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정확히, 아이 친구 때문에 내가 울 때
최근에 열두살이의 친구들이 무리에 끼워주지 않은 사건이 있었다. 왕따라 할 만큼의 큰일은 아닌데 엄마로서 소소하게 신경이 쓰였다.
열두살이는 같은 아파트에 사는 H와 자주 노는 편이다. 1학년 이후로 내내 다른 반에 배정되었지만 야구를 좋아한다는 공통점이 있어서 5학년이 된 지금까지도 서로에게 야구 친구가 되어주곤 했다.
그러다 지지난주 일요일, H가 자기 반 친구들과 야구를 하고 있었다. 끼워달라는 열두살이의 말에 안된다고 딱 잘라 거절을 했다. 그 사실을 전해 듣고 내가 열두살이에게 물었다.
"왜 안 끼워준대?"
"몰라?"
열두살이는 모르는 사실을, 배우자는 이렇게 짐작했다.
"야구 좀 할 줄 안다고 지 맘대로 하려 하니까 그렇겠지. 안 봐도 훤해."
설마 그 이유겠느냐고, 선뜻 반박하지 못한 나 역시 비슷한 생각이었다.
열두살이는 친구들이 끼워주지 않아 몹시 아쉬워했고, 조금 무안해 하기도 했지만, 크게 마음에 두는 것 같진 않았다.
아무래도 아쉽고 무안하고 궁금한 건 나다.
일주일 뒤, H와 벤치에 나란히 앉을 기회가 생겨서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왜 우리 아들이랑 안 놀아줬냐고. 문장으로 쓰고 보니 따지는 것 같지만 네버, 네버~
"○○가 마음대로 한다고 애들이 같이 놀지 말래요."
역시. 짐작한 이유가 맞다.
"그랬구나. 그래도 다른 친구들 없을 땐 ○○이랑도 놀아줄래?" 하고 말하는 수밖에.
또 지난주 일요일 오전에 엘리베이터에서 커다란 야구가방을 메고 학교 운동장에 가는 아이를 봤다.
반은 다르지만 같은 학년인 그 아이에게 차마
'왜 우리 아들과 함께 야구하지 않니?'라고 물어볼 수가 없었다.
나중에 열두살에게 물어보니, '나랑 안 맞다'라고 했다.
안 맞는 것은 성향도 있지만 야구 수준도 포함됐다.
누가 들으면 프로선순 줄 알겠다... 그리고 만날 야구 같이 하고 놀 친구 없다면서 이것저것 가릴 처지냐고?!
열두살이는 학원을 안 다니니 친구들과 생활 리듬이 맞지 않다. 학원을 오가며 같이 간식을 사 먹기도 하는, 그런 친구가 없다.
놀 땐 야구만 하고 놀려하니 연락할 친구의 범위가 또 줄어든다. 놀이의 규칙과 방식에 융통성이 부족한 성격이 관계에 불편함을 주기도 할 것이다.
친구가 많아야만 사회성 좋은 사람인 건 아니지만,
놀고 싶을 때 친구가 없어서 못 놀고 있는 꼴을 보고 있노라면, 늘 안타깝다.
오뚝이샘의 책은 육아에 문제가 있다고 느낄 때, 보편성과 고유성의 개념으로 접근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보편적으로 지켜야 할 규범이나 질서는 따를 수 있도록 하되, 아이의 고유한 성격은 존중해서 유연성을 넓혀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니 열두살이는 친구들이 말하는 야구의 룰을 따지고 고칠 게 아니라, 인정하고 따를 수 있어야 한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는 융통성 발휘의 경험이 필요하다.
다만 룰이 정당하지 않다면, 아이의 성격에 재미있게 놀기 힘들 테니 '시도'는 권유하지만 결정은 존중해야 한다.
'나랑 안 맞는' 친구와 놀이는 같이 하지 않더라도, 교실에서 갈등 없이 일상을 할 수 있을 정도라면 괜찮다. 한 걸음 더 나가서, 나랑 안 맞는 친구가 모둠 활동에서 소외되어 있을 때 챙길 수 있을 정도라면 베스트 오브 베스트인데,
일단 지금은 친구들과의 놀이에 있어서 너무 제 고집대로 하는 것은 아닌지 살펴볼 일이다.
그러다 지난 일요일에는 또 이런 일이 있었다.
(항상 일은 주말에 생긴다.)
친구와 둘이 캐치볼을 하는데, 한 학년 아래의 여자 동생이 와서 같이 하고 싶다고 했다. 싫다고 말 못 하고 어영부영 대답을 회피한 채, 하던 캐치볼을 계속 한 모양.
그날 저녁 열두살이가 물었다.
"엄마. 내가 그 친구한테 '오늘은 우리끼리 하고 싶어'라고 말하면 좀 그런가?"
"친구들이 전에 너 야구 안 끼워줄 때, 그냥 안된다는 말 대신에 그렇게 이유를 들었다면 어땠을 것 같아?"
"음.. 이해했을 것 같아."
"그치? 좀 서운해도, 적어도 답답하진 않았겠지?"
"응."
나라면 잠시 마음 불편하고 잊었을 일을,
나름의 해결방식을 찾아가는 게 놀랍고 대견했다.
'오늘은 엄마 조용히 책을 좀 읽고 싶어'의 변형인가??
(좋은 건 다 나 닮음)
무리에서 소외되는 일이 전혀 큰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열두살이는 이미 아는 듯하다.
그리고 나는 이제야 겨우 깨달았다.
친구가 많고 적고, 놀고 안 놀고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선택을 스스로 존중하고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게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사실 나라고 친구가 많은 것도 아니면서, (사람들이 나 빼고 놀고 있을지도 몰라!) 아들내미는 모든 친구들이 좋아하는 인싸가 되기를 바랐다고,
'아이의 친구 때문에 울 뻔했던' 이야기를 고백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