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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dd Oct 18. 2023

얻는 것과 잃는 것

생존전략 ep.9

@ 재위 씨의 삶


재위 씨는 얼마 전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닭갈비집을 차렸다. 회사에서의 문제는 전혀 없었다. 정말 잘 다니던 회사였다. 

단지 회사 생활이 재위 씨의 성격에 맞지 않았던 것뿐이다. 그럼에도 그가 20년간 버텨온 것은 어떻게든 자식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책임감.. 보다는 꼬박꼬박 챙겨주는 월급보다 더 괜찮은 돈벌이가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20년간 회사 생활을 하는 와중에도 한쪽 머리로는 다른 돈벌이에 대해 생각하고 상상으로 시도하고 상상으로 실패해 왔다. 물론 상상으로는 한계가 있는 법이니 정말 원한다면 얼른 뛰어드는 것이 옳은 방법이겠으나, 그의 생각은 상상으로도 실패하는 사업이 어떻게 실전에서 성공하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렇게 20년의 세월을 보내온 재위 씨에게 1년 전 아주 훌륭한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사실 거창할 것도 없는 게, 그날도 어머니 혜란 씨의 아나고 구이가 언제나처럼 훌륭했던 덕에 떠오른 단순한 생각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 아나고 구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어머니 혜란 씨가 몸에 좋다고 좋다고 억지로 입에 들이밀지 않는 이상 젓가락이 아나고를 향하는 일은 없었다. 그럼에도 혜란 씨의 고집은 꺾을 수 없었으니, 아들에게 어떻게든 몸에 좋은 아나고를 먹이겠다는 혜란 씨의 집념, 그 집념이 특제 소스를 만들어 낸 것이다. 

혜란 씨는 새빨간 고추장 베이스에 다진 마늘을 듬뿍 넣고 쪽파를 송송 썰어 넣고 간장에 참기름에 각종 장류를 적당히 배합하여 만든 특제 소스를 아나고에 덕지덕지 바르고 프라이팬에 호일을 한 장 깔고 맛깔나게 구워냈다. 

그렇게 새롭게 탄생한 아나고 구이는 재위 씨의 후각부터 자극해 그의 젓가락을 끌어내는 데 성공했고 결국은 그의 입맛을 사로잡는 데에도 성공했던 것이다. 

그런데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아나고 구이를 환상의 맛으로 바꿔버린 소스라면, 굳이 아나고 구이가 아니라 다른 고기에 발라도 훌륭하지 않을까? 아니 더 훌륭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거의 35년 만에 문득 든 것이다. 

시작은 이처럼 단순했다. 그의 머리는 이제 상상으로 가게를 차리고 리스크를 탐색하고 그에 맞는 해결책을 찾아냈다. 보통은 해결책이 모호한 리스크 때문에 금방 생각을 접거나 망설여지기 마련인데 이번만큼은 그런 게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면 그가 꼭 잡고 싶어 하는 아이템이라 어떻게든 해결책을 찾아낸 것일지도 모르겠으나, 그런 것들이 뭐가 그리 중요하겠는가.

사나이 김재위. 원하는 것이 있다면 이루고야 마는 남자다. 그에 대해 지불해야 하는 것이 얼마나 큰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일단 시도하고 무너지면 어쩔 수 없는 거지 뭐. 

원하는 것이 이미 생겨버린 뒤로는 시도하지 않든, 시도해서 망하든 결과는 같다. 시도하지 않으면 속에서 서서히 썩어 문드러지는 거고, 시도해서 망하면 한 방에 훅 무너져 내릴 뿐이다. 

결과적으로 이 둘은 별 다를 게 없으니, 유일한 해결책은 시도해서 성공하는 방법뿐인 것이다. 그러니 100% 망하는 쪽을 택할 바에는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는 쪽을 택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재위 씨는 1년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조용히 계획을 구상했다. 계획을 구상하는 과정에서 타인의 목소리는 보통, 근거도 없이 가능성을 따지고 실패를 점치기 마련인데, 재위 씨의 성격상 그런 말들이 신경을 건드리게 되면 생각의 방향이 이상한 곳으로 나아가기 때문이었다. 


“만약에 실패하면?”

“아니 그래도 만약이라는 게 있잖아.”

“생각대로 잘 안 풀리면 어떡해?”

“너무 위험하지 않아?”

“그게 되겠어?”

“요식업.. 힘들다던데.”

“1년에 절 반은 가게 문 닫는다던데.”

“장사는 아무나 해?”

“가족도 생각해야지.”


문제는 그런 생각을 누가 못하겠냐는 것이고, 그렇게 생각하면 도대체 무엇을 시작할 수 있냐는 것이다. 지금이야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고 자식도 있는 처지라 그렇다 치지만, 저런 말들은 사실 20대부터 무언가를 시작하려 하면 매번 들어오던 소리가 아닌가. 그렇게 결국은 안전한 급여 생활을 택하지 않았던가. 

재위 씨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는다. 이번 계획만큼은 확실히 밀고 나갈 만한 데다, 타인의 목소리는 근거도 없는 장애물이라는 사실을 오랜 경험을 통해 알기 때문이다. 1년간의 구상을 끝마친 그는 드디어 가족들에게 이 중대한 사안을 통보했다.


“여보. 현재, 현민아. 현주야. 아빠 회사 그만둔다.”

“...”

“뭐라는 거야, 이 양반이?”

자식들은 침묵했고 아내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닭갈비집 하나 차리자. 안 그래도 저기 앞에 조개구이집 나간다던데 거기로 들어가면 딱이야. 가게 이름은 국가대표 계륵. 자기 왕년에 상비군까지 갔었잖아. 맛도 국가대표 급이니까 이름도 훌륭하고 자리도 훌륭하고 맛도 훌륭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이 벌 수 있어.”

아내는 이마를 받쳤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지금?”

“응.”

“잘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우고 장사를 하겠다고?”

“응.”

...

“알아서 해, 알아서.” 아내는 질린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어차피 내 의견은 들을 생각도 없고 알아서 하실 거잖아.”

끄덕끄덕. 

재위 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통보였다. 그의 아내도 재위 씨의 성격을 오랜 시간 경험한 탓에 이미 말릴 수 없는 지경까지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이미 결정된 사항을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해 돕는 것뿐이다. 이왕 시작한다면 망해서 자식들 앞길을 지원하지 못하는 쪽보다는, 최선을 다해 돕고 남편을 믿는 쪽이 더 나았다. 

본인의 의견을 전혀 반영하지 않는 것에 대해 서운할 법도 했으나 그녀는 전적으로 남편을 지지했다. 그 꿈 많은 남편이, 하고 싶은 일은 다 하고 살아야 하는 남편이 여태껏 회사 생활을 견딘 것에 대한 보상 같은 것이었다. 그는 책임감이 있는 남자였고, 그런 남자가 택한 길이라면 지지해 줄 만했다.


국가대표 계륵은 그렇게 오픈하게 되었다. 모아둔 돈과 재위의 퇴직금으로. 재위의 아내도 탁구장을 넘기고 가게 일을 돕기로 했다. 탁구장을 넘기는 과정에서 받은 돈은 오로지 자식 지원금과 생활비로 쓰겠다는 조건을 내건 뒤였다.


“할 때 제대로 해야지.” 

할 때 제대로 해야 한다는 재위 씨의 말과는 달리 그의 닭갈비 집은 허름했다. 건물은 그렇다 치고 내부도 무슨 오픈 한 지 일주일도 안 됐으면서 인테리어는 20년은 더 돼 보이는 감성이었다. 재위 씨의 의견에 따르면 사람들은 그런 곳을 좋아한단다. 가족들이 보기엔 그냥 돈이 부족한 탓이었다. 

가게 오픈을 하루 앞두고 그의 가족들은 모두 가게로 모였다. 매일 방 안에 박혀서 게임만 하던 딸도 오늘만큼은 억지로 끌어냈다. 

그날이 재위가 처음으로 자식들에게 특제 소스를 바른 양념 닭갈비를 선보인 날이었다. 


“어? 이거? 이 양념 뭐예요?” 큰아들 놈이 분명 어디서 먹어본 맛이라는 듯, 그러나 도저히 생각이 안 난다는 듯 물었다.

“어때. 장난 아니지.”

“네. 완전. 대박이에요. 어디서 먹어봤는데.”

큰아들뿐만이 아니라 작은 아들도 탄성을 내지르며 젓가락을 들이밀었고, 하나뿐인 딸은 닭갈비를 입에 욱여넣기 바빴다. 성공이다.

“그거 할머니가 아나고 구이에 바르는 양념이잖아. 뭐 대단한 계획이라도 있나 했더니 아주 날로 먹어요.”

아내가 말했다. 

“근데 양념이 너무 자극적이야.” 

개업에 앞서 몇 안 되는 리스크 중 하나가 그것이다. 양념이 너무 자극적인 탓에 금방 질려버릴 수도 있다는 것. 그러나 재위의 꼼꼼한 머리가 그 점 하나 고려하지 않았겠는가. 양념이 질릴 위험이 있다면 질릴 수 없게 하면 그만이다. 그것은 입간판 하나만으로도 해결할 수 있는 단순한 문제였다.


비밀 양념 닭갈비. 

인당 1인분만 판매합니다.

오늘의 수량 156인분.

남은 수량: 00


재위 씨는 이미 입간판을 준비해 놓은 상태였다.

“양념이 너무 자극적이야. 처음 먹으면 ‘와 이런 닭갈비가 있나’ 하는데 3인분만 먹어도 질려서 안 넘어갈 맛이야.”

“그게 뭐? 양념이 자극적인 걸 뭐 어떡해? 그렇다고 1인분만 파는 게 말이 돼?” 아내가 말했다.

“기다려봐. 아주 줄을 서고 먹을걸. 한정 수량이라고 한정 수량. 딱 봐도 맛집 같아 보이잖아. “

재위 씨의 노력은 이상한 곳을 향했다. 그의 노력은 노력이라 칭할 수 없는, 차라리 꼼수에 가까운 것이었다. 참, 별짓을 다 한다. 그때 가족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재위 씨의 ‘별짓’은 성공적이었다. 첫날부터 가게는 사람들로 가득 찼고 그다음 날에도 다 다음 날에도 가득 찼다. 인당 1인분. 한정 수량. 사람들은 그런 것을 좋아했다. 재위 씨의 거짓말도 좋아했다.

“저희 양념구이 삼 인분만 더 주시면 안 돼요?”

“저희도 그러고 싶은데, 이게 저희 어머니가 만드시는 양념장이거든요. 하루에 만들 수 있는 양이 정해져 있어서..” 쓰읍.. 난감한 표정. “그래도 오늘 첫 손님이니까 딱 2인분만 더 드릴게요.”

“정말요? 감사합니다, 그럼 양념 2인분에 소금구이 2인분만 주세요.” 

대충 이십 후반에서 삼십 초반으로 보이는 커플이었다. 고작 닭갈비 2인분, 돈 받고 내주는 2인분이 뭐가 그리 고마운지 두 사람의 눈빛은 감동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에휴, 저희도 달라는 족족 팔아버리고 싶은데. 뭐 그리 대단한 소스라고 아들한테도 안 알려 주겠다네요. 먹고살기 참 힘들어요, 그죠?” 

그 시간 재위 씨의 어머니는 소파에 앉아 연속극을 시청하는 중이었다. 양념은 아내의 손에서 만들어졌고 그 양은 닭갈비가 다 떨어지기 전까지는 무한했다. 

재위 씨의 거짓말은 이게 끝이 아니다. 한정 수량이라던 양념갈비는 절대 바닥나지 않았고 절대 1인분만 판매하지도 않았다. 그는 그럴싸한 말을 만들어내는 데에 타고난 사람이었고 그것이 그의 성공 비결이었다.

열 번째 손님이니까, 어제도 오셨으니까, 저번 주에도 오셨으니까, 단골이시니까, 오늘은 양념이 조금 여유로워서.

하루에도 열 번째 손님이 다섯 팀은 되는 듯했고 단골손님의 기준은 ‘말 몇 번 나누고 두 번 이상 방문 시’ 인듯했다. 이런 거짓말을 할 때는 항상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무슨 큰 비밀이라도 되는 듯이.

뭐, 물론 이 또한 거짓이든 아니든 별로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손님들은 진실을 알 수 없고 진실을 알지 못하는 한, 열 번째 손님으로서의 행운을 만끽할 테니까. 손님은 손님 나름대로 좋고 재위 씨는 재위 씨 나름대로 좋은 것이다. 이렇듯 모두가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진실을 알고 있는 몇몇만 입을 다물면 그만인 것이다. 역시 평화를 위해선 침묵만큼 좋은 수단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재위 씨가 양념구이를 인당 3인분을 주는 일은 없었다. 딱 2인분까지가 한계였다. 일단 양념구이로 끌어들인 손님은 1~2인분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소금구이라도 시켜서 먹겠지만, 만약 양념구이를 3인분 이상 줘버리면 배도 부르고 금방 질려버려서 다시 양념구이를 찾는 데 까지는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 그의 이론이었고, 오픈 전부터 정해놓은 룰이었다. 

뭐 대충 이런 식이다. 방식이야 어찌 됐든 그의 가게는 동네 맛집 리스트에 올랐다. 재위 씨도 아내도 자식들도 손님들도 모두 만족했다.


그러나 가게의 성공이 꼭 좋은 결과만을 불러온 것은 아니었다. 재위 씨와 아내는 안 그래도 집에 있는 시간이 별로 없는 탓에 자식들에게 관심을 가질 시간이 부족했는데 가게를 오픈한 후로는 그럴 시간이 완전히 없어지게 된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라 할 만한 점은 큰아들이 대학에 입학해 집을 떠났고 작은 아들도 대학을 앞두고 있으니, 성인이 된 그들이 원하는 것은 부모의 관심보다는 경제적 도움이 아닐까 하고 생각할 수 있다는 점이다. 자식들이 서운하다 하더라도 “너네들 대학 등록비가 한두 푼이야? 그거 감당하려면 어쩔 수 없어. 니들이 이해 좀 해줘.”라는 변명이 준비돼있지 않던가. 그리고 그것은 변명이 아니라 사실이기도 하고.

이제 남은 문제는 하나뿐인 딸 현주인데.. 사실 현주에 대해서는 마땅한 해결책을 찾을 수 없었다. 아니 해결책이라 할 만한 것을 시도하기엔 이미 늦었다.

현주는 활발했던 어린 시절과는 달리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사춘기가 온 탓인지 말수가 줄고 방에 박혀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사실 그때야 혼자 방에 박혀 있는 것이 따로 챙겨줄 것도 없고 용돈만 쥐여주면 되니 오히려 다행이라 생각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이제는 딸도 고등학생이고 대학 준비도 해야 하는데 딸이 방에 박혀서 하는 짓이라고는 매일같이 모니터 앞에 앉아 게임에 몰두하는 일뿐이니. 가족 모두가 함께하는 식사 자리에서마저도 한마디도 하지 않으니.

게다가 어린 시절부터 가지고 있던 버릇은 아직도 고치지 못해 인중은 빨갛게 달아올라 퉁퉁 부어있고, 퉁퉁 부어오른 인중만큼이나 덩치도 얼마나 부어올랐는지. 

과연 현주의 이러한 생활습관을 고칠 수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이미 너무 커져 버린 문제에 대해 재위 씨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포기뿐이었다. 그래도 딸을 그냥 포기할 수는 없는 법이니, 자유라는 명목과 꾸준한 지원을 변명으로 포기하는 방법뿐이었다.

그도 그의 아내도 딸 현주의 습관을 모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녀의 행보를 막아서지 못한 이유는 가게 일이 바쁘기도 하고, 바쁜 가게일 만으로도 충분히 지치기도 하고, 바쁜 생활을 핑계로 많은 관심을 쏟아붓지 못한 과거에 죄책감을 가지고 있기도 했기 때문이다. 여태 방치해 놓고 이제 와서 그녀를 컨트롤하겠다는 생각 자체가 재위 씨는 불편했다. 그러니 차라리 그녀가 알아서 하게 두자, 하고 싶은 게 있다면 얼마든지 밀어줄 수 있으니까 믿고 기다려보자 하는 것이 조금이나마 본인의 잘못을 무마하는 길이었다. 

그렇게 생각해야만 지금 눈앞에 놓인 문제들이 해결된다. 쉴 틈 없이 바쁜 가게에 꾸준한 관심을 쏟을 수 있으면서, 그것이 딸을 위한 일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게 재위 씨는 여태 해오던 것처럼 가게 일에 온 정신을 몰두했고 시간은 꾸준히 흘렀다. 




*

어느덧 국가대표 계륵은 오픈 11주 년을 맞이했다. 그동안 힘든 시간이 없었다면 거짓이겠지만 다른 어떤 가게보다도 잘 버텨왔다. 그의 가게는 여전히 손님으로 붐비고 배달 오토바이 소리로 조용할 날이 없다. 이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인당 1인분만 판매한다는 전략을 포기했다는 점뿐이다. 이제는 동네에서 가게의 입지가 거의 굳어졌고 타지에서도 찾아와 먹을 만큼 입소문이 난 상태다.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지쳤기 때문에 굳이 머리 아프게 신경 쓸 거 없이 달라는 대로 내주기로 한 것이다. 게다가 모든 요식업이 배달에 뛰어들게 되면서 그의 가게도 배달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배달 같은 경우에는 인원수를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것도 큰 이유로 작용했다.

아무튼 이런 식으로 한 가지 룰을 깨버림으로써 재위 씨와 아내는 조금이나마 더 편하게 가게를 운영할 수 있었다. 


그들은 한 가지 룰을 깨버렸다. 한 가지 룰을 깨버린다는 것은 다음의 룰도 깨버리겠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하나의 패를 넘어뜨린 순간 뒤의 패가 넘어지고, 또 뒤의 패가 넘어지고, 끝내 마지막 패까지 넘어지고 마는 도미노 게임처럼, 하나의 룰을 깨버린 이상 그 연쇄 작용은 어떻게도 막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들도 다를 바 없다. 하나의 작은 변화가 다른 변화를 불러오고 또 불러오면서 그들의 가게는 점점 모습을 달리하게 되었다. 둘이서 운영하던 닭갈비 집에 어느 순간 한 명 두 명 직원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모든 업무를 직원에게 맡길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에 완전히 가게 일에서 손을 뗄 수는 없었지만, 업무의 강도와 업무의 내용만큼은 크게 바뀌었다. 

이제 닭갈비 손질은 직원이 하고 재위 씨는 가게 관리를, 아내는 직원 관리를 도맡아 한다. 남는 시간에는 낮잠도 한숨 자고 영화도 가끔 보고 식사도 나가서 하는 등 훨씬 더 편한 삶을 영위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힘들게 큰돈을 모으기보다는 여유롭게 적당한 돈을 모으는 쪽을 택한 것이다. 

이제 그들이 걱정할 것이라고는 안정적인 노후생활뿐이다. 큰아들은 좋은 회사에 취직해서 결혼까지 했다. 작은아들은 대학 내내 놀다가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투자 공부를 한다고 설치더니 이상하게 대박이 터지는 바람에 떵떵거리며 산다. 막내딸 현주는 성인이 되고 원룸을 하나 구해 본가를 떠나더니, 학창 시절 매일같이 하던 게임으로 꽤나 많은 돈을 벌어들이는 듯했다. 과거에 했던 걱정은 모두 현실이 되지 않았다. 그들의 자식들은 모두 잘 먹고 잘 살게 되었다.

그래도 아쉬운 점이 있다면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아내의 신경은 날카로워지고, 자식들의 전화는 뜸해지고, 아내는 그들의 전화를 기다린다는 것이다. 재위 씨는 사실 전화가 오든 말든 전혀 상관하지 않았지만 아내가 서운해하는 모습을 보면 괜히 본인도 씁쓸해지곤 했다.

“에휴, 자식새끼 잘 키워봐야 소용없다는 말이 이제야 이해가 되네.” 

어느 날, 하루를 끝마치고 침대에 앉아 정산을 하던 중 아내가 말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아내는 이런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다. 이제는 직원도 두고 삶이 널널해진 탓에 여러 가지 문제가 눈에 보이기 시작하는 걸까. 아니면 갱년기가 오는 걸까. 어쨌든 요즘의 아내는 한창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듯했다. 

“다들 제 앞가림하느라 바쁘겠지 뭐.”

“하..” 아내는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아니 내가 그걸 몰라요?”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좋게 좋게 생각하자는 거잖아. 안 좋은 쪽으로 생각해 봤자 자기만 안 좋은 거니까..”

“됐어요. 그딴 식으로 말할 거면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


요즘은 이런 대화가 자주 반복되곤 한다. 정말 마음 같아서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지만 그랬다가는 분명 왜 아무 대답이 없느냐, 사람이 말을 하면 돌아오는 게 있어야 하지 않느냐, 하며 다툼으로 번질 게 뻔했다. 

이런 상황 앞에선 누구나 답답하지 않겠는가. 여기서 해결책은 존재하지 않았다. 나쁘게 말하는 것도 좋게 말하는 것도 말을 하지 않는 것도 답이 아니다. 기분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는 어떤 대답도 침묵도 신경을 거슬리게 하기 마련이고, 심지어는 사과마저도 효과를 볼 수 없었다.

때로는 답이 없는 상황에 놓이기도 하는 것이 삶이지만, 재위 씨는 어떠한 답이든 일단 던져야 했다. 그것이 옳은 답이든 아니든, 일단은 최선이라 믿는 답을 던져야만 했다.

“알겠어. 미안해 여보. 내가 공감 능력이 많이 부족해.”

재위는 조금도 미안하지 않았다. 단지 사과만이 지금 상황을 해결하는 방법이라 믿었고, 최선의 선택이라 믿었을 뿐이다.

아내는 양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코를 한번 들이마시더니 숨이 파르르 떨려왔다. 끅-끅- 거리며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기도 하고 손등에 묻은 눈물을 무릎에 슥 닦기도 했다. 

“애들한테 전화라도 한 통 해볼까?”

“됐어요. 당신 말대로 앞가림하느라 바쁠 텐데 자게 둬요.”

“그래도 한 통 해보자. 아무리 바쁘더라도 키워준 부모한테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전화를 해주는 게 맞지.”

재위 씨는 휴대전화를 들었다.

“그럼 현주한테 한 통 해봐요. 다른 애들은 잘 시간이잖아요.” 아내가 울먹이며 말했다.

 “그러자 그럼. 두 놈한테는 내일 저녁에 하든지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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