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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이나 Jul 30. 2020

백제 동성왕 암살사건으로 외워보는 한자 推(밀 추)

한국사 편(삼국시대)

(8)백제 동성왕 암살되다(501년)


 힘 한 번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고구려 장수왕에게 수도 한성을 빼앗겨버린 백제는 도읍을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옮긴 뒤에도 대내적인 위험과 불안에 시달리며 좀처럼 안정을 되찾지 못했습니다. 전사한 개로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22대 문주왕(재위 475∼477)과 23대 삼근왕(재위 477~479)이 왕좌에 오른 지 3년 만에 암살 또는 의문의 죽음을 당한 사실만 보더라도 백제가 얼마나 혼란스러웠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어려운 시기에 백제의 왕이 된 24대 동성왕은 불안정한 현실을 극복하고 왕권 강화를 위해 힘씀으로써 ‘동성왕·무령왕·성왕’으로 이어지는 ‘백제 제2의 전성기’를 여는데 초석을 놓았습니다.


 왕위에 올랐을 당시 동성왕의 나이는 14세에 불과했습니다. 그 무렵 백제는 귀족을 대표하는 진 씨 세력과 왕위를 넘보는 병관좌평 해구 세력 사이의 권력다툼이 한창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해구 세력을 물리치고 실권을 장악한 진 씨 세력은 가장 만만해 보이는 동성왕을 자신들의 꼭두각시 임금으로 선택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들의 부귀영화를 위해 쉬운 길을 택했던 귀족들의 잔꾀는 예상치 못한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후대의 역사가들은 동성왕을 담력이 아주 크고 활쏘기에 능했던 왕이라고 평가합니다. 한성이 함락될 당시 일본으로 달아났던 탓에 백제 내에서 정치적 기반이 전무했던 동성왕이었지만, 어린 나이에 걸맞지 않게 왕권을 강화하고 백제를 일으킬 훌륭한 정책들을 어붙이는 진력을 발휘했습니다. 우선 내부적으로 귀족들의 힘을 억제하기 위해 웅진 지역 출신 신진 귀족들을 적극 등용해 구 귀족들과의 경쟁관계를 유지하는 한편, 외부적으로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신라와의 혼인 동맹을 맺어 외교역량을 강화했습니다. 이처럼 신라와의 동맹을 기초로 국방체제를 정비하고 정치적 혼란을 수습하는 데 성공한 동성왕 덕분에 무너져가던 백제는 서서히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동성왕의 눈부신 업적은 재위 말엽의 사치와 향락으로 퇴색되고 말았습니다. 동성왕은 왕실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 무리한 토목사업을 잇달아 벌이며 국력을 소진했는데, 그 무렵 백제에는 자연재해까지 잇달아 발생해 백성들의 원성이 하늘을 찔렀습니다. 신하들은 왕궁의 창고를 열어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자고 했으나 동성왕은 들으려 하지 않았고 급기야 2천여 명의 백성들이 고구려로 넘어가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동성왕은 대규모 토목사업과 거듭된 자연재해로 점차 민심을 잃어갔습니다.


 애석하게도 동성왕의 최후는 선대 국왕들의 비극적인 최후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501년, 동성왕은 새로운 개척지였던 사비 일대에서 빈번하게 사냥에 나서며 지역 기반을 다지기 위해 애쓰는 중이었습니다. 동성왕에게 있어 사냥은 단순한 유흥거리가 아니라 군사 통제권을 점검하고 강화하는데 활용되는 유용한 수단이었던 것입니다. 그해 11월, 사냥에 나섰다가 폭설을 만난 동성왕은 마포촌에서 하룻밤 묵게 되었습니다. 당시 동성왕은 신진 귀족 세력의 급성장을 경계해 그들을 변방으로 내몰곤 했었는데, 이에 불만을 품은 위사좌평 백가가 그곳으로 자객을 보냈습니다. 결국 자객의 칼에 찔려 큰 부상을 입은 동성왕은 한 달 만에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백가는 사실 동성왕이 구 귀족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직접 등용한 신진 귀족 중 한 명이었습니다. 이처럼 동성왕은 자신의 으로 직접 발굴하고 키워냈던 신진 귀족 세력에 의해 불행한 최후를 맞고 만 것입니다. 속된 말로 완전히 된 격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왕권 강화와 함께 백제의 옛 영광을 되살리려 했던 동성왕의 노력은 이후 25대 무령왕과 26대 성왕에게로 이어져 ‘백제 제2의 전성기’를 열 수 있는 토대가 되었습니다.      



※앞으로 나올 한자를 익히는 법     

 앞서 나온 이야기를 요약한 문장 속에서 빨간 색깔로 표시된 글자를 순서대로 읽으면 우리가 배울 한자의 음과 훈이 됩니다. 문장 중간중간에 들어 있는 부속 한자들을 순서대로 모으면 우리가 배울 한자의 모습이 완성됩니다.               


>>‘백제 동성왕의 암살’로 외워보는 한자 : 推(밀 추)

 동성왕이 훌륭한 정책들을 어붙여 진력을 발휘해봤자, 자신의 손으로(扌 손 수) 키워낸 신진 귀족들에게 암살당하고 말았으니, 끝에 가서 완전 새(隹 새 추) 된 격이라 하겠다.

예시) 推進(추진), 推薦(추천), 推定(추정), 推測(추측), 推理(추리)     



※무령왕은 동성왕의 형제일까? 아들일까?

 역사자료를 보다 보면 우리의 역사서 ‘삼국사기’에는 백제의 25대 임금인 무령왕이 24대 동성왕의 둘째 아들이라고 쓰여 있고, 또 일본의 역사서 ‘일본서기’에는 이복형제라고 쓰여 있어 헷갈리곤 합니다.


 충남 공주시 송산리에 위치한 ‘무령왕릉’의 주인으로도 유명한 무령왕은 당시의 왕치고는 다소 늦은 나이인 40세에 왕위에 올랐다고 합니다. 따라서 24대 동성왕이 479년에 즉위할 당시의 나이가 14세였고, 암살당한 501년의 나이가 36세일 테니, 그때 이미 40세인 무령왕은 정황상 동성왕의 이복형일 수밖에 없게 됩니다.      



※백제 제2의 전성기

 비록 동성왕은 왕권 강화와 백제 재건의 꿈을 못 다 이루고 최후를 맞았지만, 그가 마련해 놓은 국가 발전의 토대는 25대 무령왕과 26대 성왕에게로 이어져 ‘사비시대’로 대표되는 ‘백제 제2의 전성기’를 여는 든든한 기반이 되었습니다.


 왕이 된 후 백가의 반란을 진압한 25대 무령왕(재위 501~523)은 신진 귀족 중심의 정국운영이 실패로 돌아간 것을 거울삼아 신·구 귀족을 고루 등용하는 대신, 관등제도인 ‘좌평제’를 개편해 국왕을 정점으로 귀족들을 서열화시켰습니다. 또한, 지방 귀족들의 힘을 억제하기 위해 중요한 지방 지역 22곳에 왕족을 파견하여 직접 다스리게 하는 ‘22담로’라는 제도를 시행함으로써 왕의 명령이 지방까지 잘 전달될 수 있게 했습니다.


 동성왕 때 잃었던 민심을 되찾기 위해 흉년 때 나라의 창고를 열어 굶주린 백성들에게 식량을 나눠 주었고, 고구려와의 전투에서도 치열한 접전을 벌여 꺾여버린 백제의 자존심을 회복시켰습니다. 백제의 경제적 터전이었던 한강 유역 상실을 극복하기 위해 가야 지역으로 진출 낙동강 중상류와 섬진강 하구를 점령하였고, 저수지인 ‘벽골제’ 등의 수리시설을 확충해 금강 유역과 호남평야를 새로이 개발함으로써 국가의 경제적 기반을 튼튼히 다졌습니다.


 대외적으로는 일본뿐만 아니라 중국 남조의 세 번째 왕조인 양과 국교를 맺고 문물을 주고받았습니다. 1971년 공주(옛 웅진)에서 발견된 ‘무령왕릉’은 이처럼 백제가 중국(왕릉의 벽돌무덤 구조)과 일본(일본에서만 나는 금송으로 만든 관)의 문화를 받아들여 조화롭게 발전시켰다는 명백한 증거가 되고 있습니다.


 동성왕이 개척하고 공들여 기반을 다진 사비(지금의 부여)로의 천도는 26대 성왕(재위 523~554) 16년(538년)이 되어서 드디어 결실을 맺었습니다. 성왕은 무령왕의 뒤를 이어 제도와 문물을 더욱 발전시켜 ‘백제 제2의 전성기’를 완성시켰습니다.


 사실 기존의 도읍이던 웅진(지금의 공주)은 산맥과 강으로 둘러싸여 있어 수비에는 좋았지만 나라를 발전시키기에는 비좁다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반면 사비는 웅진보다 다른 나라를 공격하기에도 좋았고, 교통이 편리해 도시 확장 측면에서도 유리했기에 백제의 옛 영광을 재현하려는 성왕에게 새로운 도읍으로서 충분히 매력적이었습니다.


 부여에서 내려온 사람(주몽)들이 고구려를 세우고, 고구려에서 내려온 사람(온조)들이 백제를 세웠다는 역사적 사실 때문에 백제 사람들은 그동안 고구려를 부여와 한 뿌리를 가진 나라라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래서 성왕은 사비로 수도를 옮기면서 나라 이름을 ‘남부여’로 바꿔버렸습니다. 백제는 고구려의 후예가 아닌, 부여의 후예이기에 고구려와의 결전을 망설이지 말라는 뜻이 담겨 있었습니다. 또한, 나라의 제도를 새로 정비해 22부의 중앙관서가 정비되어 각각의 부서가 맡은 일을 직접 처리할 수 있도록 만들었고, 도읍을 5부로, 지방을 5방으로 나누어 위에서 내리는 명령이 지방에도 잘 전달될 수 있게 ‘5부 5방’이라는 행정 체제를 만들었습니다.


 무령왕에 이어 성왕 역시도 중국 남조의 세 번째 왕조인 양과 교류를 이어갔는데, 특히 중국의 찬란한 불교문화를 받아들여 호국불교로서 온 나라가 정신적으로 통일될 수 있도록 이끌었습니다. 성왕은 이에 멈추지 않고 앞선 백제의 불교문화를 일본에 전파하여, 552년에는 백제의 승려 노리사치계가 성왕의 명에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불상과 불경을 전해 주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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