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할아버지

여름날의 블루

by 여름

가을바람이 유난히 매서웠다. 전날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할아버지가 갑자기 숨을 힘겹게 내쉰다. 헉헉 소리만이 집안을 맴돈다. 불길한 예감은 나뿐 아닌 가족들 모두가 느꼈다.


작은 희망을 믿었다. 그래서 차오르는 눈물을 애써 참았다.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붙잡고선 울부짖었다. 이런 게 어딨냐며. 할아버지의 입에서는 가쁜 숨만이 나왔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지 할머니의 손을 미끄러지듯 잡았다. 평소에 할아버지 곁에 가지도 않던 고양이가 할아버지의 발을 초조하게 핥았다.


아빠가 할아버지를 업고 다급하게 병원에 갔다. 힘없는 할아버지를 든 손과 발이 간절해 보였다. 의사는 할아버지를 바로 중환자실로 보냈다. 상태가 좋지 않다며, 가족, 친척들을 부르시라는 말도 덧붙였다.


‘할아버지 사랑해요’. 할아버지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이었다. 예전부터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입술이 떨려왔다. 미루고 미루다가 마지막 순간에 무겁게 입을 뗄 수 있었다. 울지 말자는 엄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선 할아버지를 계속 볼 수 없었다. 고모는 시뻘건 눈을 한채 나의 등을 토닥였다.


2015년 11월 18일 수요일, 할아버지는 새벽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할아버지에게 양가감정을 가졌다. 애증의 존재랄까. 할아버지는 늘 남동생에게만 사랑을 표현했다. 딸보다는 아들, 남동생은 우리 집 대장이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나는 벽을 치기 시작했다. 옆집 할아버지만큼이나 어색한 사이에 한집에 살면서도 일주일에 한 번 말을 섞을까 말까 했다.


어느 뜨거운 여름날이었다. 집 앞 공원은 나와 친구들의 아지트였다. 그날따라 한적한 공원은 우리를 더욱 즐겁게 했다. 울창한 나뭇길 사이로 저 멀리 할아버지가 보였다. 종알종알 수다를 떨다가 숨이 턱 하고 막혔다. 급격히 머릿속이 하얘졌다. 도망을 칠까 고민했지만 할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다. 느린 걸음으로 지팡이 소리를 울리며 걸어왔다.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심장이 두근두근, 잘못한 일을 저질렀을 때랑 비슷한 기분이었다.

“안녕하세요.”

태어나서 16년을 같이 산 할아버지에게 힘겹게 건넨 한마디였다. 친구들이 귀에 대고 ‘누구셔?’라고 물었다. 어이없는 인사에 할아버지도 나도 당황한 표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할아버지는 헛헛하게 웃으며 나를 지나쳤다. 할아버지의 뒷모습에 다리 힘이 풀리며 안심이 됐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또다시 수다를 이어갔다.


2015년 11월 18일 수요일, 할아버지의 사망 선고에 스치듯 지나간 장면이었다. 먹먹한 가슴에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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