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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dd Oct 18. 2023

생존전략에 예외는 없다

생존전략 ep.7

*현재


“.. 그렇다고 해서 다 그렇게 사는 건 아니야.” 

“넌 남의 감정을 아예 이해 못 하는구나.”

“핑계를 이해 못 하는 거지.”

“핑계? 불공평하지 않냐? 누구는 노력 안 해도 잘 먹고 잘 살고. 누구는 미친 듯이 노력해도 잘 먹고 잘 살까 말까 하잖아. 누구는 남의 돈 뺏어 먹고도 보란 듯이 잘 살고 누구는 돈 뜯기고도 뭐 할 수 있는 게 없네. 먼저 당한 쪽은 난데 내가 똑같이 하면 다들 왜 나 보고 뭐라 하는 거야? 정당한 게 도대체 뭔데? 그거 누가 정하는 건데? 여기는 그딴 거 없는 세상이야. 그냥 제 능력껏 잘 먹고 잘 살면 되는 곳이라고. 그래서 너도 가정사 팔아먹고 잘 살고 있잖아. 그치 않아? 어차피 비정상적인 세상이야. 비정상적인 세상에서는 정상적으로 사는 게 멍청한 짓이 되는 거고. ”

지훈은 이마를 문질렀다. 이게 대화로 해결될 일이 맞기는 한가? 아니 어쩌면 해결하려 드는 것조차 오만일지도. 그럼 ‘다르다’가 아니라 ‘틀렸다’라고 생각하는 것조차 각자의 선택으로 쳐야 하는 건가?

“네가 그랬잖아. 선이고 악이고 하는 것들은 죄다 허구라고. 우리는 그냥 각자 능력대로, 각자의 생존전략대로 살아가는 동물이라고.” 민준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 “그래. 나도 그거야.”

“그딴 식으로 해석하라고 한 말이 아니야.”

“내 선택도 네 기준에 부합해야 되니?”

....

“형은 엄마를 혐오한 게 아니었어. 그때 엄마를 찾겠다고 고래고래 소리쳤을 때, 사실은 엄마를 찾으려 한 게 아니라 돈이 필요했던 거야. 그치?”

“이제는 내 감정까지 강요하니.”

“그게 아니고서야 말이 안 되잖아. 엄마랑 똑같은 짓.. 아니 더한 짓을 하고 있는 게.”

“아니.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도대체 어떻게? 형의 머리는 도대체 어디까지 가능한 거야? 어디까지 합리화하고 어디까지 정당화할 수 있는 거야?”

“그럼 네 머리는 도대체 어디까지 오만할 수 있고 어디까지 자기중심적일 수 있는데? 각자 생존전략대로 살아간다고 말한 건 너 아니야? 그거 엄마한테 하는 소리 아니었어? 이제는 생존전략도 네 기준에 맞아야 돼? 네가 인정하는 것만 생존전략이고 인정 못 하는 것들은 싹 다 잘못된 거야?”

“그래도 이건!”

“ ‘그래도’는 없어. 네가 가정사를 팔아 돈을 버는 것처럼 나는 남들 감정을 잘 이해할 뿐이야. 생존전략에 예외는 없어.”




*옥자의 삶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것이 있다.’ ‘돈보다 중요한 게 있다.’


옥자의 집은 가난하지만 화목했다. 부모님의 말에 의하면, 오빠들의 말에 의하면, 동네 어른들의 말에 의하면 그랬다.

‘화목은 무슨. 그게 뭘 해결해 주는데?’ 옥자의 생각은 달랐다.

화목한 가정이 해결해 주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고작 책가방 하나조차도 그랬다.

“엄마, 저 가방 좀 사주면 안 돼요?”

“오빠가 쓰던 가방 있잖아. 그거 쓰면 안 되겠니?”

“그건 너무 못생겼어요.”

“옥자야, 가방은 책만 잘 들어가면 되는 거야.”

“민주는 새 가방 샀단 말이에요. 우리 집도 돈 많았으면 좋겠어요.”

“돈이 전부가 아니야. 우리처럼 화목한 가정은 돈으로도 살 수 없어요. 알겠지?”

화목이 무슨 대단한 업적이라도 되는지. 

그래 그렇다 치자. 화목은 돈으로 살 수 없다고 치자. 근데 난 그거 필요 없다고. 내가 원하는 건 죄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들이라고. 근데 돈이 없잖아. 

옥자는 불행했다. 옥자에게 화목이란, ‘행복한 척하며 불합리한 것들을 혼자 버텨내야 하는 일’이었다.

없는 와중에도 두 명의 오빠는 가끔 새 가방을 샀고 새 옷을 샀으며 대학교에 입학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랬기 때문에 가난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두 놈은 참 화목했겠다.


1994년 1월 1일 오전 6시. 옥자는 화목한 가정을 탈출했다. 거실 테이블 위에 마지막 선물을 하나 남겨두고.


-엄마 아빠께.


엄마 아빠는 매일 화목 화목, 노래를 불렀지만 전 화목을 원한 적이 없어요. 제가 원한 건 애들 다 가지고 있는 가방, 그것보다 더 비싼 가방, 비싼 옷이었어요. 제 꿈은 오렌지족이었어요. 제벌 2세요. 그래요. 제 꿈, 제가 원하던 삶은 두 분 때문에 애초에 망가져 버린 거예요. 그렇다고 원망하지는 않을게요. 대신 두 분도 저를 원망하지 마세요. 저는 제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이만 떠나려고 해요. 서랍 깊숙이 숨겨두었던 비상금은 제가 유용하게 쓸게요. 너무 억울해하지는 마세요. 딸의 삶을 위해 투자한다고 생각해 주세요. 저는 오빠들과 다르게 대학도 안 가잖아요. 그럼 안녕히 잘 지내세요.     


옥자가.


옥자는 자신의 꿈을 위해서라면 그 무엇도 신경 쓰지 않는 인간이었다. 어차피 부모님도 본인의 꿈 따위에는 조금도 신경 써주지 않았으니 죄책감은 가질 필요 없었다. 본인의 밥그릇은 본인이 챙겨야 하는 세상. 이곳은 야생이었다.


옥자는 오렌지족의 꿈을 비슷하게나마 이루기 위해 서울로 향할 생각이다. 오렌지족이 될 수 없다면 오렌지족을 소유하면 그만 이리라. 이 계획을 구상한 지 어느덧 석 달. 어느 정도의 계획은 있었다. 

아쉬운 점이라면, 부모님이 모아둔 비상금 봉투에 생각보다 훨씬 더 적은 돈이 들어있다는 것?

그래도 뭐 어쩌겠는가. 사업 자금이 부족하다 해서 시간을 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더 이상 돈 들어올 구멍이 없기도 하고. 

사업은 자본금에 따라 작게 시작하게 될 것이었다. 사업이 잘 안 풀릴 것도 고려해야 했기에 훨씬 더 작게 시작될 것이었다. 


옥자의 오렌지 사업은 고려했던 것보다 훨씬 더 흉년이었다. 투자하는 돈과 시간은 자꾸만 불어 가는 데에 비해, 옥자 주변에 꼬이는 것이라고는 죄다 낑깡뿐이었던 것이다. 오렌지만 보고 서울까지 달려왔는데 낑깡에 만족할 수는 없지.

옥자는 마음을 다잡고 언제일지 모를 꿈같은 날을 기다리며 더 노력했다. 더 이상 옷을 살 돈은 없었기 때문에 세련된 말투와 걸음걸이, 도도한 표정에 온 신경을 쏟았다.

노력하고 노력하고 더 노력하고. 그럴수록 늘어가는 것이라고는 불안과의 타협뿐이었다. 옥자는 버티고 버티다 생활마저 힘들어질 무렵, 낑깡 사업으로 업종을 변경했다. 

낑깡. 그들은 죄다 돈 쓰기에 야박한 것들이었다. 보통 싸게 후려치는 것을 좋아했는데, 특히나 옥자와의 스킨십에 있어서는 더 그랬다. 하루에도 몇 번씩 주둥이를 들이미는 꼴 하고는.. 그러면서 쥐여주는 것이라고는 꽃 몇 송이뿐이니. 이따위 쓸모없는 것을 어디에 쓰라는 건지. 차라리 그 돈을 송이송이 꽂아왔으면 조금은 봐줄 만했을 텐데. 그런다고 스킨십을 허락할 건 아니지만.

“옥자야. 사랑해.” 

가까운 거리. 느끼한 말투. 거친 숨소리. 올라오는 손. 낑깡과의 인연의 끝을 알려주는 신호였다.


“오빠, 잠깐만. 나 오빠한테 할 말 있어.”

“응? 뭔데?”

“오빠 나 사랑해?”

“그걸 말이라고 하니?”

끄덕끄덕. “그럼 더 솔직해지는 게 맞다고 생각해.”

끄덕끄덕.

“사실.. 우리 집이 조금 힘들어. 솔직히 말하자면.. 고작 돈이 뭐라고, 나 살고 싶지 않아.”

“옥자야.. 오빠가 도울 게 있을까?”

“재위 씨.. 나 도와줄 수 있어?”

“얼마든지.”

그들과의 끝은 늘 이런 식이다. 낑깡과의 이별은 새로운 낑깡을 만나기 전까지는 실직을 의미하기 때문에, 언제 끝날지 모를 공백 기간을 버텨낼 여윳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낑깡과의 끝. 그것은 오렌지와의 시작을 알리는 좋은 신호일 수도 있었다. 얼른 저를 데려가세요 오렌지 왕자님.


20대는 배우는 시기라고 했던가. 그 말은 옥자에게도 딱 맞아떨어졌다. 세상에는 용기와 패기로 할 수 있는 것이 있고 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아니, 할 수는 있는데 하면 안 되는 것이 있었다. 20대의 젊은 피는 사람을 가만히 있지 못하게 하는 경향이 있고, 보통은 세심하게 따져 보기도 전에 엉덩이부터 들썩이게 하는 탓에 실수를 저지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물론 실수는 곧 경험이요, 경험은 복기의 발 판 이요, 복기는 곧 성장이 되겠지만 문제는 항상 성장은 상황이 지나간 뒤에나 찾아온다는 것이다. 소를 잃으면 외양간을 단단히 고치기는 하겠으나, 때로는 절대 잃어서는 안 되는 소도 있는 법 아니겠는가.  옥자는 낑깡 사업에 있어 더 신중해야 했다. 

사업을 하는 데에는 입소문만큼 중요한 것이 없었다. 비록 시작은 생활고를 견디지 못한 탓이었지만, 그 후로는 낑깡과의 교제 덕에 생활이 한층 더 살 만해진 것은 사실이고, 그 안정감을 이어가고 싶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녀가 진정 오렌지를 원했다면 당장의 투자금 손실을 감수하고 배고픈 시기를 더 견뎠어야 했다.


스킨십은 피하면서 안정적인 생활을 누리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기에, 옥자가 두 마리의 토끼를 모두 잡기 위해서는 다수의 낑깡이 필요했다.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다시 만남과 헤어짐. 그 사이에 공백은 거의 없었다. 아, 이러면 되겠구나, 했다. 튼실한 오렌지가 걸려들 때까지 어느 정도 안정적인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문제는 미미했다. 가끔 거리에서 전에 만나던 낑깡을 만나면 따가운 시선을 견뎌야 하거나, 성질 더러운 놈이라면 피해 다녀야 하는 정도였다. 이 얼마나 훌륭한 삶인가. 그녀는 일찍이 삶을 꾸려나갈 노하우를 터득한 셈이다,라고 생각했다.

‘문제’라는 것은 보통 작게 시작해 점점 쌓여 간다는 것을 20대 초반의 옥자는 알지 못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압구정 거리에 옥자의 존재를 아는 낑깡이 많아질수록 옥자의 사업은 순조롭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낑깡과 너무 어울린 탓일까. 오렌지들은 옥자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제는 낑깡들 조차 그녀를 멸시하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압구정동에 출몰하는 거의 대부분이 그녀를 알게 되었다. 그러니 압구정에서의 사업은 이제 접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서울로 올라온 지 1년도 안 된 10월. 옥자는 무대를 옮겼다. 오렌지 향이 조금이라도 나는 곳이라면 어디든 괜찮았다. 이제는 지나쳐온 낑깡을 걱정할 것 없이 다시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응. 그렇지 않았다. 

압구정동 로데오에 서식하던 낑깡들이 서울 전역에 퍼졌다. 압구정으로 가는 성수대교가 무너졌기 때문이란다. 옥자가 어디를 가든 그들은 존재했다. 옥자는 초반의 계산 실수로 사업의 꿈을 자꾸만 줄여가야 했다. 몇 년간은 아르바이트도 구해야 했다. 그나마 대학 도서관에 앉아있으면 간간이 작업을 거는 남정네들 덕에 밥값은 해결할 수 있었다. 그 시기가 옥자에게는 최고로 암담한 시기이며 배움의 시기였다. 


긴 시련의 시간을 견뎌내고 어느덧 1997년. 옥자에게 다시 기회 비슷한 것이 찾아왔다. 뉴스에서는 경제가 힘들어지고 있다고 난리 쳤다. 여러 회사가 무너지고 몇몇 대기업도 파산신청을 했단다. 옥자는 뉴스에서 빛을 봤다. 위기에서 기회를 보는 눈. 옥자에게는 그것이 있었다. 사실 나라 경제가 어떻게 돌아가는가, 하는 것은 옥자와 딱히 관련이 없었다. 경제가 힘들어도 본인 밥그릇을 잘 간수하는 사람은 언제나 있기 마련이고, 밥그릇을 불리는 사람도 당연히 있는 법이었다. 기존의 판이 크게 흔들렸다. 기존의 낑깡들은 죄다 떨어져 나가고 새로운 낑깡들이 부상할 것이다. 사치에 목말라 있던 남정네들이 새로운 오렌지, 새로운 낑깡이 되어 전에 누리지 못한 사치에 정신을 잃을 것이다. 그러니 옥자는 하던 대로만 하면 될 일이었다. 

옥자는 다시 거리로 나섰다. 3년간의 긴 공백 기간 때문인지, 나라의 경제 위기로 판이 흔들린 덕인지 기존에 문제를 일으켰던 낑깡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예상대로 옥자의 사업은 다시 활발해졌다. 


그래서 옥자는 오렌지족을 만났냐고? 아니. 당연히 그렇지 않았다. 옥자는 항상 낑깡 족에서 만족해야 했다. 그때쯤 그녀도 인정해야 했다. 아, 내 삶은 낑깡이구나.

긴 공백 시간을 가진 그녀로서는 그것만으로도 활발하다, 할 수 있었다. 

그들보다 그들의 지갑을 사랑했던 옥자는 그들의 지갑이 열리는 횟수가 줄어들면 다른 지갑을 찾아 나서야 했기에 여전히 교제는 오래가지 못했다. 보통은 일주일, 길면 한 달 정도가 한계였다. 그녀는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더 신중하게 선택하고 더 교묘한 수법으로 낑깡을 소유하고 버리고를 반복했다. 

그렇게 옥자는 서울에서 5년이나 더 살아남았다. 매번 새로운 낑깡을 소유하는 불안정한 삶을 8년이나 해온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많은 남자를 만나 왔겠는가. 그러니 얼마나 많은 경험을 쌓았겠는가. 초반의 계산 실수는 옥자를 다른 방향으로 진화시켰다. 그녀의 노하우는 쌓이고 쌓였다. 그만큼 거리에 보이는 아는 얼굴도 쌓이고 쌓였다. 

이 상황은 이미 과거에도 겪은 적이 있는바, 떠나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이제는 압구정이 아니라 서울 자체를 떠나야 했다. 미련은 없었다. 불안함도 없었다. 여태 쌓아온 경험은 결코 우스운 것이 아니었다. 시련은 인간을 성장시킨다는 말, 사실이었다. 별로 원하지 않기는 했어도 사실은 사실이었다.


“오빠, 나 오빠한테 할 말 있어.”

“응? 뭔데?”

“오빠 나 사랑해?”

“그걸 말이라고 하니?”

끄덕끄덕. “그럼 더 솔직해지는 게 맞다고 생각해.”

끄덕끄덕.

“사실.. 우리 집이 조금 힘들어. 오빠도 알겠지만 모두가 다 힘든 시기였잖아.”

“그렇지..”

“빚이 조금 있어. 솔직히 말하자면 고작 돈이 뭐라고.. 나 살고 싶지 않아.”

“옥자야..”


마지막 남자에게서 받은 도움까지 총 삼천만 원. 그녀가 지방에서 자리 잡기까지 충분히 버틸 수 있는 돈이었다.

옥자는 지방에서만큼은 긴 게임을 하리라, 다짐했다. 더 이상 떠돌이 생활은 하고 싶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 만큼이나 그녀의 유전자도 수렵 채집이나 유목 시절의 기억을 잊은 지가 꽤 되었던 것이다.

게임의 룰이 바뀌었다면 당연히 전략도 바꿔야 하는 법. 옥자의 몸에 쌓인 경험들은 그녀를 변화에 능숙한 인간으로 만들었다. 제과점에 작은 일자리를 구하고 아끼던 가방 몇 개를 비싼 값에 팔아치웠다. 매번 같은 가방을 메고 다녔고 세 벌의 옷을 돌려 입었으며 화장은 연하게 했다. 말투는 항상 조심스럽게 했고 씀씀이는 남들 보는 앞에서만큼은 크게 줄였다. 지방의 몇몇 남자들. 허세의 방향이 다른 쪽으로 뻗어있는,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모으는 것 만이, 열심히 가정을 돌보고 헌신하는 것 만이 올바른 삶이고 최고의 가치라고 굳게 믿는 남자들. 아직은 21세기 자유주의, 개인주의에 물들지 않은 우직한 남자들. 그들은 자신들이 소중히 여기는 가치에 맞게 열심히 일하기를 좋아했다. 할 수만 있다면 돈 관리는 죄다 누군가에게 맡기고 싶어 했다. 그들이 자신 있어하는 주 종목은 최선을 다해 노동하는 일이지 머리 아프게 숫자나 세는 일이 아니었다. 옥자의 눈에는 단골손님의 직장동료인 용수 씨가 딱 그랬다.


“옥자 씨는 참 성실하세요. 차분하고.. 가정적이에요.” 단골손님의 주선으로 두 사람은 인연이 닿았다. 

“아니에요.” 옥자는 수줍게 미소 지어야 했다. “용수 씨도.. 멋져요. 듬직하고 책임감 있어 보여요.” 원하는 말을 들려줘야 했다. 책임감. 그것은 그들을 먹여 살리는 정수였다.

둘의 연애는 한 달 두 달 이어졌다. 두 달이라니. 옥자로서는 처음이었다. 그럴 수 있었던 데에는 용수 씨의 인내심이 크게 한몫했다. 용수 씨의 손은 서울의 낑깡들 보다 훨씬 늦게 올라왔다. 


“옥자야. 내가 꼭 해야 할 말이 있는데..”. 만남이 점점 더 진지한 방향으로 나아갈 때쯤, 용수 씨는 어색한 서울 말투로 말했다.

“응?”

“나.. 사랑해?”

어디서 많이 보던 패턴이었다.

“그걸 말이라고 해?”

“그럼 솔직하게 말할게.”

끄덕.

“나.. 기혼 남이야. 속일 생각은 없었어. 언젠간 말해야겠지, 했는데.. 말하면 우리가 거기서 끝일까 봐..”

“뭐, 뭐라고? 기혼 남이면..”

“아내는.. 몇 년 전에 떠났어. 세상을..”

그렇다면 문제 될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어떻게 그걸 이제야..” 문제 될 것이 없다고 해서 그냥 넘어가도 된다는 건 아니다. 옥자의 경험상 상대의 약점을 알게 되면 뭐라도 하나 더 얻어내야 했다. 그래, 여기서 무언가를 얻어내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대개의 경우 인간은 이기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잘못을 너그러이 이해해 주는 상대는 ‘감사한 사람’이 아니라 ‘그래도 되는 사람’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 점을 제외하고도, 서로의 약점을 이해하고 이겨 낸다면 이보다 좋은 게 뭐가 있단 말인가?

“미안.. 속일 생각은 진짜 없었는데.. 네 마음도 이해해. 네 뜻에 따를게.”

“그게 전부야? 나한테 비밀.”

“아들.. 둘..”

아들 둘. 아들 둘.. 그럼 식구가 넷.. 용수 씨의 월급으로 넷.. 그건 좀 문제가 될 것이 있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하..” 옥자는 손바닥으로 이마를 받쳤다.

“..”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용기 냈을까..”

“옥자야..?”

“아들 둘을 어떻게 혼자 키웠어.. 일하고 애들 보고. 용수 씨 삶은? 나한테 언제 말할까, 얼마나 고심했던 거야? 이제는 혼자서 힘들지 마. 나 죄책감 들게 하지 말라고.”

“미안해..”

“아니. 미안하다 하지 마. 나도 그 마음이 무슨 마음인지 아니까, 서로 미안하다는 말하지 않기로 해.” 옥자는 잠시 틈을 두고 말을 이었다. “이렇게 됐으니까 하는 말인데.. 나도 오빠한테 숨긴 거 있어.”

용수는 두 눈썹으로 대답했다.

“모두가 힘든 시기였잖아. 우리 집도 마찬가지야. 아빠는 회사에서 잘리고 모아둔 돈은 없고. 어쩌겠어. 이리저리 돈 빌릴 수 있는 곳이면 다 빌려야지..”

“돈? 얼마나..?”

“오 천.”

...

두 사람은 서로의 비밀을 공유했다. 무엇 하나 별거 아닐 수 없었던 각자의 비밀은 이제 각자의 비밀이 아니게 되었다. 함께 이겨나가야 할 문제이리라.

옥자의 머리에는 아무런 계산도 없었다. 계산은 미리미리 해 둬야 하는 것으로, 상황이 닥치기 전에 준비가 돼 있어야 했다. 온 집중을 쏟아야 하는 작업에 다른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오만인 것이다. 옥자의 경험은 그것을 가능케 했다.


옥자의 평탄해진 삶은 나름 괜찮았다. 어릴 적 엄마에게 간간이 배웠던 집안일이 부업이 되었고 소파에 누워 드라마 시청이나 쇼핑 목록을 작성하는 일이 주업이 되었다. 용수가 벌어온 돈 중 절반은 빚을 갚는다는 명목으로 옥자의 통장에 차곡차곡 쌓였고 절반은 생활비로 쓰였다. 한동안 제대로 된 쇼핑도 할 수 없었고 외식도 자주 할 수 없었지만 통장에 쌓여가는 숫자를 보면 마음만큼은 풍요로웠다.

시간이 지나서도 옥자의 가정은 저축과 외식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래도 쌓여가는 명품 가방을 보면 마음만큼은 풍요로웠다.

오천만 원이 통장에 찍혔을 때 옥자는 다른 방법으로 넘어가야 했다. 물론 방법은 이미 준비된 상태였다.

“이번이 마지막 달인가?”

“응. 드디어 다 갚았어. 고마워 여보.”

“이제 차곡차곡 모으는 일만 남았네.” 용수는 웃었다.

“차곡차곡 모아서 될 일이 아니야. 요즘은 은행 이자도 별로 안 높아요.”

“그럼?”

“재테크. 애들 대학 보내려면 지금부터 당장 시작해야 돼.”

“...”

“걱정 마요. 머리 아픈 일은 내가 다 알아서 할게.”


용수는 옥자를 신뢰했고 신뢰는 가장 훌륭한 무기였다. 옥자는 용수의 월급 중 대부분을 명품에 투자했다. 생활비는 필요하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그것은 본인이 해결할 수도 있지만 은행이 해결해 줄 수도 있는 문제였다. 이왕 해결해야 할 문제라면 남이 해결해 주는 것이 훨씬 더 좋지 않겠는가.

용수는 돈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지 못했다. 벌어오는 돈에 비해 부족한 생활을 이어갔지만 그만큼 통장에는 돈이 쌓이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미래에는 한층 여유로워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우연히 열어본 베란다에 옷장. 창고로 쓰이던 그 낡은 옷장. 거기에는 평소 용수가 욕하던 여자들이나 들고 다니던 가방이 박스 채로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

 그것은 전쟁으로 이어지기 충분한 명분이었다.

옥자는 몇 번씩이나 재테크라고, 조금 묵혀두고 팔아치우면 훨씬 더 큰돈을 받고 팔 수 있다고 설명해 봤지만 용수 씨는 이미 귀를 닫은 상태였다. 그의 머리로 생각할 수 있는 건 열심히 노동하고 저축하는 일뿐이다. 그딴 가방을 몰래 사고 있었던 여자의 말을 믿을 용수가 아니었다. 다행히도 그는 그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일을 더 원활히 해결할 만큼 현명하지도 않았다.
 

긴 냉전 사태가 이어졌다. 둘은 이제 같은 침대에서 자지 않았고 말을 섞지도 않았다. 말을 섞지 않는다는 건 좋은 것이었다. 말을 섞지 않는다는 것에 예외는 없어야 했는지, 용수는 집안일을 하지 않아도 말을 걸지 않았다. 이 얼마나 여유로운 삶인가. 더 이상 명품을 손에 넣을 수 없게 되었지만 뭐 어쩌겠는가. 일은 벌어졌고, 벌어진 일에는 후회나 걱정을 할 게 아니라 대책을 세우는 것이 더 현명한 처사였다.

통장 속 팔 천만 원. 이 돈으로 뭘 할 수 있을까. 옥자는 여태 쌓아온 경험을 토대로 방법을 탐색했다.

“...”

그래. 아무리 탐색한다 해도 답이 없는 건 없는 것이었다. 팔 천으로는 역시 성에 차지 않았다. 

이럴 때 할 수 있는 일은 딱 한 가지. 어떻게든 버티는 것이었다. 옥자의 경험이 말하길, 세상에 답이 없는 문제는 없다. 단지 답이 만들어지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릴 뿐. 세상이 내놓은 선택지는 기다림, 그것뿐이었다. 

옥자는 버텨야 했다. 이혼?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세상은 영리하다. 언제 어떤 시기에 당근을 줘야 할지 잘 아는 놈이다. 굶주리고 불안에 잠들 수 없을 때. 최악의 상황에 울부짖을 때 당근 하나를 툭. 그것이 세상이 인간을 다루는 방법이다.

용수의 병세가 깊어갈수록 옥자의 걱정도 늘어갔다. 어쩌면 기다리는 것 만이 답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도 스멀스멀 올라왔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용수가 입원을 하게 되면 돈은 누가 벌어오지? 당장 떠나야 하는 걸까. 당장 떠나면 어디로 가야 하지? 가서는 뭐 하지? 이제는 오렌지는 고사하고 낑깡조차도 어떻게 하지 못할 텐데. 아니 요즘도 그런 애들이 있긴 하나? 하긴. 있다 해도 이제는 나이를 너무 많이 먹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여유는 사라지고 불안은 막막한 현실이 되었다. 이제는 낭떠러지 끝에까지 몰렸다. 아니 끝에까지 몰린 게 문제가 아니라 당장 뛰어내려야 할 판이었다.


용수가 119 들것에 실려 가던 그날. 옥자는 집을 빠져나왔다. 최대한 간단하게 챙겨야 할 것만 챙겨 나왔다. 그중에 명품 가방은 당연히 포함되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지, 어떻게 될지는 모른다. 그러나 지금 떠나야 한다는 것만은 알고 있다. 살기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 했다. 그래도 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함께 해온 두 아이와 남편. 죄책감이 없다고 한다면 거짓이겠지. 수많은 낑깡 들과 했던 이별과는 당연히 달랐다. 옥자도 마음 한구석이 아렸다. 혼자 구멍 사이로 빠져나온다는 것이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떠나야 했다. 살기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 했다. 

너희들이 이해해. 나 원래 이기적이잖아. 살기 위해서 그랬어. 악의는 없었다고. 각자 살길은 알아서 해결하자고. 


용수의 보험비와 국민연금 수혜자가 옥자 본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시간이 일주일 정도 지난 후의 일이었다. 


-전화를 받지 않아 문자로 남깁니다. 용수와의 마지막이 그리 좋지 않다는 말을 전해 들었습니다.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지만 최대한 이해하려 노력하는 중이고, 저희의 그런 노력이 옥자 씨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이미 용수는 세상을 떠났고 일은 벌어졌어요. 탓한다고 해서 아무런 도움도 안 되는 거 알고 있습니다. 탓하려고 이렇게 연락을 취하는 게 아닙니다. 옥자 씨와 마찬가지로 저희도 이렇게 연락을 하고 싶지 않아요. 

길게 끌 거 없이 딱 한 가지만 부탁하겠습니다. 용수 보험비, 국민연금 수혜자를 두 아이 놈들로 바꿔줬으면 합니다. 민준이 지훈이는 이제 어떤 도움도 없이 살아가야 합니다. 두 놈들과 함께한 시간이 짧지 않잖아요. 어미 된 도리로서 당연히 그렇게 해주실 거라 믿습니다. 옥자 씨도 인간이라면. 당연히 그렇게 할 거라고 믿습니다.


사람들은 꽤나 자주 착각을 하곤 한다. 

진심을 담아 말하면 그것이 이뤄질 거라는 착각. 

감정에 호소하면 상대가 뜻에 따라줄 거라는 착각. 

‘인간이라면’ 또는 ‘당연히’라는 말을 섞어가며 당연한 도리인 양 말하면 상대가 그 점을 고려할 거라는 착각. 

인간이라면 당연히 이성적으로 생각할 거라는 착각.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 진심을 담아 말한다고 해도 그 말을 들을지 말지는 상대가 선택하는 것이고, 감정에 호소한다고 해서 ‘음, 정말 힘들겠다’ 하고 뜻을 따라주지는 않으며, 당연한 도리인 듯 은근히 말해도 상대로서는 은근한 불쾌감만 느낄 뿐이다. 그리고 인간이라면 당연히 이성적으로 생각할 거라는 착각. 이것은 아주 큰 착각인데, 그 상대에게는 본인의 생각이 훨씬 더 이성적인 생각이기 때문이다.

옥자는 문자를 지워버렸다. 그녀가 그들의 뜻에 따라줄 수 있는 일은 단 한 가지. ‘옥자 씨와 마찬가지로 저희도 이렇게 연락을 하고 싶지 않아요.’ 그 부분뿐이었다.

그 후 옥자는 해야 할 일을 했다. 보험사를 방문하고 국민연금관리공단을 찾았다.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 뜻을 이루기 위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각자 다양한 능력을 발전시킨다. 옥자가 생각하기에 본인의 행동은 남들과 그리 다를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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