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ttle, USA
분명 알람소리를 듣고 언니의 신발이 아직 침대 앞에 있는 걸 확인했는데 깜짝 놀라 일어나니 언니는 벌써 준비를 거의 다 끝내신 상태였다. 빠르게 준비를 하고 언니와 조식을 먹기 위해 식당으로 내려갔다. 깨끗하지 않고 물이 졸졸졸 흘러 머리를 감기 힘들었던 숙소의 욕실이 오늘 아침까지는 마음에 안 들었지만 빵과 시리얼이 주를 이뤘던 지금까지 와의 숙소와 다르게 계란 프라이를 해 먹을 수 있게 되어있는 시스템이 마음에 들어 순식간에 숙소의 평점이 3점에서 4.5점으로 급상승했다.
캐나다에서부터 가져온 나의 베이컨과 함께 푸짐한 아침식사를 함께하고 스타벅스로 향했다. 또다시 품절을 경험하고 싶진 않았고 숙소와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매일매일 물건이 들어온다고 했기 때문에 아침 여덟 시에는 절대 품절되지 않을 거라고 호언장담을 하며 언닐 스타벅스로 끌고 갔고 우린 원하는 기념품을 구매했다.
어젯밤 우리는 어디를 여행하는 게 좋을지 둘이 한참을 고민하다 우리보다 며칠 더 시애틀은 여행했던 에밀리의 조언을 듣고 제일 먼저 배를 타고 베이아일랜드로 넘어가기로 했다. 밴쿠버에 있을 때만 해도 이곳에 머무는 내내 분명 종일 비가 온다고 그랬는데 오늘의 시애틀은 아주 맑고 화창했다.
비올 기색이 전혀 없는 하늘에 웃음이 절로 난다. 배를 타 바람이 불어도 해가 쨍 해 전혀 춥지 않았고 맑게 웃고 있던 우리는 서로를 카메라에 담아주었다. 맑은 하늘, 시원한 바람, 숨쉬기 편한 공기가 끝없이 나를 미소 짓게 만들었다.
배를 타면 10-20분이면 도착한다는 베이 아일랜드는 40-50분 정도 걸려 도착했다. 언니와 나는 사십 분이 어떻게 이십 분이 될 수 있냐며 에밀리의 거짓정보에 대해 한참 이야기하다 멀어지는 시애틀의 전경을 보면서 가면 그럴 수도 있겠다 하며 시간계획을 다시 짜기도 했다.
작은 동네인 베이아일랜드를 구경했다. 다운타운과 배로 사십 분 거리일뿐인데 조용하고 한적하고 깨끗한 동네였다. 여행객은 거의 없는 듯한 그곳을 한 바퀴 둘러보고 우리는 한적한 거리를 걷는 데에 재미가 들려 예상했던 것보다 늦은 시간의 배에 올라탔다. 해가 지고 나면 숙소에 들어갔던 나는 오늘 일정이 까마득하게 많이 남아 걱정될 만도 했지만 코로나가 생기고 동양인에게 조금은 험악해진 이 도시를 언니와 함께라는 이유로 좀 더 즐길 수 있었다.
배를 타고 본도시로 돌아와 한참을 걸어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별로 지하철을 타고 싶지는 않았는데 어제 타봤는데 괜찮다는 언니의 말을 믿고 지하철역 쪽으로 걸음을 향했다. 하지만 나의 걱정은 현실이 됐고 지하철역의 입구에는 정말 숨을 쉬기도 힘들 정도로 역한 냄새와 옷과 침구 가지들이 늘어져있었다. 옷을 제대로 입고 다니지도 않는 게 어쩌면 당연한 노숙자들이 배회하고 있었다. 정말 터질 만큼 튀어나올 만큼 뛰어대는 심장을 부여잡고 언니와 뛰듯 계단을 내려갔다. 신기하게도 지하철역으로 들어가니 노숙자들도 없고 주변도 깨끗했다. 괜찮다고 했던 언니가 조금은 원망스러웠지만 계속해서 나를 안심시켜 주었던 언니기에 조금은 기대어도 괜찮다 생각했다.
그렇게 우리는 해가 쨍한 오후 워싱턴 대학교에 도착했다. 하키팀이 유명한 워싱턴 대학교는 엄청나게 큰 교정을 자랑했는데 내가 좋아하는 보라색이 트레이드 마크라 교정 내 곳곳에서 보라색을 한 귀여운 것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보라색 소화전이라던가 의자, 쓰레기통 이런 것들 말이다. 배가 고팠던 우리는 근처의 타운에서 샐러드볼을 먹고 연고지가 전혀 없는 워싱턴대학교의 기념품샵에서 ‘W’가 새겨진 옷이며 모자며 구매를 했다. 왜인진 모르겠지만 그냥 사서 보관하면 언젠가 또 올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고 미국의 대학교는 한국과는 다르게 스포츠 브랜드와 협업을 해서 기념품을 만들기도 하는데 나이키, 룰루레몬, 아디다스, MLB 등 많은 브랜드가 있었고 고퀄리티이기도 했다. 물론 그만큼 가격도 사악했고 말이다.
할인하는 굿즈를 한봉다리를 구매하고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오늘의 하이라이트인 린파크를 가기 위해서였다. 린파크는 시애틀의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었는데 나는 야경에는 별 관심이 없지만 그 도시를 한눈에 보는 거엔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어젯밤부터 이곳 괜찮은 거 같지 않냐며 언니를 계속해서 꼬셨었다. 버스를 기다리면서 언니와 잔돈을 교환하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사진을 잘 찍지 못해 미안하다는 언니의 말에 괜찮다고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 사진을 자주 찍지 않는다는 언니가 대단했던 건 오늘의 첫 일정지에서부터 지금까지 느리게나마 사진실력이 늘고 있다는 점에서 놀라웠다. 이런 깜짝 선물같이 생긴 인연덕에 이곳에서의 나를 더 진하게 남길 수 있음에 감사했다.
린파크에서 해가질 무렵 끝내주는 시애틀의 풍경을 감상했고, 그곳에서 프러포즈를 했던 커플의 흔적을 보고는 침을 흘리는 강아지처럼 욕망 가득 소유의 눈빛으로 그 흔적을 바라보기도 했다. 많이 지쳐있는 언니를 배려해 걷고 싶었지만 버스를 타고 다음 목적지인 시애틀 타워로 향했고 그곳에서 함께 쇼핑도 했다. 오늘 정말 쉼 없이 많이 돌아다녔다며 우린 서로를 뿌듯해했고 숙소에 돌아가 함께 저녁을 먹자고 이야기했다. 조금만 걸어가면 되는 거리라 해가 졌음에도 불구하고 걷기를 선택했는데 숙소에 들어가는 길에 우리의 길을 막고 붙잡는 노숙자를 마주했다. 이 겨울 등골에서 땀이 쭉 흐르고 소름이 돋았다. ‘노 잉글리시’라고 말했는데도 불구하고 부탁이 있다는 그 사람을 피해 가고 싶었는데 자꾸만 우리의 앞을 가로막았고 우리는 그 사람을 가운데에 두고 갈라져 흩어졌고 아주 빠른 걸음으로 그곳을 빠져나왔다. 종일 언니와 함께라 괜찮은 줄 알았는데 공포감은 배가 됐고 이때부터 겁이라는 감정의 세기가 무슨 아이템을 먹은냥 더욱더 거세져 남은 여행이 공포감에 휩싸여있기도 했다.
겨우겨우 숙소에 들어와서 함께 밥을 먹었다. 클램 차우더의 도시인 이곳에서 클램 차우더를 한 번도 못 먹어본 언니를 위해 클램 차우더와 랍스터 롤 등을 시켜 숙소에서 같이 먹고 체크아웃을 아침에 한 언니를 위해 화장을 지울 수 있는 화장품들과 스킨로션도 빌려드렸고 나는 나만의 또 언니는 언니만의 내일을 맞이하기 위해 우리는 아쉬운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버스에 많은 종류의 사람들이 타고 내린다. 겉으로 잘 보이지 않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그 다름이 확연한 이곳에서 나는 온종일 그 다름이 피부에 와닿아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겠는 일 투성이다. 이렇게 하루 이틀 지내며 난 또 이곳에 익숙해지고 이곳을 떠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또 낯설어지겠지. 나는 오늘도 낯선 곳에 스며들고 있는 이방인이었다.
Jan1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