뱉을 것이다. 그들 또한 어린아이이기 전에 인간이기 때문이리라.

“현석이!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선생님은 아이의 가슴팍에 붙은 명찰을 확인하고는 전보다 엄한 투로 말했다.

“왜 저한테만 그래요.”

“쓰읍. 현석이.” 선생님은 한층 더 엄하게 말했다. 

고작 그것이 전부다. 현주가 한 것이라고는 부끄러워하고 놀림받고 그 자리에 서서 울음을 터뜨린 게 전부다. 선생님이 한 것이라고는 꼬마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고 짓궂은 친구를 중재한 것이 전부다. 그러나 그 사소한 행동들은 영 이상한 결과로 나아갔다.


그날 현주는 본래의 목적과는 달리 단 한 명의 친구도 사귀지 못했다. 선생님이 가리킨 자리의 뒤에는 현석이가 앉아있었고 현석이는 “너 때문에 내가 혼났잖아, 이 분홍 돼지야.” 하며 모든 잘못을 그녀에게 돌렸다. 주변 친구들도 현주보다는 현석이를 더 좋아했다. 현주의 목적은 다음을 기약해야 했지만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날이 갈수록 현석이의 장난은 더 심해졌고 현석이를 추종하는 친구들 또한 더 많아져 갔기 때문이다. 

일이 이렇게까지 진행되는 동안 선생님은 도대체 무엇을 했느냐, 그녀는 그녀 나름의 싸움을 하고 있었다. 꼬마 친구들과 처음 인사를 나눈 그날. 현석이라는 친구의 짓궂음을 알아챈 그날. 새싹 반의 선생님은 반의 평화를 위해 현석이에게 조금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겠다고 판단했다. 

한 명의 친구도 상처받지 않게, 현석이가 이상한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게 말이다. 그것이 선생님으로서 해야 하는 일 아니겠는가. 

그러나 원장 선생님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유치원을 운영하는 데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학부모들의 평가인데, 누가 자기 아들을 혼내고 겁박하는 유치원을 달가워하겠는가. 

유치원의 아이들을 옳은 방향으로 이끌고 더 세심하게 보살피기 위해서는 많은 선생님과 좋은 시설이 필요하고, 많은 선생님과 좋은 시설을 갖추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고, 돈을 위해서는 학부모들의 좋은 평판이 필요했다. 그러니 학부모들이 원하는 것을 최대한 맞춰주는 것이 결국은 아이들을 잘 돌보는 것과 직결되는 것이고 가장 신경 써야 하는 것이 되는 셈이다. 뭐, 수단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 언제나 본질은 잊히고 마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열정만 넘치는 새싹 반의 김 선생님이 이 모든 것을 망치려 든 것이다.

“김 선생님? 잠시 저 좀 볼까요?”

바로 다음 날 새싹 반 선생님은 원장 선생님과 마주 앉았다.

“혹시 어제.. 현석이라는 친구한테 뭐라 하셨어요?”

“네? 아.. 현석이가 어제 현주라는 친구를 심하게 놀려서요. 그러면 안 된다고 그러긴 했는데..”

“어떻게요?”

“분홍 돼지라고..”

“아니 선생님이 어떻게 말했는데요?”

“그냥 그러면 안 된다고, 친구한테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게 다예요? 어떤 말투로 그랬어요?”

“네..?”

“어제 현석이 부모님한테서 전화가 왔어요. 유치원 첫날부터 이게 뭐 하는 짓이냐,랍니다. 아이를 얼마나 잡았으면 애가 유치원 안 가겠다고 난리를 치냐고.” 원장은 한숨을 길게 내쉬고 말을 이었다. “부모님 말로는 현석이 뺨이 붉게 물들었다는데 설마.. 아니죠?”

“네? 원장님! 아니에요. 진짜 아니에요. 제가 어떻게..”

“네, 네. 저도 그건 부모님이 오해한 거라 생각해요. 그런데 아이들은 거짓말 같은 거 못하는 거 아시죠. 얼마나 무섭게 말했으면 현석이가 그렇게 난리를 쳤을까 싶네요.”

“아니 저는..”

“아니요. 지금 뭐라 말해봐야 제 귀에는 들어오지도 않아요. 앞으로 어떻게 하는지 제가 지켜보겠습니다. 한 가지 말씀드리는데, 아이들은 거짓말 같은 거 안 해요. 속일 생각은 말아요.” 

원장은 그렇게 자리를 떠났다.

새싹 반 선생님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한 가지뿐이었다. 반의 분위기도 중요하고 학생 개개인의 마음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본인의 직장도 중요했다. 직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우직함’보다는 ‘눈치껏’이 더 좋은 전략이었기 때문에 김 선생님도 그쪽을 택한 것이다.

그때 그녀의 선택은 결과적으로 정답이라 할 수도 있다. 현석이도 만족하고 현석이 부모님도 만족하고 원장님도 만족하고 반 아이들도 만족하고 본인의 지인들도 만족했으니. 의외로 반은 문제없이 평화로웠으니. 

그녀는 앞으로도 쭉 유치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고, 새싹 반은 웃음이 가득했으며, 아이들과 원장 선생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도 있었다. 

이 모든 일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현주만 침묵하면 되는 일이었는데, 다행히도 현주는 침묵했다. 대부분의 피해자들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새싹 반의 평화는 그렇게 찾아왔다.

물론 반의 평화를 유지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현주는 평화를 누리지 못했다. 그녀는 선생님이 없는 곳에서 놀림을 당해야 했고 외톨이로 남아야 했다. 다수의 웃음과 행복과 안전을 위해 희생되어야 했다. 그녀는 이미 확실한 놀림거리였기 때문에 다수에게 즐거움을 선사했으며, 새로운 놀림의 대상이 양성되지 않게 울타리 역할을 했다. 새싹 반이 정상적으로 유지되는 것은 현주 덕이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몇몇 친구들은 말했다. ‘그러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라고.

현주라는 울타리가 사라지면 대상이 본인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는 멍청한 놈들이 하는 소리였다. 만약 현주가 사라지고 본인이 그런 상황을 겪게 된다면 어떤 소리를 늘어놨을까.

그러나 검증할 방법은 없었다. 그런 상황이 벌어지기에는 현주가 너무 굳건하게 잘 버텨냈기 때문이다.

또 상황과 전혀 상관없는 몇몇 사람들은 말했다. ‘알면서도 방치한 주변 사람들이 잘못’이라고.

상황이 본인에게 닥치지 않았을 때야, 누가 훌륭한 소리를 떠들지 못하겠는가. 그러나 상황에 속하게 되면 그런 훌륭한 생각 따위는 생존본능에 의해 밀려나기 마련이었다.

현주의 주변에도 그녀를 안쓰러워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녀를 구조하는 위험으로 뛰어들기보다는, 권력의 파도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적절히 몸을 싣거나 관망하기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도 약자였다. 그들에게 누구도 희생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사실 이러한 현상의 해결책은 어디에도 없다. 다수의 인간들이 모이는 이상 필연적인 현상이 되고 마는 것이다. 

물론 도덕적이고 매사에 옳은 선택만 하는, 마음이 따뜻하고 정의로운 사람도 세상에는 존재하는 법이나, 그들은 대개의 경우 피해자 주변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니 피해자들의 삶은 언제나 그 자리에 머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현주의 삶 또한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그로부터 얼마나 긴 시간이 흘렀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왕따’라는 우직한 충신은 언제 어디든 그녀 옆에 딱 붙어 다녔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핵심 주축으로 공리주의를 실천하고자 했다. 모든 부정적인 것들은 그녀에게 쑤셔 박고, 모든 긍정적인 것들은 현주를 제외한 나머지가 사이좋게 나눠 가졌다.

초등학교에서도 중학교에서도 고등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현주도 절대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 않았고, 매 순간 발버둥 치고 역전의 발판을 찾아 헤맸다. 그러나 어쩌면 그녀의 삶은 선택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선택은 매 순간 안 좋은 상황을 최악의 상황으로 만들었으니 말이다.


그녀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되었을 때, 그녀는 이미 타인이 규정한 자신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친구들의 말대로 ‘못생기고’ ‘뚱뚱하고’ ‘더러운 년’이기 때문에 친구들과 친하게 지낼 수 없었다. 어떻게든 친구들과 공존하기 위해서는 친구들의 의견에 잘 따라야 했고 최대한 피해를 줘서는 안 됐다. 친구들의 말에 의하면 눈에 띄는 것 자체가 죄이니 최대한 몸을 웅크리고 고개를 숙이고 다녀야 했다. 친구들이 욕하면 현주가 해야 할 말은 “미안.”이었다. 그것들만 잘 지킨다면 겨우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것이다. 

그나마 간혹 친구에게 도움이 되는 짓을 하면 며칠 안 가기는 해도 약간의 호의를 맛볼 수는 있었다. 그것이 현주가 선택한 ‘발버둥’이었고 ‘역전의 발판’이었다. 

그러한 이유로 현주의 초등학교생활 또한 유치원과 별다를 것 없었다. 마찬가지로 다른 친구들도 유치원과 별반 다를 것 없이 수월한 학교생활을 했으니, 특히 현주와 같은 유치원을 나온 친구들이 그러했다. 그들은 이미 타인과 가장 빨리 친해질 수 있는 방법 중 한 가지를 경험한 바 있기에, 과거의 경험을 그대로 실행하면 되었다. 특히 현석이는 그 실행에 앞서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현석이와 현주는 1학년 2반으로 같은 반이 되었다. 현석이에게는 최고의 반 배정이었고 현주에게는 최악의 반 배정이었다.

“어! 분홍 돼지! 너 2반이냐?”

“어.. 응..” 현주는 멋쩍게 웃었다. 

“아 재수 없어. 나 아는 척하지 마라.” 

현석이는 그렇게 말했고 현주는 그 말이 무서웠다. 서로 아는 척하지 않는다면 당연히 현주에게도 상황을 벗어날 기회가 주어지는 게 마땅한데, 현주의 마음속에는 이미 친구들이 자신을 거부한다는 것 자체에 두려움이 있었다. 비록 그 대상이 현석이일지라도, 자신을 최악의 상황으로 밀어 넣은 장본인 일지라도 거부당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이후의 상황을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현석이가 현주를 무시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현주를 찾았고, 또 열성적으로 찾았다. 


“어이 분홍 돼지!” 

이유인즉슨, 현주가 많은 친구들과 관계를 맺기 위한 수월한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현석이가 소리치면 몇몇 친구들이 키득거리며 웃는다. 그럼 현석은 “분돼! 분돼!” 하며 한술 더 뜨고 이번에는 서로를 보며 대놓고 웃는다. 그럼 곧바로 그들은 웃음과 재미가 넘치는 유복한 환경 속에서 우정을 다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다수의 학생은 두 가지의 선택지를 갖게 된다. 하나는 정의의 사도가 되어 피해자를 구출하고 본인이 거대한 파도에 몸을 던지는 것. 다른 하나는 다수의 흐름에 조용히 몸을 실어, 장난인 양 적당히 웃고 넘어가는 것. 당연하게도 다수는 두 번째 선택지를 택한다. 단지 그들은 자신을 지키는 와중에 타인까지 구출해 줄 능력이 없는 인간이었을 뿐이고, 정의로운 멍청이가 아니었을 뿐이다. 어쩌면 공리주의를 추종하는 도덕적 인간이었을 수도 있고.

현주는 또다시 같은 상황, 어쩌면 더 심한 상황에 처했으면서도 구원의 손길을 뻗지 않았다. 그것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얼마나 위험한지 이미 알기 때문이었다. 

그의 구원의 손길은 오히려 상실감과 더 심한 고통을 선사한다. 그녀의 경험에 의하면 선생님에게는 약자를 구원해 낼 힘이 없다. 그들은 학생을 위한답시고 부주의하게 나서서는 괜히 상황을 난처하게 만들기만 할 뿐이다. 

24시간 붙어있지 않는 이상, 선생님이 할 수 있는 일은 굉장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약자를 돕고자 하는 그들의 의지는, 가해 방식을 더 교묘하게 만들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니 그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들의 도움이 현주에게는 보복의 여지일 뿐이었다. 

현주는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고, 해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기도 했다.

그래서 뭘 얻었을까. 

그런 노력의 결과로 얻게 된 것이라고는 ‘해결책이라는 것이 워낙 찾으면 찾을수록 더 깊은 곳으로 숨어드는 바퀴벌레 같은 놈이라, 노력이 보장해 주는 것 또한, 그럴싸한 해결책이 아닌 허탈감과 자괴감뿐’이라는 사실 정도였다. 

그녀의 상황을 알고 있는 주변 사람들, 그중에서도 그나마 친절하다고 할 수 있는 몇몇 사람들은 하나같이 답답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조언 비슷한 것들을 늘어놓았으나 그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해결책은 전혀 현실성이 없는, 막상 본인들도 상황에 처하면 시도하지 못할 것들뿐이었다. 

그래, 타인들은 확신에 차서 해결책을 늘어놓지만 그들은 현주의 상황에 놓여보지 못한 무경험자였을 뿐인 것이다. 문제의 핵심을 파악하지 못하고 겉으로 보이는 것에 대해서만 확신하고 떠들어댈 뿐인 것이다. 

그러니까 어떠한 방법도 어떠한 조언도 당시의 현주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바퀴벌레처럼 깊게 숨어든다면, 더 깊게 따라가면 될 일이리라.

그녀는 긍정을 잃지 않았다. 현주가 생각하기에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인내와 적극적인 배려가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몇 가지 요소가 필요했는데 그나마 다행인 점이 하나 있다면 그중에서 가장 효과적인 것이 당시의 그녀에게 있었다는 것이다.


현주의 부모님은 맞벌이 부부다. 엄마는 왕년에 탁구 국가대표 상비군으로 활약한 경력을 살려 동네에 탁구장을 운영하고 아빠는 무슨 회사인지는 모르나 회사에 출근하신다. 그러다 보니 막내딸에게 큰 관심을 주기가 버거웠던 두 분은 딸에게 많은 관심 대신, 많은 용돈을 쏟아부었다. 그녀의 용돈은 하루에 오천 원이다. 또래 친구들이 하루에 많아야 천 원 정도 받을 때 현주는 하루에 오천 원을 받았다. 그것이 현주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자랑거리였고, 상황을 헤쳐나가는 데에 도움이 되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당시 현주는 유일한 수단을 나름 잘 활용한 덕에, 현상 유지에서 더 나아가 미미한 탈출의 빛을 볼 수도 있었다. 

문구점 앞에서 서성이는 친구를 보면 떡볶이를 사 주기도 하고 오락실에서 같이 게임만 해준다면 기꺼이 친구의 동전까지 넣어주기도 했다. 찰흙이나 색종이 같은 가벼운 준비물이 있는 날에는 보통 두세 개 정도 여유분을 사서 없는 친구에게 빌려주기도 했고, 오천 원으로 사기엔 버거운 준비물, 이를테면 체육복이나 줄넘기나 책 같은 경우에는 본인의 것을 빌려주고 꾸지람을 대신 듣기도 했다. 

물론 그녀의 이런 노력에도 결과가 항상 긍정적이지는 않았다. 가끔 어떤 친구는 현주가 건네는 체육복을 보고 “누가 네가 입던 옷을 입냐, 이 돼지야!”라고 하기도 했고 어떤 친구는 “야. 나 오백 원만. 먼저 오락실 가 있을게.”라며 핵심 조건을 무시하는 얌체 짓을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녀에게는 그것이 유일하게 시도할 수 있는 일이었고, 여태 시도했던 많은 방법 중 유일하게 효과가 있는 것이었다. 그녀가 느끼기에 상황을 탈출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김현주. 나 와플 하나만.”

“야, 오늘은 내 차례거든!”

그녀의 적극적인 움직임에 친구들도 적극적으로 그녀를 찾기도 했다. 심지어 먼저 말을 걸었고 먼저 문구점에 가자고도 했다.

“둘 다 사줄게. 헤헤.” 

그런 날들이 반복될수록 현주는 더 많은 친구들과 당당히 하굣길에 나설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이 비록 문구점까지의 동행에 불과하긴 하더라도 말이다. 

현주는 이제 어떻게 하면 친구들과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질 수 있는지 알게 되었다, 고 믿었다. 

친구들에게 먼저 다가가고 먼저 도움을 주면 친구들도 잠시나마 그녀를 좋아해 줬다. 물론 그들이 좋아하는 건 현주의 경제력이었지만 그게 뭐 그리 큰 문제라고. 

어쨌든 상황은 전보다 나아졌으니 드디어 해결책을 찾아낸 것이다,라고 믿었다. 내가 먼저 도움을 주면 친구도 나를 좋아해 준다, 이 간단하고도 당연한 문제를 깨닫는데 왜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 조금이라도 빨리 깨우쳤으면 더 좋았을 텐데. 

그러나 이제 와서 뭘 어쩌겠는가. 지금이라도 알게 돼서 다행인 것이고, 조금 늦기는 했으나 방법을 알게 되었으니 늦게나마 더 열심히 달려야 하는 것이다. 

사소한 도움으로 친구들의 사소한 호의를 얻었으니, 크게 도우면 그들의 호의 또한 커지지 않을까. 그래 그것 또한 간단하고 당연한 세상의 이치였다.


이제야 어느 정도 버틸만한 학교생활을 하게 된 현주는 더 나아가 함께 웃고 함께 떠드는 학교생활에 욕심이 생겼다. 잠시 본인의 본래 자리를 망각하고 타인이 규정한, 사회 속에서 이미 만들어진 이미지를 깜빡 잊고 분수에 맞지도 않은 자리를 탐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곧 죄악이다. 분수에 맞지도 않는 것을 탐하는 것 자체가 그녀의 삶에서는 죄인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후에 그녀에게 행해진 처벌은 어떻게도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초등학교 4학년이 된 현주는 다시 한번 현석이와 마주했다. 그녀의 2학년 3학년 시기가 버틸 만했던 이유 중에는 현석이와 같은 반이 아니었다는 것이 크게 작용했지만 현주는 그 점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단지 본인이 해결책을 찾았을 뿐이고, 과거의 자신과 현재의 자신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현석아, 안녕. 헤헤.” 현주는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야. 내가 아는 척하지 말랬지, 이 돼지 새끼야.”

“헤헤. 미안. 오늘 마치고 떡볶이 먹을래? 내가 사줄게.”

현석이와 친해진다는 것은, 말 몇 마디라도 나눈다는 것은 평탄한 학교생활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꽤 긴 시간 동안 버틸만한 학교생활을 했으니 이제는 더 올라갈 때였다. 그 욕심에 걸맞게 나타난 현석이는 수단이지 위험요소가 아니었다. 비장의 카드가 준비돼 있으니 당연히 일은 쉽게 풀릴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현석이는 

“뒤질래? 아는 척, 하지, 말라고!” 

한 어절 당 한 대씩 현주의 배를 발로 차며 말했다.

현주는 사물함 뒤쪽에 고꾸라진 체로 신음을 내뱉었고 현석이는 씩씩대며 반을 나섰다. 여기서 현주가 잘못한 것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녀에게는 그것마저도 죄가 되었다.


현주는 이쯤에서 멈출 수 없었다. 그녀의 머리는 이미 과거의 영광을 맛본 상태이기 때문에, 보통의 피해자들이 압도당하기에 충분한 낙담과 무력함은 그녀에게 이겨야 할 대상이었다. 

그녀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여전히 새로운 기회를 찾았고, 미미한 기회라도 보이면 일단 덥석 물고 봤다. 그 과정에서 실패는 필연적인 요소였지만 이미 현주에게 실패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지 않던가. 

발에 차이고 팔뚝에 멍이 들고 우유에 팩에 맞아 머리가 하얗게 염색되어도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기회는 그만큼의 대가를 치렀을 때야 비로소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다른 날과 별반 차이 없이 비슷하게 따돌림과 폭력을 겪었고 비슷하게 간식으로 상황을 무마했다. 보통의 날들과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그날따라 유난히 배가 아프다는 점과, 아픈 배를 하교 시간까지 절대 참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점뿐이었다. 

그런데도 절대 쉬는 시간에는 일을 해결할 수가 없었다. 이유인즉슨 쉬는 시간 화장실에는 분명 몇몇의 친구들이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현주가 들어가는 것을 목격할 텐데 소변을 해결하는 시간보다 조금이라도 더 길었다가는 당장 반에 똥쟁이라고 소문날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이미 그녀는 과거에 이 문제로 일주일이나 놀림을 당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의 따돌림이 얼마나 강하던지 그녀의 모든 노력에도 작은 효과조차 얻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 이왕이면 수업 시간에, 그중에서도 오늘 4교시 체육 시간에 가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던 것이다.

3교시가 끝나고 4교시로 넘어가기 전. 현주는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반 친구들이 서둘러 운동장으로 뛰쳐나갈 때 체육 선생님을 찾아갔다. 

“선생님. 제가 배가 너무 아파서 그런데 조금만 늦게 나가도 돼요?”

“쉬는 시간에 해결안 하고 왜 지금 가니?” 

선생님은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한 후 말했다. 4교시 시작까지는 고작 2분이 남은 상태였다.

“그.. 참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너무 아파서요. 보건실에.. 한번 가봐야 될 거 같아요.” 

거짓말이었다. 보건실에는 갈 생각도 없었지만 놀림의 대상이 되지 않기 위해, 선생님께 꾸지람을 듣지 않기 위해 한 말이다. 

“보건실? 그래 그럼 얼른 갔다 와.” 

현주는 교무실을 떠나 화장실로 향했다. 수업이 시작한 복도는 고요했고 화장실 또한 그랬다. 그 덕에 현주는 마음 편히 볼일을 마칠 수 있었다. 

현주는 한층 여유로운 마음으로 신발을 갈아 신기 위해 반에 들어섰다. 당연히 아무도 없어야 했다.

“아 깜짝이야!”

그러나 그녀가 들어섰을 때 반 뒤쪽 사물함 쪽에서 성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놀란 만큼 현주도 깜짝 놀랐다. 현석이였다. 현주는 너무 놀란 나머지 그를 몇 초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의 눈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당황한 현주는 그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둘은 각자 숨기고 싶은, 서로 다른 이유로 당황했다.

“뭐 이 돼지 같은 년아!” 

그 긴장 상태를 먼저 깨버린 것은 현석이였다. 그는 괜히 그녀에게 때리는 시늉을 한번 하고는 교실을 떠났고 현주는 헤헤, 웃음을 흘려보내며 총총 자리로 뛰어가 신발을 갈아 신었다. 현주는 다행이라 생각했다. 어찌 됐든 화장실에서 대변을 보고 왔다는 사실은 걸리지 않은 것이다. 

그 잠깐의 소동을 제외한다면 다른 날과 다를 것 없이 지루한 수업 시간을 보냈고 어찌어찌 시간은 흘러 종례 시간이 왔다.

청소도 마쳤고 알림장도 썼다. 이제 선생님과 마지막 인사만 나누면 집에 갈 수 있는 것이다. 오늘도 두세 명의 친구에게 와플과 떡볶이를 약속한 상태이니 함께 갈 친구도 정해져 있는 셈이다. 현주는 든든한 마음으로 종례를 기다렸다.


“모두 눈 감아.” 

그러나 선생님은 제자들을 일찍 귀가시킬 마음이 없었다.

“오늘 우리 반에서 있어서는 안 될 일이 벌어졌다. 몇 명은 지금 선생님 말이 무슨 말인지 알 거야. 지금 자진해서 손들면 선생님이 없던 일로 치고 조용히 넘어갈 거고, 지금 손 안 들면 오늘 아무도 집에 못 갈 줄 알아. 아주 사소한 실수 때문에 다른 친구들에게 피해를 줘서는 안 되겠지. 지금 손들면 아주 사소한, 누구나 할 수 있는 실수가 되겠지만 나중에는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이 될 거야. 자, 모두 눈 똑바로 감고. 본인이 작은 실수를 저질렀다, 하는 사람은 조용히 손들어.”

반은 침묵으로 가라앉았다. 현주를 포함한 반의 모든 친구들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현주가 다른 친구들과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범인을 예상할 수 있었다는 것이고, 현석이가 다른 친구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범인을 확신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자, 아무도 없지? 그래 오늘 다 같이 집에 가지 말자. 부모님한테는 알아서 다 말해놓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그렇게 시간은 계속해서 흘렀다. 이때 반의 모든 학생들은 각기 다른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몇몇 학생은 학원에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할 것을 걱정했고, 몇몇은 오락을 즐길 시간이 점점 줄어들 것을 걱정했고, 다른 몇몇은 태권도 도장에서 운영하는 통학버스를 놓칠지도 모른다는 것을 걱정했으며, 피해자는 본인의 돈을 영영 찾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현석은 김현주가 선생님께 일러바칠 수도 있다는 것을, 현주는 지금 현석이가 얼마나 난처할까 하는 것을 걱정했다. 

현주에게 문제는, 현석이가 범인인 것은 당연한 사실인데 그가 지금 이 상황으로 인해 얼마나 힘들어할까 하는 것이었다. 

그 사건은 여태 그에게 당해왔던 것들에 대한 미미한 복수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머릿속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 문제는 따돌림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기에, 지금 상황에서 가장 좋은 방법은 현석이에게 복수하는 것이 아니라 현석이를 돕는 것이라는 생각이 번뜩 든 것이다. 

그것은 기회였다.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확실한 기회이고 큰 도움은 당연하게도 큰 호의로 돌아올 것이다. 그녀의 합리적인 머리가 좋은 순간에 기회를 포착한 것이다. 여기까지 계산이 끝난 현주는 조용히 손을 들었다. 

...

“손 내려.” 선생님이 말했다.

현주는 조용히 손을 내리고 

“모두 눈 떠.” 선생님의 말에 눈을 떴다. 

그녀는 요동치는 심장과 올라가는 입꼬리를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본인 대신 손을 들었다는 것을 현석이가 알게 되면 뭐라 할까. 얼마나 고마워할까. 선생님께 듣는 꾸지람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가끔은 작은 실수를 할 때도 있는 거야. 선생님은 우리 반 친구들이 작은 실수에서 멈춰준 것을 고맙게 생각한다. 자, 이제 인사하고 마치자. 돈은 본인 책상 서랍 밑에 조용히 넣어둬.”

현주는 슬쩍 지갑 속의 돈을 모두 꺼내 책상 서랍 밑으로 밀어 넣으려다 망설였다. 

근데 현석이가 얼마를 훔쳤지? 

그것을 알아내지 못한다면 완벽 범죄는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현주는 다시 한번 입꼬리를 진정시켰다. 액수를 모르니 어쩔 수 없이 물어봐야 되는데, 그것은 곧 은근슬쩍 본인이 그를 위해 손을 들었다는 것을 어필하는 기능도 하지 않겠는가. 내가 너를 위해 손을 든 은인이야. 아무도 나서지 않을 때 내가 나섰다고.

현주는 열었던 지갑을 조용히 다시 닫았다.


상황이 끝나고 하굣길에 오른 현주는 운동장 저 멀리 걷고 있는 현석이에게로 달려갔다. 웬일로 그는 혼자였기 때문에 이보다 좋은 상황은 있을 수 없었다. 웬일로 세상이 그녀의 편에 서준 것이다. 상황이 원하는 대로 척척 흘러가는 것이, 여태껏 버텨온 것에 대한 보상이 드디어 내려지는 것이다. 역시 기회는 그만한 대가를 치르면 이변 없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현석아!”

현석이가 돌아봤다.

“야. 내가 말 걸지 말라고 했지.” 현석은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물어볼 게 있어서.. 미안.”

“뭐.”

“혹시.. 얼마인가 해서. 선생님이 책상 서랍 밑에 넣어 둬라 했는데 얼마인지 몰라서..”

“뭐? 뭐 이 미친년아?”

“아니 그게..”

“..니가 손들었냐?”

“응.. 헤헤.”

“근데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어? 니가 훔친 걸 왜 나한테 묻냐고 이 도둑년아.” 현석은 주위를 둘러보다 큰 목소리로 말했다. “야야. 오늘 우리 반에서 사라진 거 범인 얘란다!”

그의 목소리는 정말 우렁찼다. 굉장히 신경질적이었고, 그 증거로 그의 이마에는 굵은 핏줄이 올라왔다. 사실 그는 굉장히 불안해 보였고 서툴렀지만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말은 자극적이었고 자극은 언제나 시야를 멀게 하는 법이니까.

그의 목소리에 같은 반 친구들 몇몇과 집을 향하던 다수의 친구들이 현주와 현석이 주변에 몰려왔다.

“진짜?”

“진짜?”

“어 방금 자기가 손들었대.” 현석이가 말하고

“아니 난.. 아니 그게 아니라..” 현주가 답했다.


진실이 무엇인지가 뭐가 그리 중요하겠는가. 그녀가 선택했고 그녀가 자백했으니 진실이 어떻든 간에 선생님도 친구들도 모두가 현주를 범인으로 생각했고,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는 한 그녀는 범인인 것이다. 그녀의 지갑에는 고작 사천 원의 돈밖에 없었지만 현석이 주머니 속으로 사라진 학원비 팔만 원을 물어줘야만 했고 그로 인해 발생할 수많은 문제 또한 그녀가 감당해야 할 일들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그녀는 피해자이고 도둑년이었다.


그 후로 그녀의 삶은 완전히 다른 양상을 띠었다. 그 사건이 그녀의 삶을 변화시킨 것일 수도 있고, 그녀의 삶이 그쪽으로 나아가기 위해 그러한 사건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아무도 모르는 일이고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는 일이며 생각해 봤자 무의미한 일이지만 어찌 됐든 간에 중요한 점은 그 후로 나타나는 그녀의 행보가 필연적이고 어쩌면 당연한 결과라는 것이다.


중학생이 된 현주는 학교생활에 있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게 되었다. 그녀에게 노력이란 긍정적 상황을 보장해 주지 않는, 그렇기에 굳이 할 필요도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냥 조용히 등교하고 조용히 있다가 조용히 하교하면 그만인 것이다. 그나마 중학교 시절은 여자 중학교에 입학해 현석이가 가까이 없었기 때문에 조용히 지낸다는 것이 가능했다. 현석이가 없는 학교에서 친구들은 그녀를 피하거나 없는 셈 쳤고, 그녀에게 말을 거는 몇몇조차도 준비물이 필요할 때만 그녀를 찾았으니 정말 마음만 먹으면 투명인간 정도는 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현석이가 없다는 이유로, 상황이 조금이나마 나아졌다는 이유로 희망을 품을 수는 없었다. 여태까지의 경험으로 보아 희망은 언제나 작은 달콤함에 높은 대가를 치러야 하는 사치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래 그녀는 어린 나이에 너무도 많은 것을 알아버렸다. 자신에 대해, 세상 속에서 자신의 자리에 대해, 세상이 흘러가는 방식에 대해, 상황은 절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알아버렸다. 그것이 진실이든 아니든 중요하지 않다. 진실과는 다르게 모두가 믿는다는 이유로 도둑이 되었던 것처럼, 그녀가 믿는 한 그녀에게 있어 세상은 그냥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현주가 세상을 떠난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해결되지도 않는 상황을 붙잡고 있어 봐야 뭐 하겠는가. 나아질 가능성이 없는 삶을 이어가 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영영 해결되지도 않을 고통을 느끼며 붙잡고 있을 바에, 포기하는 쪽을 택했을 뿐이다. 인간이 정말 합리적인 동물이라면 이것이야말로 당연한 결과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정말 극단적인 선택까지 갈 필요는 없었다. 물론 삶이 견디기 힘들다고는 하지만 그녀에게는 스스로 목숨을 끊을 만큼의 용기는 없었고 그런 용기는 애초에 필요하지도 않았다.

그녀에게는 이미 21세기의 과학이 만들어낸 새로운 세상이 존재했으니, 의지만 있다면 당장에라도 그곳으로 편입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의지가 있었다. 그것도 아주 강한 의지가. 

그녀가 느끼기에 그 새로운 세계는 여태껏 본인을 기다린 것이 분명했다. 자신이 속할 곳은 오직 그곳뿐이고, 그곳에 속하기 위해 여태까지의 일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전혀 이상할 게 없는 게, 그녀가 그 세상에 속하고 잘 적응하는 데에 있어 그녀를 막아서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을뿐더러 순탄하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단 한 번도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고 매번 꼬이던 인생이 새로운 세상에서만큼은 정반대로 흘러가더라는 것이다. 

새로운 세상에서 중요한 것은 기존의 세상과 마찬가지로 돈과 시간이다. 현주는 이 두 가지를 모두 가지고 있었고 남들보다 훨씬 더 자유롭게 새로운 세상에 투자할 수도 있었다. 

특히 그녀가 중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는 더욱이 그랬던 것이, 그녀의 부모님이 갑작스럽게 장사를 시작하게 되면서 집에 있는 시간이 더욱 줄었고 현주 혼자 집에 남는 시간은 더욱 늘었으며, 그러한 상황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있었는지 그녀에게 주어지는 용돈 또한 더욱 늘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현주의 삶은 작은방에 앉아 모니터 속의 세상으로 접속하는 순간부터가 진짜 삶이 되었다. 그전의 시간들은 잠들어있는 시간이며 의미 없는 시간이다. 단 한 가지 의미를 갖는다면, 수면과 같은 역할로 새로운 세계에서 생활하기 위한 체력을 보충하는 것뿐이다. 

새로운 세계에서 현주는 타인과 관계를 맺고 중요한 위치를 선점하고 사랑받고 권위와 권력을 누렸다. 새로운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은 기존의 세계와 거의 다를 게 없었음에도 그녀가 이 모든 것을 누릴 수 있었던 이유는 두 가지. 

첫째는 모두가 출발점이 같다는 것이고, 둘째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돈과 리스크가 기존의 세상에 비할 바가 못될 정도로 작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지갑에는 고작 중학생치고는 많은 정도의 용돈이 있었을 뿐이지만 그것을 새로운 세계에서 쓴다면 나름 그럴싸한 자본으로 작용했다. 그것은 새로운 세계에서 장사를 시작할 자금이 될 수도 있었고 외모를 바꾸는 데에 쓸 수도 있었다. 특히 외모는 기존의 세계만큼이나 중요하게 작용했지만, 그에 대해 지불하는 돈과 리스크가 현저히 낮았기 때문에 그녀는 기존의 세계에서 누리지 못한 인기와 사랑을 훨씬 더 수월한 방식으로 누릴 수 있었다. 

그렇게 현주의 용돈은 죄다 게임의 세계로 흘러 들어갔다. 어차피 같은 돈을 쓴다면 써도 소용없는 곳보다는 쓰면 곧바로 효과가 나타나는 곳에 쓰는 것이 더 현명한 방법 아니겠는가. 단지 그녀는 현명한 인간이었을 뿐이다.

이제 현주에게 학교는 못다 한 수면을 보충하는 공간이고 친구들은 굳이 친해질 필요가 없는 존재다. 끼니는 대충 때워도 되는 것이고 다이어트는 할 필요도 없는 것이며 인중은 거리낌 없이 핥아도 되는 것이다. 

건강이 나빠져도 덩치가 불어도 인중이 빨갛게 터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친구들은 현주가 그러는 것처럼 그녀를 피하고 없는 셈 쳤고 오빠들은 공부하고 지쳐 쓰러지느라 바빴고 엄마 아빠는 장사 때문에 바빴다. 

가족과 함께 식사하는 시간이 일주일에 한 번쯤 있기는 했지만 모두가 피곤해했고 생활에 공통점이 없기 때문에 자연스레 대화도 없었다. 있다고 하더라도 엄마와 아빠의 대화, 오빠 둘의 대화가 따로 맴돌 뿐이었다. 그래도 오직 한 가지, 그녀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는 모두가 동의하고 한마음 한뜻이 되었지만 그들의 비난은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금방 한숨으로 무마되곤 했다. 

그녀는 기존의 세상에서 받는 자극은 그대로 없는 셈 쳤다. 더 이상 그곳은 현실이 아니고 현실이 아니기에 작은 스트레스도 받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어차피 현실로 돌아가면 모두가 자신을 사랑해 줬다. 현주는 그곳이 훨씬 더 좋았다.

그것이 현주에게 진정한 삶이다. 그녀가 존재하는 이유는 오로지 모니터 속 세상에 존재하기 위함이다. 게임 속에서 장사도하고 사냥도 하고 사랑도 했다. 게임 속의 스펙이 상승할수록 인맥도 많아졌고 인지도도 높아졌다. 

가족들은 그럴수록 현실 스펙은 떨어진다고, 정신 차리고 똑바로 살라고, 여자면 여자답게 다이어트도 좀 하고 사람답게 살라고, 너를 위해 하는 말이라고 구박했지만 경험이라는 게 괜히 중요하다 하겠는가. 

그녀의 과거는 이미 그 정도의 구박쯤이야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정도로 그녀를 단련시켰으니, 현주는 상처를 거의 받지 않았다.

“헤헤.” 

그냥 그렇게 웃고 넘기면 되는 일인 것이다.

현주의 학창 시절은 늘 이렇게 흘러갔다. 변화라고 할 만한 것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성장하는 그녀의 캐릭터와 덩치뿐이었고 나머지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학교에서는 꾸준히 투명 인간이고 집에서는 꾸준히 골칫덩이였다. 그녀가 인정받을 수 있는 곳은 꾸준히 모니터 속 세상뿐이고, 모니터 속 세상은 그녀의 삶에서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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