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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놀쓴 Jul 18. 2022

어디에 있든 늘 도망치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된다.

  대학, 대학원, 졸업 후 취업 준비, 고시 준비 등으로 대학 교내 도서관을 거의 10년 넘게 다녔다. 매년 계절 따라 바뀌는 비슷한 캠퍼스 풍경과 매년 새로 들어오는 비슷한 신입생들의 모습을 10년을 넘게 보면서 나는 늘 도서관 열람실 구석의 좌석 한 칸을 지키고 있었다. 언젠간 이 지긋지긋한 곳을 벗어날 꿈을 꾸면서.

  그 당시에는 끝이 보이지 않았던 도서관 죽순이 생활을 마무리하고 지금은 직장에 다니고 있다. 실제로 따져보면 '내가 있는 곳'이 바뀐 지 몇 년 되지도 않았는데 그때 생각을 했던 적도, 생각이 났던 적도 없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찬찬히 다시 회상해 보니 10년 동안 주말도 휴일도 없이 출퇴근하듯 했던 그 도서관 앞 풍경이 머릿속에 펼쳐진다. 중간고사가 끝난 어느 날 밤, 도서관 앞에 줄지어 있는 벚꽃나무가 반짝이며 하얀 벚꽃 잎들을 흩날리던 풍경, 이 큰 캠퍼스 안에 아무도 없는 듯 고요했던 그 순간, 드문드문 10년간 매일 같이 보았던 장면들이 스쳐 지나간다. 그리고 매일 도서관을 왔다 갔다 하며 "언제쯤 이 풍경을 보지 않을 수 있을까"꿈꿨던 그때의 마음까지도.

  그렇게 지긋지긋했던 대학 캠퍼스를 벗어나 한 직장을 다니고 있는 지금도 장소만 바뀌었지 사실 그때랑 별다를 게 없다. 직장인인 지금은 출근할 때 매일 같은 시간에 집에서 나온다. 매일 같은 시간에 오는 지하철을 타고, 매일 같은 칸의 지하철을 타고, 같은 출구로 나와서 가던 길로 길을 걸어간다. 같은 시간에 지하철을 타고 가니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매번 마주치게 되는 사람들도 여럿 있다. 어제도 여기서 이 시간에 봤던 사람들, 내일도 여기서 이 시간에 볼 사람들, 모레도 몇 달 뒤에도 마주칠 것이다. 아마 몇 년 뒤까지 그럴지도. 저 사람들도 나도 한 달 전이랑 한 달하고 하루 전이랑 비교해도 아마 다른 점을 하나도 찾지 못할 정도로 하루하루가 복사해 놓은 것 마냥 똑같을 것이다.

  요즘 나의 일상을 한 단어로 표현하면 매우 "평화롭다"이다. 그리고 그 뒤에 겹쳐있는 한 단어는 바로 "지겹다"이다. 많지도 적지도 않은 월급이 나오고, 돈도 그럭저럭 모아가고 있고, 좋아하는 취미생활들도 꾸준히 하고 있고, 특별히 아픈데도 없고, 크게 스트레스받을 일도 없다. 규칙적인 생활로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면서 살고 있다. 감사하다고 땅에 고개 주어 박고 몇 백 번 큰절해도 모자랄 판이다.


  얼마 전에 친구와 통화를 하다가 나도 모르게 뱉은 말이 있다. "나 그냥 다 버리고 도망치고 싶어."라고. 갑자기 튀어나온 말이 아니라 사실 늘 마음에 품고 있었던 말인 것 같다. 나는 가 꽤 자유롭게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런 척하려고 애썼던 거 같다. 세상이 시키는 대로 살지 않겠다면서 시키는 대로 살고 있는 게 많았던 내 모습을 발견하고 문득 충격을 받을 때도 있었다. 하고 싶지 않은데 억지로 해야만 하는 일들이 너무 많았다. 내 모습은 오른쪽 발목, 왼쪽 발목, 오른쪽 손목이 다 묶여있는 채로 겨우 왼손과 머리만 스스로 까닥까닥 움직이고 있는 로봇 같았다. 이게 아닌데..... 나는 신나서 여기저기 폴짝폴짝 자유롭게 뛰어다니고 싶었는데.......

  힘든 일들이 한꺼번에 물밀듯이 밀려오는 때가 또 오게 되면, 지금의 평화로운 일상을 갈망하게 될 것이란 걸 너무나 잘 안다. "지겹다. 도망치고 싶다"라는 대사는 몇 년 전 도서관 죽순이 시절에도 내가 자주 뱉었던 대사였다. 나는 그 오래전 대사를 다시 또 반복하고 있는 중이다. 힘들고 불안할 때는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걸 꿈꿨고,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지금은 위험하더라도 신나게 뛰어놀고 싶다는 꿈을 꾼다. 여기에 있어도 저기에 있어도 늘 도망칠 꿈을 꾸었던 것 같다. 여기 말고 다른 세계로 가고 싶다고. 저기 말고 쪼~기도 가고 싶다고. 그 어딜 가도 또 도망치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되는 건 아닐까. 그냥 아무 데도 아닌 곳에서 아무것도 아닌 채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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