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죽을 때까지 자란다
일주일의 중간 수요일 아침 부엌에서 식사를 준비하는데, 첫째 다온이가 동생들 밥그릇과 수저 그리고 물을 챙겨준다.
“와, 다온이 덕분에 아빠가 참 편하네. 도와줘서 고마워!”
"다온이 참 많이 컸다."
그러자 쌍둥이 남매가 잽싸게 끼어든다.
“아빠, 나도 많이 컸지?”
“그럼, 한준이도 채린이도 많이 컸지. 이제 스스로 옷도 입고 밥도 먹고…”
그 순간 다온이가 조용히 한마디 툭 던졌다.
“근데, 누가 제일 많이 컸어?”
정답을 찾느라 머리를 굴리던 그 찰나
“할아버지가 제일 많이 컸어. 할아버지는 모르는 게 없으시잖아.”
웃음이 터졌다.
그래, 그 말이 맞지. 할아버지는 우리 집에서 가장 많이 자란 분이다.
아이 눈엔, 키나 나이가 아니라 '아는 것', '경험', '존중'이 크기의 기준인 모양이다.
우리는 영아기, 유아기, 아동기, 청소년기, 청년기를 지나는 동안 성장(growth)이라는 말을 참 많이 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중년 이후에는 이 단어를 잘 쓰지 않는다.
대신 ‘노화’, ‘퇴행’, ‘은퇴’, ‘감소’ 같은 말들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심리학 연구도 청소년기까지는 활발하지만, 그 이후는 점점 줄어든다. 마치 발달이 끝난 것처럼.
‘더는 자라지 않는 인간’이라는 암묵적인 전제.
하지만 정말 그럴까?
에릭 에릭슨(Erik Erikson)은 말년에 이르러서도 인간은 ‘통합감 vs 절망’이라는 심리적 과업을 이루는 과정을 겪는다고 했다.
과거를 돌아보고 삶을 수용하며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이 마지막 단계도 성숙의 과정이다.
성장은 키만 크거나 사회적 영향력만 넓히는 게 아니라, 마음을 넓히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니 죽을 때까지 자란다는 말이 합리적이다.
한국 사회에서 노년은 긍정보다는 부정적인 의미에 더 가깝다.
몸이 줄고, 사회적 역할이 줄고, 말할 기회도 줄어든다.
그러다 결국 당사자는 고립, 다른 세대에겐 편견이 남는다.
‘꼰대’라는 단어는 노인세대 전체를 향한 조롱이 되어버렸고, 세대 간 대화는 ‘갈등’으로 번역되었다.
노인복지관, 아동센터, 청소년문화의 집… 우리 사회는 철저하게 연령별로 공간을 분리한다.
같이 어울릴 기회가 적다. 일자리 연구, 고립청년 연구 등 여러 활동을 하면서 이 점이 가장 아쉬운 대목이었다.
반면, 201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일본의 ‘지역 교류 살롱(地域交流サロン)’이나 2003년부터 시작된 독일의 ‘다세대 센터(Mehrgenerationenhaus)’는 세대가 섞이고 함께 놀고 배우며 함께 일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든다. 아이와 어르신이 같은 공간에서 그림을 그리고, 밥을 짓고, 장난감을 고친다.
이게 바로 ‘진짜 성장’이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함께 크는 사회.
다온이의 말대로라면, 우리 집에서 가장 ‘큰 사람’은 할아버지다.
그리고 나는, 그 뒤를 따라가는 사람이다.
아빠로서, 심리학자로서, 나 역시 아직 크는 중이다.
좋은 대학, 좋은 일자리, 사회적 인정…
우리가 자란다는 걸 입증받던 방식은 어쩌면 누군가의 기준에 맞는 성장이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죽을 때까지 자라는 사람, 성숙을 멈추지 않는 사람,
그래서 결국 삶의 끝에서 “충분히 잘 살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오늘도 아이들이 커간다.
그리고 나도, 작게나마 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