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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놀쓴 Mar 07. 2020

왜 자꾸 나한테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 같지?


  처음 하는 회사생활에 걱정했던 것보단 나름 잘 적응해가고 있는 것 같다. 그렇지만 일을 하다가 문득 내가 굉장히 어색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나를 ‘노무사님’이라고 부르는 말을 들을 때다. 들을 때마다 마치 나에게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해진다. 과외할 때 ‘선생님’이란 호칭을 들을 때도 그랬다. 대학생 때부터 해서 수십 명을 가르쳤으니 선생님이란 호칭을 들을 때가 훨씬 많았다. 몇 년을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고 들을 때마다 낯간지러웠던 것이 바로 이 호칭이었다. 선생님이란 단어는 사명을 갖고 누군가를 가르칠만한 사람을 지칭하는 이미지인데 나는 스스로 난 누구를 가르칠 만한 사람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직업은 나를 표현할 수 있는 수많은 단어 중 한 가지 일뿐.


  여러 모임들을 나가면서 다들 다른 사람들에게 얕은 관심만을 보인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이, 직업, 학벌과 같은 겨우 단어 몇 개로 알기 쉬운 것들에만 관심을 보였다. 어떤 사람에 대해 직업을 먼저 알게 되면 선입견이 생겨버린다. 마치 누가 ‘인생의 정석’을 가장 잘 따라갔는지 서로 비교하는 자리가 되는 느낌이랄까. 관심을 받는다는 건 설레는 일이지만 이런 수박 겉핥기 식 얕은 관심은 받고 싶지 않다. 물론 다들 대부분의 시간을 일을 하고 보내기 때문에 직업이란 한 사람의 일상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긴 한다. 하지만 겨우 직업 한 가지로 그 사람을 너무 많이 판단해버리게 된다는 건 참 슬픈 일이다.

    

  나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내 직업을 얘기하고 싶지도 않고, 다른 사람의 직업을 알고 싶지도 않다. 직업은 나를 표현할 수 있는 수많은 단어 중 한 가지일 뿐이지 내가 아니다. 그리고 직업은 언제든 바뀔 수 있다. 나는 그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무엇에 왜 관심 있는지가 더 궁금하다. 한 번이라도 마음을 열고 진솔한 대화를 나눈 사람과 더 가까워지고 싶단 마음이 든다. 직업 같은 건 그 이후에 알아도 충분하다.


가끔은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고 싶다.


  작년에 갔던 여행에서 인천공항을 떠나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은 뉴욕이었다. 뉴욕에서 딱히 뭔가를 보고 싶다거나 하고 싶다는 건 없었다. 그저 뉴욕에 대한 막연한 동경만 있을 뿐이었다. 영화에서나 보던 뉴욕의 명소와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나는 이 곳에 나 혼자 둥둥 떠다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워낙 다양한 인종이 살고 바쁘게 돌아가는 뉴욕 거리에서 혼자 돌아다니는 동양인 여자는 눈길조차 가지 않는 존재였다. 그곳에서 나는 정말 말 그대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었다. 나는 그곳에 있었지만 그곳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인 것 같았다. 그렇다고 우울하거나 외롭거나 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둥둥 떠다니는 듯한 그 묘한 느낌이 좋았다. 내가 잠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조금은 신비한 느낌이. 현실에서 나에게 주어진 불편한 옷을 억지로 입을 필요가 없는 건 오로지 여행에서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여행 중의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니 내가 입고 싶은 옷만 입을 수 있었다.




  노무사님이란 호칭은 너무 권위적으로 느껴졌다. 단지 전문자격 사라는 이유로 내가 하는 말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부담스러웠다. 그런 호칭은 전문가라는 사람도 틀릴 때도 있다는 걸, 전문 분야라고 다 잘 아는 건 아니라는 걸 잊어버리게 만든다. 스스로 나와 어울리지 않는 옷이라 생각하니 계속 불편하고 도망가고만 싶어 졌다. 누군가를 부르는 호칭은 그 호칭에 맞는 행동을 하게 만드는 묘한 그런 게 있다. 직업적 호칭을 들을 때면 떠오르는 대표적 이미지 속에 자신을 가두는 느낌이 든다. 이 호칭이 시간이 더 지나면 익숙해질지도 모르지만, 익숙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직업을 위해 입은 옷이 본인에게 꼭 맞게 너무 편안하고 잘 어울리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지금의 불편한 옷을 얼마나 더 입고 있어야 할지, 나중에는 편해질지 지금은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그저 맑은 날도 있고 흐린 날도 있는 것처럼, 불편한 옷을 입어야 할 때도 있고 편한 옷을 입을 때도 있다고 단순하게 생각해야겠다. 중요한 건 내가 스스로 나를 특정한 옷 속에만 가두지 않으면 되는 걸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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