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을 잊어버리는 병

이수연

by 이수연

영화 <메멘토> 속 주인공 레너드는 아내가 살해당하던 날, 사고로 10분밖에 기억하지 못하는 단기 기억상실에 걸린 남자의 이야기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스릴러로 레널드가 살해당한 아내의 복수를 하기 위해 범인을 쫓는데 이때 레널드는 사진이나 메모, 문신으로 자신의 기억을 기록한다. 영화 속에 나올법한 이 단기 기억상실은 실제로 존재한 사례가 있는데, 신경학계에서 유명한 일화로 환자인 헨리 몰레이슨은 간질 수술 이후 장기기억을 하지 못해 의사에게 몇 번씩 인사를 다시 하거나 밥을 먹은 것을 기억하지 못해 다시 밥을 먹는 등의 행동을 보였다고 한다.

이에 반해 우울증은 기억에 큰 문제가 없는 질환이다. 물론 때때로 멍하거나 기억력이 떨어지는 증상을 보이기도 하지만, 뇌 자체에서 기억을 지워버리거나 단기 기억상실은 일어나지 않는다. 원인도 학계에서는 뇌의 신경전달물질 불균형으로 보고 있지만 결정적 이유로는 스트레스를 꼽는다. 사실상 뇌의 이상인 단기 기억상실과 정신적 스트레스가 원인인 우울증은 다른 질병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우울증과 단기 기억상실의 닮은 점이 있다. 바로 자꾸 잊어버리는 것이 있다는 것. 그것은 희망이다. 우울증은 장기기억과 단기 기억 모두 정상적으로 작동하지만 ‘희망’이라는 것에 있어서만큼은 자꾸만 잊어버리게 된다. 그게 십 분이든, 하루든, 일주일이든 금방 잊어버리고 또 잊어버린다. 기억하려 떠올려보아도 계속 다시 잊어버린다. 잊고 기억하고, 잊고 기억하다 다시 까맣게 잊어버린다.


나는 이 ‘희망을 잊어버리는 병’에 걸린 사람 중 하나이다.


평범한 날이었다. 아무 일 없이 잠에 들었고 평소와 같이 여러 꿈을 지나 눈을 떴다. 블라인드 사이로 햇빛이 들어와 꽤나 눈부신 한낮이었다. 멀쩡히 일어나기만 한다면 밥을 먹고 씻고 일을 하는 일상을 보낼 것이 틀림없는 하루였다. 그런데 몸을 일으킬 수 없었다. 슬픔과 우울이 온몸을 꽁꽁 묶어 일어날 수 없게 만들었다. 도저히 일어날 수 없어 가만히 누워있는데 문득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오늘 나는 일어날 수 있을까? 해야 하는 일을 다 끝낼 수 있을까? 내일도 이렇게 꽁꽁 묶인 기분이라면, 그 내일의 내일도, 내일의 내일의 내일도 나는 살아갈 수 있을까. 언제까지 버텨낼 수 있는 걸까. 언제까지 슬프고, 언제까지 아파야 하는 걸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누워있는 동안의 생각이었다. 오늘 나는 이 무거운 마음을 들고 해야 할 일을 해낼 수 있는 힘이 있는 걸까 하는 걱정과 일을 끝내면 다시 잠에 들어야 하고 잠들지 못한 숱한 밤들이 오늘이라면 괴로워하며 맞이할 새벽과 다시 내일이 오고 다시 찾아올 이 무거운 감정들을 어떻게 이겨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야말로 희망을 완전히 잊어버렸다. 일어나면 괜찮을 거라는 희망, 내일은 괜찮을 거라는 희망, 약을 먹으면, 치료를 받으면 더 나아질 거라는 희망. 순간 모든 희망을 까맣게 잊었다.


woman-3478437_1920.jpg 너무나 어두웠다. 깊은 터널에 있는 느낌. (pixabay)


나는 자꾸 기억해냈다. 이러한 아침 또한 수없이 맞이해왔다. 이보다 더 괴로운 날들도 많았다. 그 괴로운 날을 겪어내며 해야 할 일을 해내지 않은 적은 많지 않았다. 막상 일어나 자리에 앉으면 뚝딱 일을 해내는 나였다. 모든 날이 이토록 힘들지는 않았다. 가볍게 일어날 수 있는 하루도 종종 존재했다. 일을 하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기쁜 날도 있었다. 희망은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었다. 나도 겪어보았고 모두가 흔히 품는 마음이 희망이었다. 잊지 말자. 잊지 말자. 나는 자꾸만 사라지는 희망을 되새겼다.

기억해 낸 작은 희망을 지렛대 삼아 눈을 질끈 감고 마음에 감긴 몸을 풀어냈다. 풀어지지 않는 것은 하나씩 힘을 주어 끊어냈다. 몸을 모두 일으키는데 긴 시간이 걸렸지만, 어떻게든 몸을 일으켜냈다. 조금 더 힘을 내서 밥을 먹고 조금 더 힘을 내서 씻고 출근한다면 다시 그럴듯하게 하루가 흘러갈 것이 분명했다. 저릿한 몸을 질질 끌어내 기어코 씻고 밥을 먹고 출근하는 것을 해냈다. 그리고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쓰기 시작했다.


한낮의 걱정과 달리 나는 해야 하는 일을 차 근하근 해냈다. 서두르지 않고 하나씩 천천히 했고 시간은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또 오늘은 어떻게 보내야 하지’라는 걱정을 할 필요도 없이 잘 해내었다. 겨우 기억해 낸 희망은 몇 시간을 살아가게 만들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다시 희망을 잊어버리기 시작했다.


‘오늘은 이렇게 해냈지만, 내일은. 내일은 또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거지. 아니, 내일이 아니더라도 오늘 밤은. 잠들 수 있는 걸까.’


새벽은 내게 두려움이었다. 잠들지 못하면 모두가 잠든 때 도움을 외칠 곳이 없어 홀로 숨죽이고 아침이 오길 기다렸다. 그 긴 시간이 너무나 외로워 머리를 쥐어짜고 약을 더 먹고 울어도 보고 응급전화를 걸지 말지 고민하며 새벽을 보낸 적도 있었다. 잠에 들면 내일이 온다는 것이 끔찍해서 억지로 밤을 새운 적도 있었다. 나는 조금이라도 정신없이 잠들기 위해 맥주 네 캔을 사들고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돌아와 잠든 남편에게 인사하고 맥주 한 캔을 땄다. 그새 잊어버린 희망에 천천히 숨이 막혀왔다. 그러나 다시 기억해내기 위해 노력했다. 혼자서 희망의 흔적을 찾아 이리저리 생각을 굴렸다.


‘오늘 해야 할 일을 다 해냈고, 오늘 하루도 무사히 살아냈어. 내일도 그럴 수 있고, 그 내일도 그럴 수 있어. 희망은 존재해. 내가 자꾸 잊어버리는 것뿐이야.’


마음속에 희망을 기억하기 위해 좋은 과거를 세워놓았다. 자꾸만 내게 보여주지 않으면 잊어버리는 탓에 좋은 기억을 담은 글을 다시 읽어보기도 했다.


‘나에게도 희망이 있다.’


나는 다시 조금씩 기억해냈다. 희망은 있다, 희망은 있다며 되뇌고, 무사히 잠에 들었다. 잠에 들면서도 알고 있었다. 내일 일어나면 다시 희망을 잊어버릴 것이다. 다시 무거운 마음이 나를 묶을 것이다. 나는 다시 희망을 기억하기 위해 애쓰고 기억해낸 뒤 또 잊어버릴 것이다. 그것이 내가 가지고 있는 병이고, 여태까지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그러나 다시 기억해 낼 수 있다. 금방 잊어버린다면, 그만큼 다시 기억해내면 된다. 다시 잊어버린다고 기억해 낸 것이 의미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기억해낸 만큼 살아냈다. 때로는 무언가를 해내었다. ‘희망을 잊어버리는 병’은 희망을 잊게 만들 뿐, 나의 모든 희망 자체를 앗아가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도 잊어버리는 희망에 눈앞이 캄캄하지만, 나는 다시 희망을 여기저기 새긴다. 메멘토의 주인공 레너드가 사진을 찍고 메모를 하고 문신을 새기듯, 나는 희망을 글로 새기고 그림으로 새기고 마음에 새기고 사람에 새긴다. 좋은 사람을 만나고 대화하며 희망을 기억해내기도 하고 글을 읽으며 희망을 기억해내기도 한다. 다시 잊어버릴 것을 알면서도 기억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그렇게라도 살아가기 위함이다. 이 병으로 모든 희망조차 없이 차갑게 죽어나갈 바엔 다시 잊더라도 따듯하게 살아서 기억해내는 일을 택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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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수연

*<조금 우울하지만, 보통 사람입니다>(다산북스)

* <슬픔은 병일지도 몰라>(반니) 저자

* 독립출판 소설 <자화상>(단편소설집 RED) 제작 및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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