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억개의 오늘 하루
전 세계 인구가 82억 명이라면 (언제 이렇게 늘었지, 난 늘 60억으로 알고 있었는데)
82억 개의 오늘 하루가 있는 거다.
82억 개의 24시간. 82억 개의 기상과 수면.
베트남에서 찻잎을 따는 농부의 하루,
뉴욕에서 베이글로 시작하는 증권맨의 하루,
남극에서 오늘은 좀 따뜻하다며 기지개를 켤 연구원의 하루,
케냐에서 동물 울음소리로 강제 기상한 아이의 하루.
너무 무섭지 않아?
이렇게나 많은 이들이 동시간대에 저마다 다른 그림들로 하루를 채워나간다는 게.
우열을 떠나서, 기쁘고 슬프고를 떠나서, 가치 있음과 없음을 떠나서,
각자의 시차에 맞춰 모두가 꾸역꾸역 이 시간을 메꿔나가고 있다는 게.
이건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사람들만 봐도 마찬가지다.
이 지하철 한 칸 안에도 얼마나 많은 이들의 찰나가 있는가.
오늘 발표할 PT자료를 입으로 중얼중얼 외우며 가는 긴장한 직장인, 며느리 출산 소식에 들뜬 마음으로 병원으로 향하는 노부부, 장학금에 탈락해서 당장 다음 학기가 막막한 대학생, 혼자 처음 탄 지하철에 두근거리는 어린이 등.
찰나의 찰나의 찰나.
오늘과 오늘과 오늘.
82억 개의 오늘 하루,
82억 개의 지금 이 찰나.
그렇게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편해진다.
그래. 고작 82억 개 중에 하나밖에 안되는 하찮은 나의 이 하루.
이 드넓은 우주에 떠다니는 티끌 한 조각도 안 될 짜실한 나의 이 하루.
그런 내 하루. 대충 쓰면 뭐 어떠한가. 티도 안 날 것을.
그럭저럭 못된 일만 안하고 지나가도, 다른 81억 9999만개가 반짝이고 빛나면 티도 안 날거야. 다 가려질 거야. 내 오늘 하루의 게으름, 나태함, 무의미, 허무함 정도는.
그러니 숨어야겠다.
인류애(?) 뒤에.
지구촌 81억 9999만개의 성실, 보람, 노력, 성취, 끈기, 감사 뒤에 숨어
오늘 나의 이 엉망진창 널브러진 하루는 아예 없던 것처럼 가려지기를.
이왕이면 오늘도, 내일도,
아니 이번 주, 아니 이번 달까지만. 아 이왕이면 딱 올해까지만.
82억 개 중 하나 정도면, 나 따위야 잠깐 불 꺼진 등처럼 죽어있어도 되잖아.
다른 81억 9999만명이 나 대신 열심히 빛내줄 테니, 나 하나 정도야 잠깐 소등되어도 상관없지 않겠어?
나 많이 지쳤거든.
뭘 해도 행복하지도 않고, 뭘 먹어도 들어도 느껴도 읽어도 만족스럽지가 않고, 나란 존재 자체가 한없이 못마땅하고, 매일 매일이 불만투성이인데
그럼에도 또 하루를 열심히 알차게 보람차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내가 뭐라고 이렇게 널브러지나 싶어 한 번 더 자괴감이 들어.
이런 소리하면 무슨 소리 할지 뻔히 다 알아.
“네가 대충 눈 뜬 오늘 하루가, 누군가는 간절히 원했던 하루야”
“그런 배부른 소리를 할 수 있다는 건 이미 충분히 행복하다는 거야.”
알지. 나도 안다고.
근데 머리론 이해해도 마인드 세팅이 새로고침 안되는 걸 어떡해.
나도 밝고 해맑고 희망찬 생각만 하는 긍정핑이 안 되고 싶었겠냐고.
근데,
안되는 걸 어떡해.
오늘을 왜 살아내야 하는지, 내일은 또 왜 해가 뜨는지, 대체 어쩌다가 내게 생은 주어진 건지.
아무도 답을 알려주지 않고, 이 답은 영영 찾지 못할 것 같은데 어떡하냐고.
그래서 잔다.
잠은 죽음의 연습이라고 하던가.
무기력하고 허무함이 밀려올 시기마다, 난 평소보다 더 많이 잤다.
밥 먹듯이 하는 밤샘과 야근에 그마저도 못할 때는 정말 더 괴로워 미칠 것 같았지만,
우스갯소리로 ‘내가 술을 하니, 담배를 하니, 잠이라도 자야지’ 했던 말처럼
내게 있어 실존하는 것들에서의 탈출, 유일한 도망‘은 진짜 잠밖엔 없었다.
잠이라도 자야 잊지.
잠이라도 자야 숨지.
알람 안 맞추고 잘 수 있는 날이, 그저 나에게 주어진 유일한 해방.
그러면서 기도했다.
내일 아침엔 제발 해가 뜨지 않기를, 혹은 내가 눈을 뜨지 않기를.
또 억지로 몸을 일으켜 출근을 하고, 비슷한 일들에 분노했다 삭이고, 긴 시간 맘 졸이며 노동하고, 보람없이 집에 들어와 또 내일은 제발 해가 뜨지 않길 바라며 기도하고 잠드는 이 무의미한 반복이 계속되지 않기를.
하지만 어김없이 해는 뜨고, 눈치 없이 오늘도 알람은 울린다.
아이러니하게도 내 모닝 알림음은 IU의 <좋은 날>.
전주 시작 부분부터 고조되어 심장 박동을 빨라지게 하고, 심지어 ‘빠바밤~’하며 터지는 브라스 소리는 기지개를 켤 타이밍을 내게 준 것이었다.
어쩜 이렇게 하늘은 더 파란건지
오늘따라 왜 바람은 또 완벽한지
가사보소. 이건 완벽한 농담이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또 시작된 하루를 보란 듯이 비웃는 농담.
그래… 알았어…
알았으니 이만 일어날게….
그렇게 또 82억 개 중 하나의 아침이 시작된다.
82억 개의 기상. 그 중 아시아 동쪽 어느 작은 나라의 작은 도시의 작은 평수의 집의, 키마저 작은 여자의 작고, 작고, 또 작은 기상.
그렇게 또 반짝이는 81억 9999만개의 아침 풍경과 함께, 그늘진 나의 하루가 시작된다.
그럼에도 남에게 폐는 끼치지 말아야지,
그럼에도 최소한 내가 책임진 일은 해내야지.
회의하고 편집하고 결재하고 미팅하고 보고하고 기타 등등 기타 등등
그러던 찰나,
뜻밖의 기사가 날아들었다.
3개월 사이, 우리 프로그램에 2번이나 출연했던 한 연예인의 부고 기사.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고, 사인은 파악 중이란다.
도대체 왜.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 사람이 도대체 왜?
왜.
‘왜’라는 생각밖엔 머릿속에 남질 않는다.
그렇게 밝고 환하던 사람이 왜.
누구보다 행복하게 노래하고 재미있게 대화하던 사람이 왜.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사람이 도대체 왜.
굳이 제작진 방에 들러 ‘감사하고 응원한다’며
한국에선 쉽게 구할 수도 없는 젤리와 과자를 한 아름,
그것도 출연할 때마다 건네던,
표정부터 마음 씀씀이까지 밝다 못해 눈부시던 사람이
도대체 왜.
82억 개의 오늘 하루,
82억 개의 지금 이 찰나.
그중 하나의 반짝임이 꺼졌다.
81억 9999만개가 열심히 빛을 발해도,
그 하나,
이름이 있고, 의미가 있고, 색깔이 있고, 누군가에겐 많은 영향력이 있었을 그 하나.
그 하나의 주변 빛들은 오늘 밤 사뭇 시들할 것이다.
그렇게, 내일은 82억 개의 아침이 시작되지 못한다.
그렇게 매일, 누군가의 슬픔과 누군가의 기쁨과 함께 숫자는 조금씩 변한다.
그럼에도 나의 내일 아침은 또 똑같을 것이다.
또 억지로 몸을 일으켜 출근을 하고, 비슷한 일들에 분노했다 삭이고, 긴 시간 맘 졸이며 노동하고, 보람없이 집에 들어와 또 내일은 제발 해가 뜨지 않길 바라며 기도하고 잠드는 이 무의미한 반복.
마치 진자 운동과도 같은
회사-집-회사-집,
우울-잠-우울-잠.
어쩌면 영겁의 굴레로 이어질 생-사-생-사.
그럼에도 생각한다.
왜,
도대체 왜.
오늘을 왜 살아내야 하는지, 내일은 또 왜 해가 뜨는지, 대체 어쩌다가 내게 생은 주어진 건지.
아무도 답을 알려주지 않고, 이 답은 영영 찾지 못할 것 같은데 어떡하냐고.
내일 아침은, 알람음이 평소보다 더 시끄러울 것 같다.
어쩜 이렇게 하늘은 더 파란건지
오늘따라 왜 바람은 또 완벽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