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당신의 마음은 진실입니다
삶은 죽음을 향한 끊임없는 접근이다.
-레프 톨스토이-
자살을 겪다
인간은 젊든 늙든 죽는다.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두려움에 살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그래서 내가 살기 힘든가?). 대부분은 죽는다는 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마음으로 알지 못하며 살아간다. 자신에게 노후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늙어서 자연스럽게 생을 마감할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은 다르다. 자신이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는 걸 안다. 그것이 오늘일지라도.
나는 죽을 수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이다.
죽음을 가장 가까이서 본 것은 스물넷이었다. 당시 나는 이미 반 년 동안 폐쇄병동에 입원을 경험한 상태였고 퇴원 후 다시 석 달 동안 폐쇄병동에서 지냈다. 주치의는 이렇게는 안 되겠다며 나를 대학병원으로 보내 ECT(전기경련치료) 치료를 받도록 했다. 사건은 그날 일어났다. 전원(병원을 옮김)을 앞두고 딱 이틀간 퇴원 상태에 있었는데 그때 시도를 한 것이다.
이전까지 엄청난 이력이 있었던 터일까. 나는 진짜 죽을 뻔했다. 번쩍! 하고 눈을 떴는데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냥 실신했다 깨어나는 것처럼 서서히 정신이 들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주변을 둘러보는데 방에 행거가 무너져내려 있었다. 행거가 왜? 목에는 끈이 묶여있었다. 서둘러 끈을 풀고 거울 앞에 섰다. 충격적인 모습이었다. 끈이 묶여있던 목부터 머리끝까지 까맣게 색이 변했다. 핏줄이 터져 온 얼굴에 멍이 든 것이다.
딱히 엄청 힘들었던 하루도 아니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기억이 안 난다. 내가 무슨 행동을 했는지 모르겠다. 대충 상상은 할 수 있지만, 그 행동을 하기 전에 무슨 마음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병원에서는 충격에 의한 기억상실이랬다. 그리고 그대로 아주 조금, 조금이라도 더 있었다면 죽었을 거라 했다. 그때 생각했다. 자살이란 선택이 맞는가? 나는 아무 기억도 없는데?
어디서부터 자살시도일까
앞으로 함께 풀어야 할 문항에 답을 하기 위해, 먼저 문제를 내고 싶다. 자살시도란 무엇인가? 어디서부터 자살시도라 할 수 있는가? 아래 보기 문항 중 자살시도라 생각되는 상황의 개수는 무엇인지 풀어보면서 알아보자(갑자기 문제를 냈지만 당황하지 마시길).
[보기]
1. 죽고 싶다는 생각에 번개탄을 샀다.
2. 죽고 싶지는 않다는 말과 함께 약을 과다복용했다.
3. 자해를 한 뒤 병원에 갔다. 의사가 "죽고 싶었나요?"라고 물었는데 "그냥요."라고 답했다.
4. 가까운 사람이 스트레스를 주자 창문으로 뛰어내리려 했다.
조금 극단적으로 보일지 모르는 4가지 문항이지만, 모두 내가 겪거나 주변사람이 겪은 내용이다. 이 중 자살시도에 해당하는 것은 몇 개일까? 눈치가 빠른 사람은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고 있을 것이다. 1번은 명확하게 자살시도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나머지는? 모두 자살시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자살'은 자살행위로 인하여 죽음을 초래하는 경우이고, 자살행동이란 죽음의 의도와 동기를 인식하면서 자신에게 손상을 입히는 행위로 정의되기 때문이다.
이제 문제 풀이를 보자.
[문제 풀이]
1. 죽고자 하는 의도가 명백하며 행동까지 이어졌다.
2. 자살에 대해 언급하는 경우 자살 의도가 없다고 인식되지만, 실제로 자살시도를 하는 경우가 많다. 약물 과다복용은 자신에게 손상을 입히는 행위이며 은연중에 죽음을 의도했을 가능성이 있다.
3. 반드시 죽을 의도가 있어야만 자살행동을 하는 것은 아니다. 양가감정, 보이기 위한 의도로 행동하는 것도 자살시도로 볼 수 있다. 자해 역시 자신에게 손상을 입히는 행위이며 양가감정을 가진 대답을 했다.
4. 자신의 스트레스를 표현하기 위한 수단(보이기 위한 의도)으로 자살행동을 했다.
*국가정신건강서비스포털 의학정보_자살에 관한 진실과 허구 참조
다 읽고나면 어디서부터 자살시도에 해당하고 어디까지가 자살시도로 보지 않는지 애매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렇다. 폭넓게 자살시도는 자신을 손상시키는 행위로 볼 수 있지만, 진짜 답은 그 행동을 한 본인의 마음속에 있다. 죽음을 아주 조금이라도 염두하며 행동했는지, 아닌지. 피하고 싶어서 죽을 수도 있고, 인정받고 싶어 죽을 수도 있다. 죽는다는 것에 수많은 감정이 들어간다. 그리고 그 행동은 자신이 인식하지 못하는 순간 불쑥 튀어나오기도 한다. 내가 그 날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이것까지 자살시도인가?'라는 생각이 드는 어떤 분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분은 정신과 폐쇄병동에서 만난 사람이었다. 그곳에서는 자신이 어떻게, 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는지 묻고 답하는 게 일상이었다. 들어오면 먼저 "어쩌다 왔어요?"가 인사인 것이다. 그런데 한 분이 이렇게 답했다.
"죽으면 사후 세계가 있는지 궁금해서 옥상에서 뛰어내리려다 잡혀왔어요."
대부분 가슴 절절한 스토리가 나오기 마련인데, 사후세계가 궁금해서 죽으려 했다고. 그분은 가족의 권유로 정신과 병원에, 그것도 폐쇄병동행으로 결정 났다. 그때는 과연 그런 궁금증을 자살시도로 볼 수 있는지 의문을 가졌다. 하지만 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이 또한 자살시도였다. 죽음에 관한 의도가 있으니까. 그 속에 어떤 마음이 있는지는 아마 자신만이 알고 있었겠지.
나 역시 자살시도로 처음 폐쇄병동에 들어갔다. 그런데 나는 몸에 생채기 하나 없었다. 자해는커녕 생각만 마음을 먹었고, 하루만 미뤄보자는 생각으로 병원에 찾았다가 바로 입원이 결정됐다. 그때는 '고작 생각 정도로 입원을 한다고?'라고 느꼈지만, 주치의의 결정은 틀리지 않았다. 행동을 하지 않았어도 자살을 염두하며 준비하는 것 또한 자살시도였다.
처음 폐쇄병동에 입원한 나는 의아했다. 이전에도 정신과 진료를 받았고 나는 똑같이 "죽고 싶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때 의사는 "별 거 아니다.", "진짜 죽고 싶은 게 아니다."라고 했다. 주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죽고 싶다는 말을 달고 살았지만, 모두 내가 살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병원에 입원하고 난 뒤에야 "그 정도였어?"라고 물어왔다. 아니!! 내가 계속 말했잖아!!!
결국, 사람들은 내가 죽을 뻔하자 나를 받아들였다. 주치의의 날쌘 판단에도 나는 자살시도를 했고 죽음을 코앞까지 두고 돌아왔다. 그게 앞서 말한 죽음을 가장 가까이 본 날이었다. 이후 "그래도 살아있을 거잖아."라는 말을 들을 때 이 사건을 얘기하면 누구나 빼도 박도 못하고 내 진심을 인정했다.
당신의 아픔은 사실이다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우리가 인식하는 '자살시도'가 '얼마나 치명적인가'로 고통의 크기가 결정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치명적인 자살시도를 하는 사람은 진짜 죽고자 하며 정말 괴로운 사람이라 보이고, 치명도가 낮은 자살시도는 '실은 죽을 생각이 없는 것', '아직은 괜찮은 것'으로 보인다. 그건 전혀 괜찮은 일이 아닌데도. 자신의 고통을 알아주지 않는 사람들 속에서 자살시도는 점점 치명적으로 바뀌어간다. 치명적이어야만, 증명되는 것처럼 보이니까.
나만 해도 그렇다. 사람들은 내가 입원을 겪고 진짜 죽을 뻔한 이후에야 내가 진짜 죽음을 생각하고 있다는 걸 믿어주었다. 그 이전에도 그 당시에도 내 마음은 똑같이 힘들고 괴로웠는데, 이 사건 이후 사람들의 태도가 바뀌었다. 마치 내가 나를 해치며 아픔을 증명해야 한다는 것처럼.
선택할 수조차 없는 상황이 왔을 때는 늦다.
자신을 해치기 전에, 상처 내기 전에,
자신의 마음을 인정할 수 있게 함께 하는 사람 또한 인정해주어야 한다.
치명적 행동과 자살시도 경험이 있는 사람은 '자살 고위험군'으로 분류된다. 자살 고위험군을 상대로 자살예방 정책이 많이 나오고 있는 요즘, 한편으로 생각한다. 자살 고위험군에 닿기 전, 서로의 마음을 알아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죽고 싶다는 말을 쉽게 넘기지 않고 그 말을 꺼내기 전에 마음을 볼 수 있다면, '자살'이라는 생각까지 닿기 전에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아픔을 증명하지 않아도 알아줄 수 있다면. 그들의 말을 진심이라 믿어준다면.
지금 당신은 누구보다 충분히 아프고 힘들다.
어느 누구도 비교할 수 없고, 당신이 느끼는 감정이 진실이다.
당신의 아픔을 인정한다.
그러니까 이제 우리는 그 안에서 함께 살아남을 것이다.
자살 충동 매뉴얼 #1 _마음을 인정하기.
*현 자살예방을 직시하는 의미에서 자살을 '극단적 선택'이라 표현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표기하였습니다.
*새 연재물로 매주 토요일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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