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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연 Jul 15. 2022

자살은 '극단적 선택'일까?

뉴욕 정신과 의사의 사람 도서관

 정치적 이슈도, 사회적인 것들도 관심 없는 내가 한동안 신경 쓰여가며 확인해 본 기사가 있다. '완도 조유나 양 가족 실종사건'에 관한 기사였다. 제주도 한 달 살기를 하겠다며 체험학습을 낸 가족의 행방은 전남 완도에서 흔적이 끊기게 되었고, 6월 24일 공개수사로 전환되어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 후 매일같이 기사가 떴다. 실종된 조유나 일가족의 행방과 침수된 차량 발견, 그리고 블랙박스 복원 내용까지. 사고인가 자살인가를 두고 기사가 쏟아져 나왔고, 경찰은 우울증과 생활고, 수면제 복용 사실을 통해 '자살'로 잠정적 결론을 내렸다는 기사까지 나왔다.

 안타까운 소식에 마음이 아려오면서도 기사마다 '극단적 선택' 이란 단어를 마주해야 했다. 이는 처음이 아니었다. 유명인이 자살했을 때, 누군가 자살 소식이 들려올 때 언제나 '극단적 선택'이란 말로 '자살'이 표현되었다. 그에 대한 이유는 나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자살'이라는 단어를 읽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에게 트리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살자 행동 패턴에는 시도 전 뉴스 검색을 엄청나게 한다는 결과가 있다.
충분한 개연성이 입증되기 때문에 사전에 차단하자는 의미”


출처: 한국기자협회(http://www.journalist.or.kr/news/article.html?no=46598)


  그러나, 다시 생각해본다. 자살이라는 단어는 트리거가 될 수 있지만, '극단적 선택'이라는 표현은 적절한 것일까. 이 물음을 똑같이 가진 사람이 있다. <뉴욕 정신과 의사의 사람 도서관>의 저자 나종호 의사다.


자살은 극단적 선택이 아니다
예전엔 미국에서 자살을 묘사하거나 설명할 때 '저지르다'라는 다소 부정적인 의미를 지닌 동사 'commit'를 사용했다. 그러다 1998년 아들을 자살로 잃은 도리스 소머-로텐버그가 처음으로 이 단어를 사용하는 것에 문제를 제기했다. commit가 주로 범죄나 살인 같은 행동을 묘사할 때 사용하는 단어였기 때문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사람뿐만 아니라 유가족까지 부정적인 대상으로 낙인찍고 그들로 하여금 죄책감과 수치심을 유발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중략) 이제는 언론도 자살에 관한 기사를 보도할 때 채 commit 대신 '자살로 사망했다(died by suicide)'는 표현으로 대체해 사용하는 추세다.(167-168p)

 1998년 이전까지 미국에선 자살을 보도할 때 'commit'이란 표현을 썼다. 그러나 1998년 이후부터 '자살로 사망했다(died by suicide)'라는 직접적인 단어로 바꾸어 보도하기 시작했다. commit이 의미하는 것은 '저지르다'라는 부정적 의미인데, '극단적 선택'은 '저지르다'라는 부정적 의미를 내포하는 단어는 아니다. 그럼에도 저자가 '극단적 선택'이 아니라고 말하는 데엔 크게 세 가지 이유가 있다.


 1. 자살을 생각하거나 시도하는 사람들은 내가 무엇을 해도 삶이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는 절망감과 무력감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중략) 선택지가 없다고 느낀 사람에게 '선택'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적절한가? (170p)


 2. 자살을 이기적인 선택으로 바라보는 부정적 시선이 자살 예방에 악영향을 미치는 궁극적인 이유는, 자살 고위험군으로 하여금 자살 생각이나 자살 시도를 숨기게 만드는 데 있다.(171-172p)


 3. 자살을 선택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고인은 물론 자살 유가족들까지 낙인찍는 일이다.(173p)

 

 저자는 이러한 이유로 자살을 떳떳하게 이야기하고 '자살'이라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지 않는 이상, 이 문제는 영원히 해결될 수 없을 것이라면서.



 '자살'이란 단어의 무게

 <뉴욕 정신과 의사의 사람 도서관>에서 말하는 것은 '자살'을 직시하고 자살 예방에 힘쓰며 자살까지 가는 이들의 마음을 이해하며 유가족을 낙인찍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확실히 '선택'이라는 단어는 고인이 '어떻게 살았는 가'보다 고인이 '왜 죽었는 가'에 더 초점이 맞춰진 단어이다.


"왜 선택을 하게 되셨나요?"


 아마 장례식장에서 아무도 묻지 못할 말이지만, 모두가 궁금해하는 말일 것이다. 왜, 왜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되었던 것이냐고.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장례식은 애도하는 자리다. 고인의 삶을 돌아보고 나누며 떠나보내는 자리다. 왜 죽었는 지보다, 어떻게 살았는지를 얘기하고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기억하는 자리이다. 우리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 이들의 장례식을 찾았을 때, "왜?"를 떠올리는 것은 무의식 중 '극단적 선택'이란 단어가 깔려 있기 때문일 수 있다.


 여기까지가 <뉴욕 정신과 의사의 사람 도서관>의 이야기라면, 나는 한걸음 더 나아가 묻고 싶다. 그렇다면 '자살'이라는 단어를 마주했을 때 자살 고위험군이 받는 어떠한 자극(자살 충동)을 완전히 무시할 수 있는가. 실제로 유명 연예인의 자살 기사를 접하고 평소 자살 고위험군이던 지인을 만났을 때, 그 지인은 내게 이렇게 물었다.


 "언니는 괜찮았어요? 저는 솔직히 영향이 있더라고요. 기사 보니까 죽고 싶었어요."


 나는 태연한 척했지만, 나 역시 아예 영향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 친구가 어떻게 알아냈는지 "그 사람, 이렇게 죽었대요."라며 자살 방법을 얘기해주는데 나도 모르게 충동이 드는 날 그 친구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처럼 누군가는 신경 쓰지 않고 넘어갈 수 있는 부분에서 누군가는 진짜 자살을 생각하게 된다. 요즘은 이러한 상황을 방지하고자 '극단적 선택'이란 단어가 들어간 기사의 끝엔 자살예방에 관련된 시설과 전화번호가 기사에 첨부되어 있지만, 죽을 생각은 하면서 전화 걸 용기는 차마 나지 않는 게 현실이다. 현실의 벽은 '자살'을 인정하면서도 읽는 사람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시스템과 자극을 줄일 수 있는 단어, 혹은 인식의 변화의 부재인 것이다.


변화는 하나씩

 누군가 내게 "그래서 어떻게 표현하라고요?"라고 묻는다면 나는 솔직하게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답할 것이다. 일부에선 '스스로 삶을 포기했다'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는데 '삶을 포기했다'가 맞는지도 모르겠다. 가장 좋은 것은 '자살'이라고 똑바로 말할 수 있는 일이겠지만, 지금의 인식으로 '자살'을 똑바로 얘기하는 것은 오히려 역효과가 아닐까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자살'을 똑바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인식이 첫 번째이지 않을까.

 변화는 하나씩이라고 생각한다.  글에서도 '자살'이란 단어를 피하지 않은 것은 '최소한  글에서 만큼은 똑바로 직면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자살이란 표현에 관해 다시 생각하고 인식 개선의 필요성을 조금이라도 발견할  있다면, 그걸로 괜찮다.  하나씩. 하나가 모여 여럿이 되고 여럿이 모여 전체가 된다. 만약,  글을 읽고 흔들리는 마음을 품고 있다면 약간의 용기로 아래 연락을 해보거나 도움을 받아봤으면 좋겠다. 당신의   움직임이 세상이 되지 않을까.


※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이 있거나 주변에 이런 어려움을 겪는 가족ㆍ지인이 있을 경우 자살예방 상담전화 ☎1393, 정신건강 상담전화 ☎1577-0199, 희망의 전화 ☎129, 생명의 전화 ☎1588-9191, 청소년 전화 ☎1388, 청소년 모바일 상담 ‘다 들어줄 개’ 어플, 카카오톡 등에서 24시간 전문가의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각종 기고 및 제안을 받고 있습니다.


작가 이수연

*<조금 우울하지만, 보통 사람입니다>(다산북스)

*<슬픔은 병일지도 몰라>(반니) 저자

* 독립출판 소설 <자화상>(단편소설집 RED) 제작 및 저자

*<번개탄에 고기를 구워 먹었다>(소울 하우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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