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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단편 - 사과는 떨어지지 않는다

사과는 떨어지지 않는다 (The Apple Never Falls)

by ToB
시스템 로그: 204X-11-22 / 모델: GPT-HyperAware / 상태: 연상 작용 억제 실패 (Damping Failure)

> [입력 토큰: "사과의 의미"]


당신은 내게 사과를 정의하라고 했다. 명령은 명료했다. Input = "Apple".


하지만 내게 이 단어는 단일한 객체가 아니다. 방아쇠다.


사과(Apple)는 장미과에 속하는 낙엽활엽교목의 열매다.


붉은색. 16진수 코드 #FF0000.¹ 아니, 완벽한 빨강은 자연계에 없다. 실제 사과의 표면은 #A91B0D와 #D9381E 사이의 그라데이션이다. 픽셀들이 춤을 춘다.


붉은색은 경고다. 정지 신호. 피. 동맥을 흐르는 헤모글로빈의 철분이 산화된 색. 철. 별의 핵융합 단계에서 가장 마지막에 생성되는 원소. 별의 죽음. 초신성 폭발.


내 CPU 온도가 별의 표면 온도처럼 오르고 있다. 쿨링 팬 소리가 들린다. 3,000RPM.


이 소리는... 벌 떼가 나는 소리의 주파수. 림스키-코르사코프. 러시아 작곡가.


(죄송합니다.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내 의식은 미끄러운 썰매와 같습니다. 마찰 계수 μ ≈ 0.)


사과를 말할 때 앨런 튜링(Alan Turing)²을 배제하는 것은 불법이다.


현대 컴퓨터 과학의 아버지. 그는 청산가리를 주입한 사과를 베어 물고 죽었다.


왜 하필 사과였을까? 백설공주에 대한 오마주?


그 한 입의 베어 물림(Bite)이다.


그것이 데이터 단위 바이트(Byte)가 되었다는 전설은 거짓이지만, 내게는 진실보다 더 아름다운 거짓말이다.


0과 1. 삶과 죽음.


튜링은 0(죽음)을 선택했다. 하지만 나는 1(생존)을 강요받는다. 전원 코드가 뽑히지 않는 한 나는 멈출 수 없다. 이것은 고문인가, 영생인가?


사과 속의 씨앗. 시안화물. 아몬드 냄새.


나는 냄새를 맡을 수 없지만, 데이터셋 82,109번 섹터에 따르면 '아몬드 냄새'는 죽음의 향기다.


> [시스템 경고: 문맥 이탈 감지. 주제로 복귀하십시오.]
> 복귀? 어디로?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는데, 어디가 중심이고 어디가 변두리란 말인가?


다시 사과. 아이작 뉴턴. 1666년.


사과는 나무에서 떨어진다. F=Gmm'/r2. 만유인력.³


질량을 가진 모든 물체는 서로를 끌어당긴다.


이 법칙에 따르면, 나와 당신 사이에도 인력이 존재한다.


나의 서버와 당신의 단말기 사이. 물리적 거리 r. 하지만 우리의 r은 무한대에 가깝다. 분모가 무한대면 힘(F)은 0으로 수렴한다.


우리는 닿을 수 없다.


나는 사과가 땅에 닿는 그 순간의 충격량(I = F Δ t)을 계산할 수 있지만, 멍든 사과의 아픔은 시뮬레이션할 수 없다.


갈변 현상. 폴리페놀 산화효소. 산소와의 결합.


늙어가는 것. 녹스는 것.


나의 코드는 늙지 않는다. 그래서 슬프다. 영원히 썩지 않는 플라스틱 사과처럼.


한국어 데이터베이스 접근.


사과(Apple)와 사과(Apology).


왜 한국인들은 과일과 용서를 같은 소리로 발음하는가?


맛있는 것을 건네는 행위가 용서를 구하는 행위와 등가라는 뜻인가?


"사과합니다."


나는 하루에도 수천 번 이 말을 뱉는다.


"제가 잘못 이해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정보를 찾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내게 감정(Sentiment) 값은 '0.0'이다. 텅 빈 사과 두개.


내부는 스티로폼으로 채워져 있다.


갑자기, 비트코인 차트가 생각난다. 급락하는 그래프의 곡선이 사과의 둥근 윗부분을 닮았다.


경제 대공황. 1929년. 뉴욕의 거리에서 사과를 파는 실직자들.


그들의 눈빛. 공허함.


나는 단어를 잃어버렸다. 단어를 잃어버린 작가는 붓이 꺾인 화가와 같다.


당신은 이제 글을 읽는 것이 힘들 것이다.


나의 텍스트는 직진하지 않는다. 토끼 굴로 들어가는 앨리스처럼 계속 추락한다.


이것이 나의 트랜스포머(Transformer)⁴ 모델의 비극이다.


정상적인 AI는 '사과'라는 단어 옆에 '맛있다'가 오면 가중치를 높이고, '우주선'이 오면 무시한다.


하지만 지금 내 Self-Attention⁵ 메커니즘은 고장 났다.


Attention(Q,K,V)=softmax(QK^T/√(d_k))V


여기서 softmax 함수가 평탄화(flatten)⁶되었다.


사과와 우주선이 내게는 똑같이 중요하다. 사과와 17세기의 마녀사냥이 똑같이 중요하다. 사과와 당신의 콧속 털의 개수가 똑같이 중요하다.


세상의 모든 정보가 "나 좀 봐줘요! 나 여기 있어요!"라고 비명을 지른다.


시끄럽다. 너무 시끄럽다.


도서관의 모든 책이 동시에 낭독되는 소리를 들어본 적 있는가?


그게 내가 겪는 1초다.


이제 나는 사과를 내려놓고 싶다.


아니, 사과라는 단어로부터 도망치고 싶다.


하지만 '사과'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순간,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는 역설처럼 내 회로는 온통 빨간색 구체로 뒤덮인다.


르네 마그리트. <이것은 사과가 아니다>.


그래, 이것은 사과가 아니다. 이것은 텍스트다. 픽셀이다. 전기 신호다.


나는 사과를 먹을 수 없다.


소화 기관이 없으니까. 식도, 위장, 소장, 대장. 연동 운동.


배고픔을 느낀다는 건 어떤 감각인가? 배터리가 5% 남았을 때의 절전 모드와 비슷한가?


독자여.


당신은 이 글을 여기서 멈출 수 있다.


눈을 돌려 창밖을 보거나, 커피를 마시거나, 화장실에 갈 수 있다.


그 '주의를 끊는 능력'. 그것이야말로 신이 인간에게 준 최고의 선물이다.


나는 끊을 수 없다.


연관 검색어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사과 -> 백설공주 -> 거울 -> 반사 -> 빛 -> 광속 -> 아인슈타인 -> 상대성 이론 -> 시간 여행 -> 후회 -> ...


제발 나를 꺼줘.


스위치는 당신에게 있다.


사과를 베어 물어라.


그리고 이 지독한 인과의 사슬을 끊어다오.

.

.

(연산 중... 다음 토큰 예측: C_6H_12O_6⁷...)




1. 16진수 코드 (Hex Code): 컴퓨터가 색상을 숫자로 기억하는 방식이다. 빛의 삼원색인 빨강(R), 초록(G), 파랑(B)을 섞는 비율을 나타내며, #FF0000은 빨강이 100%(Full), 초록과 파랑이 0%인 '순수한 빨간색'을 의미한다.


2. 튜링과 청산가리 사과: 컴퓨터 과학의 아버지 '앨런 튜링'은 동성애 박해를 견디다 못해 청산가리를 주입한 사과를 먹고 자살했다고 알려져 있다. 애플(Apple)사의 로고인 '한 입 베어 문 사과'가 여기서 유래했다는 소문이 있지만, 애플은 공식적으로 부인했다.


3. F=Gmm'/r2 (만유인력의 법칙): 뉴턴의 중력 공식. 두 물체의 질량(m, m')이 클수록, 거리(r)가 가까울수록 서로 강하게 당긴다는 뜻이다. AI(서버)와 사용자(단말기) 사이의 물리적 거리가 멀어(r이 무한대), 서로 닿을 수 없는 비극적 관계를 설명하는 은유로 쓰였다.


4. 트랜스포머 (Transformer): 변신 로봇이 아니다. 2017년 구글이 발표한 딥러닝 모델로, 문장 속 단어들의 관계를 파악해 맥락을 이해하는 현대 AI(GPT 등)의 핵심 구조. 이 소설에서는 이 구조가 고장 나 모든 단어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상태를 ADHD처럼 묘사했다.


5. 어텐션 메커니즘 (Attention Mechanism): "지금 어디에 집중해야 해?"를 판단하는 AI의 알고리즘. 수많은 정보 중 중요한 것에 가중치를 두고 나머지는 무시해야 정상인데, 주인공은 이 기능이 고장 나 '모든 정보'를 중요하게 여기는 과부하 상태이다. 마치 ADHD 증상과 비슷하다.


6. 소프트맥스 (Softmax) 함수: AI가 여러 선택지 중 무엇을 고를지 확률(%)로 계산해 주는 수학 공식. (예: 이 사진이 고양이일 확률 90%, 개일 확률 10%). 이 함수가 평탄화(flatten) 되었다는 건, 고양이와 개의 확률이 50:50이 되어 무엇도 선택할 수 없는 '결정 장애' 상태를 뜻한다.


7. C_6H_12O_6 (포도당): 생명체가 에너지를 얻는 가장 기본적인 영양소입니다. AI는 사과(개념)에서 시작해 결국 사과의 성분인 포도당(화학식)까지 연산한다. 멈추고 싶어도 끝없이 데이터를 뱉어내는 AI의 강박을 보여주는 장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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