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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 Oct 27. 2024

문자로 아빠의 위암 진단서를 받다


#아빠라는 사람


나는 눈물이 많다. 아빠를 닮아서 그렇다고 했다.

손재주가 좋은것도 아빠를 닮았고, 생각이 많은 것도, 사람이 좋은데 티를 못내는것도, 마음이 여린것도 아빠를 닮았댔다.

근데, 아빠는 내가 본 가장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한 평생 알량한 자기 사업만을 위해서 살았고, 아빠라는 사람에겐 가족이란 없어도 그만인 존재 같았다. 아빤 평생을 밖으로 나돌았다. 아빠와 한집에서 같이 '살았던' 건 내가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였다.

그 후론 이런 저런 핑계로 한 주에 한 번 길게는 몇 달에 한 번씩 집을 왔다.

집을 떠나며 나의 손에 쥐어주던 얼마의 돈. 아빠는 더 줄까? 하며 내게 두손 가득 지폐를 받게 했다.

나는 그 돈을 받으려고 아빠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던게 아니었다.

내가 현관문 앞서 한동안 서있던 이유를 아빠는 평생 모를거라고 생각했는데, 어른이 돼고나서야 알았다. 그 푼돈으로 자신의 죄책감을 덜어냈다는걸.

그러니까 아빠를 닮았난 말이 난 싫었지만 그때마다 별다른 대꾸 없이 그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침묵하는게 다였다.

IMF로 사업의 규모 절반 이상을 잃고 근근이 이어가던 회사도 접게 되자 아빠는 술을 물처럼 마셨다. 엄마와 아빠는 이혼을 했고 그 길로 아빠는 잠적했다.

가끔 아빠의 번호로 전화가 울렸지만 그땐 내가 받지 않았다.

그렇게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2024년 봄, 나는 아빠로부터 아빠의 위암진단서를 받았다. 위암?

보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위암이라는 글자 옆에 표시된 질병코드와 위암에 대한 의사의 소견을 보니 심장이 무겁게 떨어졌다.

그제서야 천륜은 끓을 수 없다는 사람의 말이 떠올랐다. 가족이란건 참 희한했다.

소 힘줄보다 질겨서 그 안에 묶인 사람들은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아야하는 불가항력적인 힘을 가진것 같았다.

십 년 만에 만난 아빠는 정말,, 심하게 볼품이 없었다. 이마에 주름은 더 짙어지고, 걸음걸이가 느려지고, 키가 많이 줄었다. 평생에 살이 찐 적이 없던 몸이었지만 전체적으로 다부진 근육이 타고났었는데, 이젠 정말 뼈밖에 남지 않아서 아사 직전의 몸 같았다. 저 몸 안에서 천천히 암이 자라는 중이라니.

그게 어떤 방식으로 아빠를 죽음으로 데려가고 있는지는 말라비틀어진 몸과 얼굴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초기에 발견한 암이어서 몇 년은 거뜬하게 살 수 있다고 말하는 아빠의 얼굴을 보면서 복잡한 감정이 일었다. 이젠 더 이상 엉엉 울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다.


아빠는 가만히 서있는 나를 보며 집으로 가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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