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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놀쓴 Nov 20. 2021

보이지 않게 조금씩 쌓여가고 있는 거야

  몇 년 전쯤엔가 지나가는 사람들 누구나 피아노를 칠 수 있도록 야외 곳곳에 피아노가 놓였던 적이 있었다. 공원 같은 데라던지 지하철 역사 안이었던지, 요새는 많이 없어졌지만. 나는 지나다니면서 듣는 그 피아노 소리가 참 좋았고, 나도 피아노를 저렇게 잘 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가시지 않아 피아노 학원이랑 레슨비를 알아보기도 했다.


  하지만 늘 그렇듯, 돈과 시간이 문제였다. 취준 때는 취업하고 나서 해야지라고 미뤘고, 시험 준비할 때는 시험 끝나고 나서 해야지라며 미뤘다. 그렇게 계속 시간이 없으니까, 돈이 없으니까 하면서 계속 미루기만 했다. 그렇게 결국 피아노를 배우지 못하고 몇 년의 세월이 흘렀으나, 나는 마음 한편에서 계속 피아노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어느 날 엄마가 거실 한편에 놓인 물건들만 잔뜩 올려진 오래된 피아노를 팔겠다고 했다. 그때였다. 지금 피아노를 한번 해보자고. '내가 피아노 칠 거니까 저 피아노 절대 팔지 말라'고 엄마한테 신신당부했다. 바로 집 근처 실용음악 학원 성인 취미 피아노 레슨을 등록하고, 매주 월요일 저녁 퇴근하고 학원에 가서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나는 초등학교 때 체르니 100번을 조금 치다 관둔 이후로 한 번도 피아노를 쳐 본 적이 없었다. 그 말인즉슨, 완전 기초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래도 이제야 피아노를 배울 수 있다는 생각에 후련함과 뿌듯함이 교차했다.


  그렇게 하고 싶어 하던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으니, '행복하고 너무 좋다.'라고 말할 수 있으면 참 좋으련만..  처음 몇 달간은 피아노 칠 때마다 그냥 때려치우고 싶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음표부터 계이름 보는 것도 어렵고 가요 반주칠 때 필요한 코드 잡는 법도 너무 어려웠다. 거기다 박자 맞추는 건 왜 이렇게 또 어려운 건지, 내가 이렇게 박치라는 걸 처음 알았다. 하면할 수록 실력이 느는 느낌이 들어야 재미도 있고 열심히 할 텐데, 실력은 안 늘고 계속 어렵기만 하니 재미도 없고 하기 싫어졌다.


  문득 복싱을 처음 시작했을 때가 생각이 났다. 분명 매일매일 꾸준히 같은 시간에 하고 있는데, 실력이 차곡차곡 늘어가는 느낌이 아니었다. 1만큼 노력해서 1만큼 실력이 쌓이고 또 1만큼 더 노력해서 실력이 2가 되고 3이 되는 게 아니라, 노력은 2,3,4로 계속하는데 실력은 1에 머물러 있는 느낌이었다. 그러다 한 4~5개월 차쯤 되었을 때 갑자기 실력이 확 점프한 느낌이 들었다. 계속 레벨 1,2에 있다가 갑자기 레벨 7로 급상승한 것 같달까. 그때부터 실력도 체력도 확 좋아진 게 느껴졌고 운동하는 게 너무 재미있었다.  


  그러고 보니 복싱을 처음 하는 사람들한테 난 항상 이렇게 말했었다. 처음에는 빨리 잘하고 싶은 욕심에 과하게 노력하고, 안되니까 좌절하고 포기하게 된다고. 잘하려고 하는 욕심을 버리고, 되든 안되든 그냥 하시라고. 잘 안 되는 것 같아도 그냥 꾸준히 하시라고.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분명히 저절로 되는 순간이 온다고. 그때부터 재밌다고 느껴진다고. 그러면 누가 하지 말래도 하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아진다고. 피곤하고 귀찮은 날에도 계속 운동을 하게 된다고.


  피아노를 너무 빨리 잘하고 싶은 욕심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던 거였다. 빨리 잘하고 싶다는 생각보다, 그냥 되든 안되든 꾸준히 계속하자는 생각으로 피아노를 쳤다. 그리고 피아노를 전공하고 계속 피아노 가르치는 일과 연주랑 작곡도 하는 선생님들은 얼마나 많은 시간을 피아노 연습에 투자를 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겨우 1주일에 한번 1시간 레슨을 받고, 평일에 한번, 주말에 한번 2~3시간씩 연습하는 게 전부였다. 1주일에 겨우 4~6시간 연습하면서 그런 사람들처럼 잘 치길 바랬다니 욕심이 과하긴 했다.


  그렇게 때려치우고 싶은 순간들을 이겨내면서 피아노를 친지 이제 거의 1년이 다되어간다. '이제는 좀 괜찮아졌다'라고 말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사실 아직도 때려치우고 싶을 때가 많다. 그래도 이제는 가끔 뿌듯할 때도 있다. 똑같은 곡을 수십 번을 치고 나서야 피아노 소리가 자연스럽고 예쁘게  들렸을 때, '그래 이 재미에 하는 거지'싶다. 그리고 운동이든 음악이든 내 몸, 내 감각에 익숙하게 새겨지는데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몇 달 쉬고 다시 시작하더라도, 금세 다시 할 수 있을 만큼. 복싱은 워낙 오랫동안 했으니 몇 달 쉬고 다시 해도 원래 실력으로 금방 돌아온다. 그러고 보면 새로운 운동을 배우는 것과 새로운 악기를 배운다는 것, 다르면서도 묘하게 비슷한 점이 있는 것 같다.


  무얼 하든 눈에 띄는 성과가 없을 때가 가장 힘들다. 아무리 열심히 뛰어도 계속 제자리인 느낌, 그걸 견뎌내야 했다. 실력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의심하지 말자. 실력은 보이지 않게 계속 쌓여가고 있다. 그 기간이 얼마나 걸리든 분명 월등히 실력이 쌓였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오겠지. 어쨌든 내 피아노 치는 실력은 시간이 좀 더 걸릴 것 같긴 하다.(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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