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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서진 Oct 19. 2022

19. 임시 휴전

   

  4년 전 이사 오기 전 내가 살았던 아파트는 분양을 받아 27년인가를 살았다. 세상 어느 집보다 나는 그 집을 좋아했다. 일단은 완벽한 정남향이었다. 앞뒤로 막힌 곳이 없어 이사 전까지 에어컨 없이 여름을 났다.

  겨울이면 햇살이 거실 안쪽까지 깊숙이 파고들었다. 나는 베란다 화초 옆에 앉아 차를 마셨다. 처음 이사를 하고 아는 사람에게 새시를 맡겼는데 참으로 엉성하게 짜 놓아서 바람이 창틈을 파고들어 오기도 했다. 태풍이 불면 음악 소리처럼 들리기도 했다. 문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의 세기에 따라 플루트 소리도 나고 오보에 소리도 나고 첼로 소리도 났다.

  후이이잉-

  조금씩 덜컹거리며 내는 그 소리를 눈을 감고 들으며 폭풍의 언덕을 느껴보기도 했다.

  아파트가 나이가 들수록 아파트 화단은 무성해졌다. 나무들은 굵고 씩씩해졌다. 놀이터 옆 등나무는 포도송이 같은 등꽃을 빽빽하게 달아 놓았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곳은 대나무 숲이다. 숲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옹색하지만, 대나무들이 담 한쪽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곳에 가면 어릴 적 운동 장만했던 대나무 숲을 가지고 있었던 시골의 마당 넓은 집이 생각났다. 많은 논과 밭이 아버지의 도박으로 모두 넘어가고 서울로 야반도주를 한 뒤 우리의 가난은 시작되었다.

   이사 와서 제일 아쉬웠던 것은 대숲에서 나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파트에 심어진 대나무를 보자 눈이 휘둥그레졌었다. 나는 그 아래서 눈을 감고 대나무가 흔들리는 소리를 들었다.

  사드락사드락

  댓잎들은 눈길을 밟는 소리, 주판알을 흔드는 소리, 파도 소리들을 낼 줄 알았다.

  무엇보다 그곳에는 길냥이들이 살고 있었다. 누군가 중성화까지 해서 아파트에 버린 그 고양이들을 나는 돌보았다. 노란 고양이와 검은 고양이 두 마리였는데 검은 고양이는 사라지고 순하게 생긴 치즈냥 나비만 남았다. 그리고 거의 아사 상태로 구조된 삼색 고양이 빼빼랑 질기게 들러붙어 남게 된 뭉이 밥을 챙겨 주었다.

  나비는 [고양이가 된 고양이]라는 동화책의 주인공 보리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나비가 죽었다는 연락을 오늘 아침에 받았다. 내가 살았던 아파트에 있는 길냥이들은 새엄마가 내가 돌보아 준 것보다 열 배나 더 정성스럽게 돌보아 주고 있었다. 나비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열흘 전에 다녀오기도 했다.

  “나비가 2동 3, 4라인 현관 앞에 앉아 있다고 민원이 들어왔어요.”

  2동 3, 4라인은 내가 살았던 곳이었다.

  아침을 먹고는 나비 새엄마네 집을 방문했다. 나는 일부러 미용실을 바꾸지 않고 그 동네로 다니고 있다. 근처 볼 일이 있으면 꼭 들렀다. 그러면 내 차 소리만 들어도 달려오곤 했던 나비였다. 그런데 변도 지리고 치매기도 있었다. 나를 보고 멀뚱멀뚱 보기만 했다. 10살이나 되었으니 길고양이 치고는 장수를 한 셈이라지만 그날 처음으로 나비의 마중도, 배웅을 받지 못했다.

  그런데 오늘 새벽에 아주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는 것이다. 어쩐지 자꾸 나비가 눈앞에 어른거렸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가지 못했다.

  오늘은 산책도 좀돌팥과의 전쟁도 임시 휴전이다. 오늘 뽑으려고 했던 좀돌팥은 하루 더 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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