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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남겨준 아름다운 정서

오디오북이 불러낸 기억 한 조각

by 꽃하늘

하루는 24시간.

그중 깨어 있는 시간 동안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은

밤 12시 전까지 해봐야 두 시간,

평균적으로는 한 시간 남짓이다.


그 시간만큼은

식탁 위 작은 스탠드를 켜고

나만의 시간을 갖는다.

글씨를 쓰고, 책을 읽고,

음악을 듣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앉아 있기도 한다.


하루 일과를 마치면

따뜻한 바닥에 그대로 눕고 싶지만

습관처럼 식탁 위,

내 펜들이 놓여 있는 자리에 먼저 앉게 된다.


낮에는 일터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저녁에는

식사 준비와 집안일이 이어진다.


아마 하루 중 설거지하는 시간이

내가 갖고 싶은 ‘나만의 시간’보다

더 길 것이다.


며칠 전엔

다른 날보다 유독 몸이 피곤해서

매일 하는 설거지가

그날따라 조금 버거웠다.


그런데 마치

그 마음을 알아챈 듯,

누군가 내 옆에 와 있는 착각이 들었다.

오디오북으로

박완서 작가의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를

듣고 있던 순간이었다.


나는 다섯 살,

아마 여섯 살쯤이었을까.

할머니가 화장실에서 나오기만을

쪼그리고 앉아 기다리던

그 장면이 또렷하게 기억난다.


그 작은 아이가

할머니를 따라 화장실 문 앞까지 따라갔다면

할머니가 나에게

얼마나 많은 사랑을 쏟아주었는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박완서 작가가 손자와 함께 이마를 부딪히고

민들레꽃 내음을 맡으며

손자에게 건네는 글을 듣는데,

마치 우리 할머니가

나에게 미처 하지 못한 말을

대신 전해주는 것만 같았다.


손자야, 너는 애써 그것을 기억할 필요는 없으리라.
손자야, 너는 이 할미가 너에게 쏟은 정성과 사랑을
갚아야 할 은공으로 새겨둘 필요가 없다.
어느 화창한 봄날 어떤 늙은 여자와 함께
단추만 한 민들레꽃 내음을 맡은 일을
기억하고 있을 필요도 없다.
......
나는 손자에게 쏟은 나의 사랑과 정성이 갚아야 될 은공으로
기억되기보다는 아름다운 정서로 남아 있길 바랄 뿐이다.

박완서,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중에서 발췌.

할머니의 아주 큰 손녀 사랑은

내 마음속 ‘아름다운 정서’가 되어

지친 하루를 넘어

다시 살아갈 힘을 건네준다.


그날,

나는 그렇게

매일 숙제처럼 여겨지는 설거지를

조용히, 그리고 무사히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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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_5189.JPG 25년 10월 어느 멋진 가을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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