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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들의 욕망, 농부 vs 서울대

무엇에 부끄러워해야 하는지.

by 다정한 시옷

매달 세 권의 책을 보내는 구독 서비스를 하며 현미 씨를 알게 되었다. 벌써 5년째, 여전히 나를 믿고 내가 보내는 책을 기다리는 그녀는 내게 특별한 사람이다.
구독 엽서로 다 못한 이야기는 종종 카톡으로 이어졌고, 길지 않은 대화에서 나와 결이 비슷한 사람이구나 싶었다.
그러다 지난 주말, 처음으로 비대면 관계를 청산하고 밥을 먹고 커피를 마셨다.
우리는 아이를 셋 키우며 교육에 관심이 많.

이 놈의 세상이 어찌 되려나 걱정한다는 공통점도 있어서 처음 만났지만 할 얘기가 차고 넘쳤다. 오히려 사사로운 관계에서 어색할 질문들을 서슴없이 할 수 있어 좋았다. 예컨대 이런 것.


"현미 씨는 아이들이 커서 어떤 사람이 되면 좋겠어요?"(무슨 인터뷰하니?)


"농부요."


생각이 열려 있고 깨어있는 농부가 되면 좋겠다고도 덧붙였다.

보통의 엄마 사람들에게 듣기 힘든 대답이었다.

확실히, 그녀는 보통이 아니다.
카페에서는 일회용 티슈 대신 손수건을 꺼내 쓰고, 혼자 먹는 끼니는 채식을 지향한다. 아이 셋을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기관에 맡기지 않고 함께 지냈다. ‘홈스쿨’이라는 이름이 어울리지 않는 이유는, 학습에 초점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국이 어지러울 땐 아이 손을 잡고 집회에 나가기도 했고, 아이도 엄마도 책을 가까이하며 자주 도서관과 서점을 찾았으니 그냥 ‘함께 살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잠깐만 떠올려봐도 정말 보통 아닌 사람,

보통 대신 소신을 선택한 사람.


현미 씨는 요즘 세상에 보통이 아닌 삶을 살면서 겪는 어려움, 외로움, 허탈함을 이어서 들려주었다. 아이들 교육과 관련해 특히 그러하다고.

짐작이 갔다.
‘유치원도 안 보내고 애가 책을 읽는다니, 뭔가 집에서 시키는 게 있겠지.’
‘정보 주기 싫어서 아무것도 안 한척하는 것 같은데?’
가끔은, '농부라는 그 꿈이야말로 엄마의 욕심이 아니냐'는 지적까지 더해진다.

세상은 그녀의 진심을 쉽게 오해하거나 유별나다고 말해,

현미 씨 마음이 움츠러든다고 했다.


사람들은 반만 안다.

현미 씨는 욕심 많은 사람이 맞다.
성취의 기준을 보통과 다르게 바라볼 뿐, 그녀 역시 욕심 많은 양육자다.

그러나 내가 자꾸만 곱씹게 되는 건 그녀의 삶과 육아 방식 그 자체가 아니라, 리가 이야기 나누는 방식이자 누군가의 진심과 신을 받아들이는 문화다.

이쯤에서 내 얘기를 꺼내자면,
나는 글을 쓸 때 고상한 척을 하기도 하지만, 현실에서 아주 보통의 욕심 많은 엄마다.
“서울대 가야죠. 작은 소망이 있다면, 우리 아들이 최상위권 성적으로 학원에 스카우트되어 동생까지 1+1으로 가는 거예요.”
사람들 앞에서 이런 말을 웃으며 한다.
뒤에서 뭐라고 하든, 모두들 앞에서는 하하 호호 웃는다.
그런 나의 상황을 현미 씨의 옆에 놓고 보니 조금 이상하고, 또 부끄러웠다.
서울대를 향한 욕망은 쉽게 공감받고 웃으며 받아들이데,
농부를 향한 꿈은 낯설고 때론 시샘받는다.
세속적인 욕망은 어디서나 통하지만, 가치를 담은 진심은 폄하되거나 왜곡된다.
자신의 욕망에 부끄러울 필요는 없지만, 타인의 진심을 오해하고 왜곡하는 일에는 부끄러움이 있어야 한다.

나와 다름, 특히 그 다름이 엄마들의 삶과 육아일 때, 아이들이 다양한 삶을 상상할 수 있다.

그래서 그럴까,
아주 보통의 욕망 속에 사는 나로서는, 현미 씨와 같은 사람들에게 약간 빚을 진 듯한 기분이다.

현미 씨의 삶과 육아는 그 자체로 충분히 귀하다. 더 이상 '다름'으로 인식되지 않을 만큼, 도처에 있을 귀한 삶들이 흔한 이야기가 되면 좋겠다.

이야기를 읽고 들을 더 많은 눈과 귀 역시 필요하다.


그래서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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