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만 1,975일째 #5
D-1,960
이번 주 신입 환영 회식 메뉴는 뭘로 할까?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월요일 아침 조회 시간, 드디어 팀장이 신입사원 환영 회식 관련한 얘기를 하고 있다. 일단 회식 날짜는 업무에 지장을 주지 않는 금요일 저녁이며, 메뉴는 퇴근하기 전에 투표로 정한다고 한다. 그런데, 팀장이 한 마디를 남기고 회의실을 떠났다.
팀장 : 그런데, 나는 참치회가 좀 당긴다?
팀원들 : …………
이것이 말로만 들었던 '답정너' 투표란 말인가? 맞다, 팀장이 나가자 과장급 한 명이 한 마디를 거든다. 홍반장이 참치가 먹고 싶다니까 그냥 삼겹살, 한우 맛집 대충 유명한 곳 찾아서 List-up 하고 다 참치회 찍으면 된다면서 말이다. 만약에 팀장이 참치를 먹고 싶다는데, 다른 의견을 강력하게 얘기한다면 어떻게 될까? 나중에 물어보지 않아도 선배 사원이 알려줬다. 회식 당일 식사 때부터 최소 일주일은 자기 의견에 반기를 들었단 이유로 쉴 새 없이 갈굼을 당할 것이라고. 그래서 팀장이 참치를 얘기하고 나갔을 때, 사람들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고 과장급 한 명이 저런 이야기를 꺼냈던 것이다. 그렇다, 회식은 업무의 연장선이다. 거기에 업무에 지장을 주지 않는 금요일 밤에 회식을 하자니 다들 분위기가 싸할 수밖에 없었다.
치열했던 팀 회식 사전 준비 절차
그리고 소주 원샷의 필요성
회식의 의미란 무엇일까? 팀원 간의 단합과 소통을 위한 한 끼 식사 시간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이는 명목적인 이유일 뿐이었고, 내가 느끼기엔 팀장의 권위를 확인하기 위한 '팀원 군기 잡기 교육 시간'이었다. 그래서 그만큼 팀 회식 사전 준비 절차도 철저했다. 그것은 아래와 같다.
① 참치회 잘하는 가게 세 군데를 추려서 추천한다. (이미 홍반장이 가고 싶은 곳은 정해져 있다.)
→ 오락부장처럼 팀 행사를 담당하는 직원이 있는데, 이미 답정너라도 추려서 보고하지 않은 경우에는 뼈다귀가 가루가 되도록 언어로써 멘탈이 털리게 된다.
② 회식 목적에 맞는 자리 배치 (배치받을 가게 자리, 사전 답사 必)
→ 자리 배치도가 절대로 팀장에게 유출되어서는 안 된다. 본인이 그렇게 만들어 놓고, 이런 거 걸리면 자기를 팀원들이 인간쓰레기 만든다면서 팀원 탓을 하며 상상을 초월하는 후폭풍 예상
③ 회식 장소 근방 2차/3차, 이용 가능 노래방까지 List-up
→ 보통 저녁 7시에 시작하여 빠르면 새벽 1시, 늦으면 새벽 3시경 해산
④ 회식 시, 팀장의 예상 공통/개인 질문과 모범 답안에 대한 학습
일단 회식을 하는 이유가 '신입사원 환영' 회식이었기 때문에 나는 홍반장 맞은편 좌석에 배치됐고, 동기 여사원 바로 옆에 배치됐다. 그리고 선배 사원이 한 가지 조언을 해준다. 회식 자리에서 본인이 갑(甲)의 위치에 있기 때문에 팀장은 소주 반잔을 마신다. 하지만, 같은 테이블에 있는 팀원은 무조건 소주 '원샷'을 해야만 한다. 이유가 뭐냐고? 그냥 자기 마음이다. 원샷을 하지 않고 뺀다면, 나중에 결재할 때 복수를 한다고. 이는 회식 자리에서 팀장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 중에 하나인데, 결재판을 가지고 가면 생트집을 잡아서 그 자리에서 멘탈이 나갈 정도로 갈구고 결재는 반려를 시킨다고. 결재를 못 받아서 업무 적시성을 놓친다면? 그것은 결재를 못 받은 팀원의 탓이다. 아무튼 나는 신입이라 크게 결재를 받을만한 것은 없었지만, 그냥 일단은 잘 보여야겠다는 생각과 첫 회식이란 상징성 때문에 엄청나게 부담이 됐다.
D-1,956
회식 시작, 참치를 맛있게 먹는 방법
한주를 마무리하는 금요일 오후 5시 30분, 영업팀 사무실 분위기가 분주하다. 퇴근? 아니 업무의 연장인 회식을 무려 금요일에 하러 가야 하니까. 나가는 것에도 순서가 있다. 사원·대리부터 짬의 역순으로 나가야 한다. 다만, 하나의 원칙은 동일하다. 팀장보다 늦으면 그날의 회식 분위기는 초상집이라는 사실. 아무튼 다들 별 탈 없이 팀장보다 먼저 도착하여 미리 배치한 자리대로 적절하게 직급별로 자리를 분배하여 앉았다. 팀장은 사원·대리가 착석하고 대략 20분 정도 뒤에 도착을 했다. 그가 메뉴를 고르고, 소리 없는 늑대 한 마리와 어린양들의 눈치게임이 시작됐다.
그리고 테이블에 나온 먹음직스러운 참치회. 그에게 첫 잔을 따르고 역시나 그는 반잔을 마시고 나는 소주 원샷을 했다. 그리고 아는 것은 많이 없지만, 아는 척하기 좋아하는 그가 참치회에 대하여 일장 연설을 시작한다.
팀장 : 이봐, 신입. 윗동네에서 내려왔는데 참치회 먹을 줄은 아나? 진짜 좋은 참치는 말이야 간장에 찍어먹으면 안 되는 거야. 생와사비만 듬뿍 올려서 먹으면 좋은 참치는 와사비 맛이 전혀 나지 않게 되지. 어디 한번 먹어보게나.
어린양 이었던 나는 그가 시키는 대로 와사비만을 듬뿍 얹어서 먹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무식하게 참치회를 먹어본 것도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는데, 이것을 먹고서 정답을 말해야 한다. "와, 정말 와사비 맛이 하나도 안 나요!"라면서 말이다. 그렇지만, 나는 정답을 얘기할 수가 없었다. 너무 생와사비 맛이 강해서 아무리 참고 또 참고 참아봐도 나도 모르게 너무 매워서 눈물이 눈가에 고이고 있었다. 아...... 큰일 났다, 처음부터 꼬이기 시작했다. 정말 정답을 얘기하고 싶은데, 도저히 말이 안 나와서 아무 말도 못 하고 그가 재판관처럼 나의 행동을 판단해주기만을 기다렸다. 한숨을 푹 쉬더니 소주잔을 들어 올렸다. 시작부터 쉽지가 않다, 하지만 이런 나의 Mistake도 동기 여사원의 한마디에 다행히 묻혀 버린다.
팀장 : 집에서 회식한다고 일찍 들어오라고 하지 않던가?
동기(여사원) : 네, 주는 대로 다 받아먹지 말고 늦지 않게 집으로 들어오래요. ^^
너무나 순진무구하고 해맑은 그녀의 발언에 순식간에 회식 분위기가 싸해졌다. 오늘 쉽진 않겠구나, 도대체 회식은 언제 끝나는 거야? 정말 '가시방석'이란 단어를 제대로 체험하고 있다. 2차에 가서 자리라도 바뀌어야 조금 숨통이 트일 것만 같았다. 내 인생에서 가장 길었던 만겁의 시간과 같았던 첫 회식, 아직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