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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서진 Oct 19. 2022

18. 백기를 들다.



  맥문동 꽃밭에서 좀돌팥 싹을 뽑는데 문득 떠오르는 의문이 있었다.

  “왜 이 자리만 좀돌팥이 무성했던 걸까?”

  그럴만한 이유는 딱히 없었다. 주변을 둘러보다 울타리 쪽에 멈췄다.

  내가 사는 아파트는 입구는 평평해도 지대가 높다. 따라서 지하 2층 주차장까지 있어 사방으로 둘러놓은 울타리 아래쪽을 보면 상당히 높은 돌 담 축대가 있다. 그렇기에 아파트 둘레를 철 울타리로 둘러놓았고 그 앞에 화살나무를 심어 놓았다. 화살나무 아래에서도 좀돌팥 싹이 올라오길래 뽑아 주기도 했다.

  나는 철 울타리와 화살나무 사이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런데 세상에나! 좀돌팥 줄기가 쥐 죽은 듯 소리도 내지 않고 돌 담을 타고 오르고 있었다! 그동안 나는 안에서만 수비했지 밖에서 공격해 올 것은 생각지도 못했었다.

  “이건 반칙이잖아!”
   아파트 안에 있는 것이 아닌 밖에서까지 공격해온다면 범위가 다르지 않은가?

  일단 마음을 가라앉히고 담장 아래를 가보기로 했다. 바로 밑이지만 빙 돌아가야 하는 곳이다.

  담장 아래 공간에는 나무들이 심겨 있고 그 옆으로는 인도와 4차선 도로가 있다. 길 건너에는 인가가 많지 않아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는 길이다. 나 역시 운전은 하고 다녔어도 그쪽으로는 걸어갈 일이 없었다.

  산죽 숲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그리고 나무들이 있는 장소가 꽤 넓다는 것도 알았다. 우리 집이 2층이기 때문에 오른쪽으로 보면 숲처럼 보이는 이유가 바로 이 나무들 때문이라는 것도 새삼 느끼게 되었다. 가끔 시에서 나오는지 풀 깎는 소리가 들리기도 하는데 지금은 꽤 무성해진 풀을 밟으며 걸어갔다.

  그러다, 보았다. 맥문동 아래 담을 타고 오르는 좀돌팥 무리들을! 그들은 군데군데 심어진 철쭉을 덮으며 타오르고 있었다. 너무나 많은 무리들을 보니 기가 팍 눌렸다. 아파트 담장을 타고 오르는 것 말고도 바닥에도 모두 좀돌팥 줄기와 잎이 온통 뒤덮여 있었던 것이다. 그제 비가 와서 약간 질척해서 뽑아내기는 쉽겠지만 너무나 무성하니 풀밭에서 뱀이 기어 나올 것 같은 느낌에 섬뜩하기도 했다.

  졌다!

  손이 닿는 곳까지만, 철쭉을 감고 오르는 덩굴들을 떼어 주고는 한숨을 쉬었다. 무엇이든 이유가 있고 원인이 있다. 그것을 미처 찾아내지 못하고 맥문동 사이에서 올라오는 싹만 열심히 뽑았다. 이곳에서 열매를 맺은 좀돌팥이 콩 열매를 총알처럼 쏘아대 맥문동에 지뢰처럼 뿌려 놓은 줄은 몰랐던 것이다.

  원인은 알았으나 방법은 없다. 돌담 축대를 타고 오르기도 위험하고 바닥에 깔린 좀돌팥을 제거하기도 버겁다. 팔짱을 끼고 한참을 바라보다가 나는, 백기를 들고 고개를 푹 숙인 채 후퇴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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