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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이나 Jul 10. 2020

근초고왕의 평양성 공격으로 외워보는 한자 發(필 발)

한국사 편(삼국시대)

※삼국의 건국과 멸망 순서에 존재하는 법칙

 보통 삼국 시대를 얘기할 때 ‘가나다’ 순서에 따라 고구려, 백제, 신라 순으로 나라 명을 부르다 보니 건국 순서도 고구려, 백제, 신라 순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알고 보면 삼국은 신라(기원전 57년 박혁거세), 고구려(기원전 37년 주몽), 백제(기원전 18년 온조) 순으로 건국되었습니다.

 또한, 삼국의 멸망 순서는 백제(서기 660년), 고구려(서기 668년), 신라(서기 935년) 순으로 건국 순서의 반대이기에 건국과 멸망은 서로 반대 개념이라는 점을 떠올리며 기억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5)백제 근초고왕의 평양성 공격(371년)


 백제는 삼국 중 가장 늦게 건국되었지만 가장 먼저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그 중심에는 백제의 13대 임금인 근초고왕이 있었습니다. 


 근초고왕은 바다를 접한 백제의 이점을 살려 활발한 해상 교류를 펼쳤습니다. 우선 주변 국가들의 발전된 문화와 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뛰어난 백제의 문명을 주변 국가들에 퍼뜨리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세계무대로 나아갈 힘을 비축한 백제는 먼저 주변에 있던 작은 나라들을 하나씩 굴복시켰습니다. 남쪽으로 영산강을 넘어 마한의 여러 나라와 고을들을 차지해 사실상 마한을 거의 멸망시켰고, 낙동강 유역에 자리한 가야를 백제의 영향권 안에 두는 등 한반도의 남쪽을 장악했습니다.


 이처럼 백제가 한반도에서 한창 위세를 떨칠 무렵 고구려와 국경이 접해있던 중국의 '전연'이 고구려를 침략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당시 중국은 여러 나라로 갈려 서로 다투던 '5호 16국'이라는 혼란기를 겪고 있었는데, 고구려가 이런 혼란을 틈타 호시탐탐 중국 대륙으로의 진출을 노렸기 때문입니다.


 고구려의 위기는 백제에게 절호의 기회가 되었습니다. 고구려가 전연을 막아내느라 북쪽 전선에 온 신경을 쓰는 사이 백제 견제에 소홀해진 탓입니다.


 백제 근초고왕의 평양성 공격은 4세기부터 시작된 고구려, 백제, 신라 세 나라 간의 패권다툼에서 백제가 제일 먼저 우위를 점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사실 '부여' 태생이라는 공통점을 가진 백제와 고구려가 서로 대립하게 된 까닭은 고구려의 침략이 먼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근초고왕이 평양성을 공격하기 2년 전인 369년에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전연의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서 2만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백제의 치양성을 먼저 공격하고 만 것입니다.


 하지만 고구려의 침공은 실패로 돌아갔고 그 과정에서 고구려와의 전쟁에 대한 자신감을 얻은 근초고왕은 2년 후인 371년에 직접 3만 명의 정예병을 이끌고 복수를 위해 평양성으로 향하게 됩니다. 훗날 아버지의 뒤를 이어 근구수왕이 되는 태자 수까지 함께 고구려 침략 전쟁에 참여한 것으로 미루어볼 때 근초고왕이 정복전쟁에 얼마나 공을 들였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근초고왕의 정복자 기질은 이후 그 아들에게 고스란히 이어져 근구수왕 3년(377년)에 백제는 또다시 고구려의 평양성을 침공하게 됩니다.


 비록 백제는 이 전쟁을 통해 고구려와 등지게 되었지만, 을 쏴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고 몽둥이찜질하듯 고구려에 심각한 타격을 입혀 영토를 빼앗는 성과를 거둡니다. 이 전쟁으로 백제의 영토는 한반도의 곡창지대인 황해도 일부까지 확장되었습니다. 백제가 한반도에서 당당히 어깨를  수 있을 만큼 강국으로 전하게 된 것입니다.


 한반도 내에서 마한과 가야, 고구려 등과의 전쟁을 통해 백제의 힘을 확인한 근초고왕은 이후 해외로 눈을 돌렸습니다. 비록 고구려에 가로막혀 대륙 진출에는 한계가 있었지만, 서쪽으로 중국의 동진, 남쪽으로 왜의 규수 등 바다 건너 수많은 나라들과 활발한 교류를 펼쳤습니다. 동시에 근초고왕은 신라와 왜, 동진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국제적인 지위를 확립했습니다.


 백제의 학자인 아직기와 왕인이 일본으로 가 일본 태자의 스승이 되어 ‘천자문’과 ‘논어’ 등 유학을 전파했습니다. 일본의 국보인 ‘칠지도’ 또한 근초고왕 때 일본에 하사한 유물이라는 학설이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습니다.


 강력한 정복 군주로서 백제 최대의 영토를 차지했던 근초고왕은 나라 밖 영토 확장뿐만 아니라 국가의 내실을 다지는데도 힘을 썼습니다. 우선 이전까지 형제 사이에 주고받던 왕위를 최초로 부자간에 물려줄 수 있도록 만들었고 왕비족을 축소해 왕권 강화를 꾀했습니다. 지방관을 파견해 체계적으로 지방조직을 관리하고 박사 고흥을 통해 ‘서기’라는 백제의 역사책을 펴냈습니다. 이렇듯 근초고왕이 싹 틔운 문화의 새싹은 후대로 이어져 찬란한 백제 문화를 꽃피웠습니다.


 뛰어난 정복 군주임과 동시에, 정치 · 경제 · 문화의 발전도 놓치지 않았던 근초고왕 덕분에 백제는 한반도의 세 나라 중 가장 먼저 전성기를 맞이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근초고왕 때 최고조에 달했던 백제의 전성기는 평양성 공격 이후 20여 년 만에 꺾이고 말았습니다. 고구려의 정복 군주 광개토대왕이 396년 백제의 58개 성을 점령하고, 아신왕의 항복을 받아내면서 고구려와 백제 사이의 관계가 뒤바뀐 것입니다.  그 결과 4세기 중엽 백제가 차지했던 한반도의 패권은 4세기 후반 고구려와 백제의 치열한 공방전을 거쳐 5세기에 이르러 고구려로 완전히 넘어가고 맙니다.



※앞으로 나올 한자를 익히는 법     

 앞서 나온 이야기를 요약한 문장 속에서 빨간 색깔로 표시된 글자를 순서대로 읽으면 우리가 배울 한자의 음과 훈이 됩니다. 문장 중간중간에 들어 있는 부속 한자들을 순서대로 모으면 우리가 배울 한자의 모습이 완성됩니다.     


>>‘백제 근초고왕의 평양성 공격’으로 외워보는 한자 : 發(필 발)

 비록 평양성 공격으로 고구려와 등지게(癶 등질 발) 되었지만, 활로(弓 활 궁)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고 몽둥이(殳 몽둥이 수) 찜질하듯 고구려에 타격을 입힌 덕분에 백제는 한반도에서 당당히 어깨를  수 있을 만큼 강국으로 전하게 되었다.

예시) 發展(발전), 發表(발표), 發生(발생), 發言(발언), 發意(발의)     



※칠지도

 일본의 이소노카미 신궁에 소장된 철제 칼로 1953년에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었습니다.

 칼의 좌우로 각각 3개씩 칼날이 나뭇가지 모양으로 뻗어 있어 '일곱 개의 가지를 가진 칼'이란 의미로 칠지도(七支刀)라고 부릅니다. 무기로서의 실용성보다는 제사의식 등에서 상징적인 용도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칠지도의 양면에는 글자 60여 자가 금상감 기법으로 새겨져 있지만 표면이 부식되어 일부 글자는 판독이 어렵습니다. 그렇다 보니 칠지도를 두고 한국과 일본의 역사학자들은 서로 다른 의견을 펼치고 있습니다.

 일본은 백제의 태자가 왜 나라 왕에게 바친 것이라며 칠지도를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했었다는 ‘임나일본부설’의 증거물이라 우기고 있지만 신빙성이 매우 낮은 주장에 불과합니다.

 한국에서는 근초고왕이 평양성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는 등 한반도의 강자로 군림했을 당시 왜 왕에게 준 하사품이라는 학설이 기정사실로 통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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