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편(삼국시대)
고구려 최고의 전성기를 이끌었고 삼국시대 속 제일 유명한 인물로도 손꼽히는 광개토 대왕(재위 391~412)은 18세의 어린 나이에 고구려의 19대 왕이 되었습니다. 당시 중국은 많은 나라가 생겼다가 무너지는 '5호 16국'의 혼란기였습니다. 광개토대왕은 이러한 시대상황을 놓치지 않고 정복군주로서의 원대한 포부를 펼치며 자신의 발로 고구려를 넘어 나머지 영토까지 모조리 밟을 것이라는 계획을 실천하기 위해 행동에 나섰습니다.
그는 우선 중국의 황제들이 사용하는 연호를 따르지 않고 독자적으로 ‘영락’이라는 연호를 사용하더니, 재위 첫해인 391년에 거란족 정벌에 나서며 위대한 정복자의 탄생을 세상에 알렸습니다. 이후 광개토대왕은 백제로 눈길을 돌려 394년 패수전투를 시작으로, 백제의 58개 성을 점령하고 백제 아신왕의 항복을 받아내 백제의 평양성 침공과 할아버지인 고국원왕 전사에 대한 굴욕적인 과거를 복수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한편 고구려가 드넓은 만주와 요동 땅을 정복해 나갈 무렵, 왜 나라가 신라를 침공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재기를 노리던 백제의 아신왕이 바다 건너 왜와 힘을 합쳐 고구려 대신 만만한 신라를 정복해서 한반도 남부 지역을 장악할 계획을 세웠던 것입니다. 당시 삼국 중 유일하게 고대 국가로 발전하지 못해 상대적으로 힘이 약했던 신라는 광개토 대왕에게 사신을 보내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평소 백제와 왜가 가까이 지내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던 광개토대왕은 신라의 파병 요청을 받아들여 낙동강 일대를 평정하기 위해 전쟁에 나섰습니다.
서기 400년, 한반도 남쪽의 낙동강 유역에서는 고구려군과 백제·왜 연합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그 결과 백제·왜 연합군은 막강한 전력의 고구려 군에 의해 섬멸되어 4세기 중엽부터 백제가 차지하고 있던 한반도의 패권이 5세기에 이르러 고구려로 완전히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고구려는 이 낙동강 전투를 통해 신라에서 왜를 몰아내 주면서 신라를 자신들의 세력권 안에 편입시킨 것은 물론, 왜병이 달아난 금관가야까지 정벌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금관가야는 쇠퇴의 길로 들어서게 됐고 대가야로 중심 세력이 바뀌더니 점차 힘이 약해져 훗날 신라에 완전히 흡수되고 말았습니다. 낙동강 전투 이후 신라는 고구려의 보호를 받으며 성장을 이어갔습니다. 박·석·김의 세 성씨가 번갈아가며 왕위에 오르던 풍습을 버리고 김 씨의 왕위 계승을 확립하는 등 서서히 국가 체제를 정비하는 데 힘을 쏟아 고구려, 백제와 같은 발전된 중앙 집권 국가의 모습을 갖출 수 있게 되었습니다.
18세에 왕위에 올라 413년에 사망하기까지 23년의 재위 기간 동안 광개토 대왕의 정복 사업은 멈출 줄을 몰랐습니다. 재위 첫해 거란 정벌을 시작으로 중국의 선비족이 세운 후연을 제압해 요동으로 진출하고, 만주와 연해주 지역의 숙신을 정복해 고구려에 병합했습니다. 410년에는 동부여와 동예를 차례대로 정복해 영토를 넓혔습니다. 고구려의 도읍이었던 국내성(중국 만주 집안현)에 세워진 광개토 대왕릉비에는 64곳의 성과 1400곳의 촌락을 정복한 그의 업적이 상세히 기록되어있습니다. 이로써 광개토 대왕은 북쪽으로는 옛 부여, 동쪽으로는 책성, 남쪽으로는 소해(한강 유역), 서쪽으로는 요하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차지해 고구려를 명실상부한 동북아시아의 최강자로 성장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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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발로(足 발 족) 고구려를 넘어 나머지(戔 나머지 잔) 영토까지 모조리 밟을 것이란 원대한 계획을 실천하고자 정복 전쟁에 나선 광개토대왕.
예시) 實踐(실천)
창과(戈 창 과) 창이(戈 창 과) 난무하는 전투에서 살아 돌아온 나머지 잔병들로 더욱 강력한 군대를 만들었다.
연호란 새로운 왕이 왕위에 올랐을 때 자신이 다스리기 시작한 해에 붙인 이름을 뜻합니다. 광개토대왕 때 고구려가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다는 사실은 그만큼 동북아시아에서 고구려의 위상이 높았음을 의미합니다.
광개토대왕이 ‘영원할 영(永)’ 자와 ‘즐거울 락(樂)’ 자를 써서 만든 ‘영락’이라는 연호에는 영원토록 백성을 즐겁고 평안하게 하겠다는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광개토 대왕릉비는 그의 아들 장수왕이 아버지의 업적을 널리 알리기 위해 414년에 고구려의 도읍이었던 국내성(중국 만주 집안현)에 세운 높이 6.39m, 너비 1.38~2m, 두께 1.35~1.46m의 거대한 비석입니다.
비석의 4면에는 1,775자의 한자가 가득히 새겨져 있는데, 그중 150자 정도가 훼손되어 아직도 판독되지 않고 있습니다.
일본은 이처럼 광개토 대왕릉비의 일부 글자가 판독되지 않는다는 점을 교묘히 이용해 자신들이 금관가야가 있던 김해 지역을 다스렸다며 ‘임나일본부설’이라는 황당한 주장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이 가야나 신라, 백제를 지배할 정도로 국력이 강했더라면 더 뛰어난 철제 무기를 사용했을 텐데, 정작 일본은 세 나라보다 무려 백 년이나 늦게 철을 사용했을 정도로 낙후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가야, 신라, 백제에는 일본 문화에서 비롯된 유적이나 유물이 남아있지 않은 반면, 일본에는 삼국의 영향을 받은 문화재가 많이 존재합니다. 이런 사실들을 미루어 보더라도 일본의 말도 안 되는 주장은 설득력을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광개토 대왕릉비에는 고구려가 중국의 영향 아래 있는 하찮은 나라가 아닌, 동북아시아의 최강대국으로서 천하의 중심에 있다는 자신감이 담겨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