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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명예퇴직 3년차 이다.

“선배님, 오랜만에 라운딩 한번 가시죠.”

by 이쁜이 아빠

“뉴스에서 장마는 시작도 되기 전에 끝났다고 했는데…”
올여름, 전국을 휘젓는 집중호우는
여름 골프 계획조차 한낱 꿈처럼 만들었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
오랜만에 후배 지점장에게 연락이 왔다.

“선배님, 오랜만에 라운딩 한번 가시죠.”


그 말 한마디에 마음이 끌렸다.
요즘 나는 동생 일을 도우며 더위 속을 살아가고 있었다.
페인트칠하고 짐 나르며 땀이 온몸을 적시는 날들.
그래도 이런 자리를 만들어준 후배가
참 고마웠다.

오전 9시 티업.
라운딩이 시작되자
공을 따라 뛰던 젊은 시절 기억이 떠올랐고
잔디 위를 걷는 발걸음은
시간마저 잊게 만들었다.


물론 퇴사 후 학교친구들.. 또는 주위사람들과도 자주 골프 라운딩은 했다.

하지만 오늘 라운딩은 약간 다른 기분이 들었다.


나는 명예퇴직 3년차이다.


전반 9홀을 돌며
‘아직도 나를 기억해 주는 후배가 있구나’
그 사실이 괜스레 뿌듯했다.

경기 후, 나는 먼저 말했다.

“점심은 내가 살게.
이런 자리를 만들어줘서 고맙다.
그래야 다음에도 또 부르지 않겠어?”

하지만 식당에서
계산은 이미 후배가 끝내놓고 있었다.

“선배님, 오늘은 제가 대접하고 싶었습니다.”

그 한마디에 멋쩍어졌다.
괜히 어른 흉내 내고 싶었던 마음은
쑥스러움 속에 묻혔다.

돌아오는 길,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커피 한잔 하고갑시다.
커피값은 내가...ㅋㅋㅋㅋ

점심값은 못 샀지만,
그 커피 한 잔엔 선배의 마음을 담았다.

쓴맛보다는 진한 향이 오래가는 커피
이 더위를 조금이나마 날려 보낼 수 있는 아이스 아메리카노처럼
우리의 인연도 그렇게
은은하고 따뜻하게 오래 남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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