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모임의 마지막 주제는 '자유'였다.
호스트인 내가 회차마다 제공한 키워드로 일상을 그물질한 사람들이 자유롭게 쓴 글은 어떨지 궁금했다.
그 중 '수집가'라는 필명을 쓰는 분의 글로 합평했던 기록을 남겨본다. 나도 인상적으로 보았던 <그린북> 이란 영화를 감상하고 쓴 글이었다. <그린북>은 흑인 피아니스트 셜리와 운전을 비롯한 매니저 역할을 담당한 토니가 인종에 대한 편견을 넘어서서 우정과 인간애를 보여주는 영화다. 수집가님의 글은 영화의 시대적 배경과 인물에 대한 소개, 줄거리를 언급한 다음 영화의 메시지를 자기 삶으로 가져와 성찰하는, 구조가 탄탄한 글이었다. 또한 전체적으로 담담하고 진솔한 문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부분이 빠져 있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그게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했다.
영화를 함께 본 딸이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이 뭐야?”라고 물었을 때, 나는 마지막 장면을 떠올렸다. 늘 고독 속에서 스스로를 더 깊은 외로움으로 몰아넣던 셜리가, 토니의 식사 초대에 용기를 내어 크리스마스 날 그의 집을 방문하는 순간이었다. 토니의 아내가 따뜻한 포옹으로 그를 맞이하며, “편지 쓰는 걸 도와줘서 고마워요”라고 속삭이는 장면은 감동의 정점을 찍었다.
두 사람이 진짜 우정을 나누며 관객에게 감동을 선사하기까지 고비 고비 등장했던 갈등이 언급되지 않았음을 마침내 발견했다.
감동을 얻는 건 마음을 열고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무엇 때문에 인물들이 대립하게 되었는지, 어떻게 그것을 풀어나가는지 주목하는 일이다.
그래야 하는 이유는 바로 감동보다 불편한 순간이 우리의 삶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우리가 감동을 소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생의 진실을 발견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나는 글쓴이가 중간 장면을 생략하고 결말로 점프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혹시 불편한 장면을 오래 생각하기엔 마음이 무거우신가요?
내가 그러하다.
불편한 장면을 오래 들여다보며 붙들고 싶지 않다. 모든 시련이 끝난 뒤 찾아오는 해피엔딩만 기억하고 싶다.
연주회의 주인공인 셜리가 흑인이라는 말도 안되는 이유로 실내의 화장실을 이용하지 못하고 건물 밖의 화장실을 가야 할 때, 목적지로 가다 잠시 멈춰 선 길에서 타는 볕 아래 들일을 하는 흑인 노예를 셜리가 바라볼 때 등, 관객으로서 굉장히 불편했던 장면이 여러 번 있었다.
'인종 차별'을 활자만으로 접하는 것과 영화 속 인물에 감정을 이입하며 체감하는 것은 차원이 달랐는데, 영화 속에서 토니가 셜리를 가장 이해할 수 없어 한 장면 중 하나도 '화장실'에피소드였다.
연주자로 초대받은 셜리, 흑인이라는 이유로 건물 밖의 허름한 화장실을 쓰라는 말을 듣는다. 도저히 그럴 수 없었던 셜리는 왕복 40분인 숙소의 화장실을 이용하기 위해 다녀온다. 연주회는 약간 미뤄졌지만, 셜리는 연주회에 모인 백인들에게 여전히 웃고 예의가 바르다.
토니는 무례한 대접을 받고도 예의를 차리는 셜리를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인종차별이 심한 남부에서 그린북에 의지해 굳이 투어 공연을 하려고 한 건 셜리의 의지였다는 말을 누군가로부터 듣게 된다. (그린북:흑인이 머무를 수 있는 숙소 안내서) 흑인으로서 받는 차별에 평화적으로 저항하며 품위를 지키고 싶어한 셜리다.
이후 이어지는 서사에서도 셜리는 흑인이지만 흑인에도, 백인에도 속할 수 없는 정체성으로 외로워하는데, 토니는 그러한 셜리를 조금씩 더 이해하게 된다.
쓰려던 것은 영화 이야기가 아니었는데 어쩔 수 없이 길어진다. 워낙 재미와 감동이 깊은 영화이기도 해서지만,
우리가 머물러야 할 순간은 인종 차별이 행해지는 장면임이 분명해진다.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장면, 그 속에 서 있는 한 사람의 내면에 초점을 맞추고 그가 느낀 고통, 실의, 무력함, 분노와 같은 감정에 공감할 때 '어떤 이유에서든 차별은 나쁜 것이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 수준의 교훈적 감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래서 영화가 끝나고 우리가 남길 수 있는 것은, 그렇게 한 사람을 (조금은) 이해하는 것이다.
그것만으로 세상을 바꾸지는 못 하지만,
나의 고정적 사고에 균열을 내고 행동을 달리 할 수 있다.
합평을 하며 나의 의견이 글에 대한 지적으로 오해될까 봐 굉장히 말을 조심했었다. 단어를 신중하게 고르느라 말의 속도도 꽤 느렸는데 전하고자 한 바가 얼마나 어떻게 전달되었는지 확신할 수 없다.
한 가지, '우리가 영화나 문학을 감상할 때 불편해지는 바로 그 지점이, 문학을 읽거나 영화를 볼 때 작가가 주고자 했던 메시지라고 생각해요'라고 말했던 문장만큼은 기억할 수 있다.
나도 잘 하지 못하지만 그래서 더 강조하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불편한 감정을 피하지 않고 응시하는 일이야말로, 문학을 읽고 쓰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용기 있는 작업이 아닐까. 혼자서는 어렵지만, 함께라면 그 불편함을 나눌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우리, 계속 쓰자. 더 느리고, 더 깊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