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들과 함께 『너의 유토피아』를 읽고, 작가 정보라 선생님을 만나는 기회를 가졌다. 우리는 작가님께 꼭 묻고 싶은 질문이 있었다. 소설 속 휴머노이드 로봇의 이름이 왜 하필 ‘314’인지.
책 뒤에 실린 초판 작가의 말에 따르면, 작가는 숫자를 허투루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한국 사회에서 벌어진 참사의 날짜, 희생자 수, 고공 농성을 시작한 이들의 이름과 날짜까지도 정확히 기억하고 기록해 두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314’에도 분명한 의미가 있을 거라 확신했다. 하지만 작가는 “314에는 특별한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조금 허무했지만, 실망스럽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것이 소설을 진심으로 읽은 독자만이 누릴 수 있는 또 다른 재미였다. 처음부터 의미가 중요했던 건 아니다. 그래서 답을 들었을 때, "의미가 없다는데!"라는 앎과 공유, 그것만으로도 즐거웠다. 품었던 질문에 대한 답변을 들었으니 우리는 또다른 질문으로 나아가면 그만이다.
이야기를 전해 들은 배우자는 “근데 그게 왜 궁금하지?” 하고 웃으며 되물었다. 그 웃음엔 단순한 의아함 이상의 것이 담겨 있었다. 소설의 사소한 설정에도 마음을 쓰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대한 놀라움, 그리고 그런 질문을 품는 사람들에 대한 존중이 느껴졌다. 12년을 함께 살아온 세월이 주는 알아챔이다.
질문은 꼭 답이 필요할 때만 던지는 것이 아니다. 때로 질문은 허구를 바탕으로 한 소설 속 인물들에게조차 의미를 부여하고,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단서를 준다.
소설은 작가가 쌓아올린 하나의 세계다. 어떤 메시지는 소설로 형상화될 때 더 생생히 전달된다. 배경이나 인물, 사건은 실재하지 않아도, 그 속에서 우리는 질문을 던지고 나름의 메시지를 찾는다. 그리고 타인의 해석 속에서 자신이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소설 속 문장을 찾아 나설 때, 독자는 다시 그 소설 속으로 깊이 들어간다. 그 경험은 짜릿하다.
나는 소설 속 작은 설정 하나에도 자꾸만 궁금해하는 우리의 태도가 현실에서 타인을 대하는 태도와 닿아 있다고 믿는다. 마치 동물을 좋아하는 사람 중 나쁜 사람이 없다는 말처럼,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 역시 타인을 향한 상상력과 이해의 마음을 품고 있다고 생각한다.
소설 속 삶이 현실에 실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무시할 수 없다. 오히려 어떤 허구는 실제보다 더 현실적이다. 현실과 경계를 나누지 말고, 낯선 삶을 향해 상상력으로 다가가야 한다. 그건 내가 경험하지 못한 타인의 삶을 해석해보려는 시도이며, 결국엔 나 자신의 삶을 이해하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질문을 품고 소설을 읽는 일은, 결국 타인을 대하는 태도와 맞닿아 있다. 내가 소설을 잘 읽는 사람이 좋은 사람일 수 있다고 믿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소설 읽기는 그런 ‘태도’의 훈련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이해되지 않는 행동이라도, 질문을 품고 읽어나가는 사람은 결국 더 깊은 감각으로 타인을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질문을 품고 소설을 잘 읽는 사람이 결국 더 좋은 사람일 수 있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