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편(삼국시대)
백제는 4세기 중후반까지만 해도 삼국 중에서 가장 강한 나라였지만, 고구려의 광개토 대왕이 등장한 이후부터 쇠퇴기로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광개토 대왕의 뒤를 이어 20대 임금이 된 장수왕(재위 413~491)은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 고구려의 영토를 남쪽까지 넓히기 위해 427년에 도읍(수도)을 평양으로 옮긴 뒤 백제와 신라를 침공했습니다. 이에 위기를 느낀 백제의 20대 임금 비유왕은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신라와 433년에 동맹을 맺었습니다. 바로 신‘라’와 백‘제’에서 한 글자씩 따와 이름 지은 ‘나제 동맹’입니다.
나제 동맹 탓에 영토 확장에 제동이 걸린 장수왕은 우선 백제부터 공략하기로 마음먹고 사전작업으로 백제의 왕실을 흔들어 놓기 위한 음모를 꾸몄습니다. 당시 백제는 21대 임금으로서 455년에 왕위에 오른 개로왕이 집권하고 있었는데, 그는 바둑에 완전히 심취된 인물이었습니다. 이를 노린 장수왕은 고구려에서 쫓겨난 것처럼 위장한 승려 도림을 개로왕에게 접근시켜 바둑으로 환심을 사도록 만들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개로왕은 국정을 살피기보단 도림과 바둑 두는 일에 몰두하게 되었고, 개로왕이 자신을 신임한다는 확신이 선 도림은 위엄이 서지 않는다며 궁궐을 더욱 크게 지으라고 부추겼습니다. 결국 도림의 입에 놀아난 개로왕 덕분에 창을 들어야 할 군사들마저 입 한번 뻥끗하지 못하고 궁궐 공사에 동원되다 보니 나라의 국력은 점점 약해져만 갔습니다.
무리한 궁궐 공사로 국력이 쇠약해져 고구려와 싸울 힘마저 잃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개로왕은 그 대책으로 중국 남북조 시대의 국가였던 북위에게 도움을 청하는 비밀 편지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그 편지는 북위의 거절로 고구려에 발각되었고 475년에 고구려가 백제를 침공하는 구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들이닥치는 고구려 군에 백제의 수도 한성은 삽시간에 함락되었고, 도주하던 개로왕은 결국 사로잡혀 아차산성으로 끌려가 처형당했습니다. 고구려로선 백 년 전 백제 근초고왕의 공격으로 고국원왕이 죽었던 일을 완벽하게 복수한 셈입니다.
장수왕의 한성 함락으로 백제는 한강 주변의 땅을 잃고 남쪽인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도읍을 옮겨야만 했습니다. 한강을 중심으로 나라를 발전시켜 온 백제에게 있어 장수왕의 공격은 너무나도 뼈저린 일격이었습니다. 이후 고구려는 481년에 신라마저 공격해 7개의 성을 빼앗았습니다. 장수왕의 남진 정책과 한강 유역 차지로 인해 백제의 국력은 기울기 시작했고, 신라는 이에 자극받아 조금씩 강력한 나라로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장수왕의 남진 정책으로 고구려는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흔히들 고구려의 영토가 광개토 대왕 때 최대였을 거라고 짐작하는데, 장수왕은 아버지인 광개토 대왕이 북쪽으로 확장해놓은 대 영토에 한반도 남쪽의 영토까지 보태 고구려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한 임금이었습니다. 그 당시의 고구려는 최대 영토를 차지했을 뿐만 아니라, 훌륭한 문화와 제도로 다른 나라들을 앞서 나갔습니다.
장수왕은 아버지 광개토 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광개토 대왕릉비'를 세웠고, 남하정책을 기념하기 위해 충청북도 충주에 '충주 고구려비(중원 고구려비)'를 세웠습니다.
※앞으로 나올 한자를 익히는 법
앞서 나온 이야기를 요약한 문장 속에서 빨간 색깔로 표시된 글자를 순서대로 읽으면 우리가 배울 한자의 음과 훈이 됩니다. 문장 중간중간에 들어 있는 부속 한자들을 순서대로 모으면 우리가 배울 한자의 모습이 완성됩니다.
승려 도림의 입(口 입 구)에 놀아난 개로왕 덕분에 창을(戈 창 과) 들어야 할 병사들마저 입(口 입 구) 한번(一 한 일) 뻥끗하지 못하고 공사에 동원되었으니 나라의 국력이 약해질 수밖에.
예시) 國力(국력), 國民(국민), 國際(국제), 外國(외국), 國語(국어)
※충주 고구려비(중원 고구려비)
한반도에 있는 유일한 고구려의 비석으로 장수왕 때 남하정책을 본격적으로 펼치면서 한반도 중부까지 영토를 확장한 뒤 현재의 충주 지역에 세운 비석입니다.
이 비석은 1979년에 발견되어 국보 제205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당시 비가 있던 장소가 충북 중원군이었기 때문에 예전엔 '중원 고구려비'라고 불렀는데, 현재는 중원군과 충주시가 합쳐졌으므로 '충주 고구려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교과서 등에서 더 많이 써온 이름인 '중원 고구려비'가 더 익숙한 편입니다.
충주 고구려비에는 원래 신라 땅이었던 남한강 지역이 고구려의 땅이 되었다는 내용이 담겨 있어 장수왕의 남진 정책이 성공리에 추진되었음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