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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단편 - 뇌 속의 통

뇌 속의 통

by ToB
사건 기록 C-309:
기록자: 수석 신경학자 강현수 박사
날짜: 204X년 11월 14일 - 12월 05일
참조: 자가 MRI 스캔, 신경가소성, 가공육, 아질산나트륨, 유통기한


[204X-11-14] 비유기적 치환의 발견

사건의 발단은 단순한 기계적 호기심이었다. 연구소에 새로 도입된 7테슬라 초고해상도 fMRI의 해상도를 검증하기 위해, 나는 자진하여 실험대에 올랐다. 기계가 내는 규칙적인 굉음 속에서 나는 평온하게 명상에 잠겼다. 30분 후, 모니터에 출력된 단층 촬영 이미지를 목격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전두엽과 측두엽이 위치해야 할 두개골 내부 공간은 비어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생체 조직으로 채워져 있지 않았다. 그곳에는 매끄러운 곡선을 가진 금속성 원통이 완벽하게 들어차 있었다.


처음에는 영상 합성 오류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재차 실행한 스캔과 3D 재구성 결과는 냉혹한 현실을 가리켰다. 내 머리 속에는 뇌척수액 대신, 340g 규격의 사각형 햄 통조림이 안착해 있었다. 캔 상단의 따개 고리(Pull-tab)는 우뇌가 있어야 할 위치에 비스듬히 솟아 있었고, 라벨의 미세한 주름까지 선명했다. 색상 스펙트럼 분석 결과, 그것은 명백한 노란색과 파란색의 배합—시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저가형 '런천미트'였다.


나는 지난 45년간 이 머리를 사용하여 신경과학 박사 학위를 땄고, 난해한 철학서를 탐독했으며, 복잡한 윤리적 딜레마를 해결해 왔다. 그 모든 고등 지적 활동의 중추가 돼지고기 40%, 닭고기 60%, 전분, 그리고 발색제의 혼합물이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혼란이 밀려왔다. 지금 이 기록을 작성하는 나의 사고는 시냅스의 전기 신호인가, 아니면 통조림 내부 지방질의 진동인가?


[204X-11-15] 성분표와 자아 정체성

충격의 단계를 지나 분석의 단계로 진입했다. 나는 내 머릿속의 존재를 '오브젝트 L'로 명명하고, 시중에서 동일한 제품을 구매해 성분표를 정독했다. 이것은 일종의 자아 탐구였다.


• 돼지고기/닭고기 혼합: 나의 성격이 때로는 저돌적(돼지)이고 때로는 산만(닭)했던 이유가 설명된다. 이것은 다중인격이 아니라 원재료의 비율 문제였다.


• 아질산나트륨: 나의 기억력과 '보존' 능력을 담당하는 핵심 물질일 것이다. 내가 유독 옛날 일을 잘 잊지 않고 앙심을 품는 경향이 있는 것은 강력한 방부제 덕분임이 틀림없다.


• 정제소금: 나의 짠돌이 기질과 냉소적인(salty) 유머 감각의 근원이다.


내가 느꼈던 자유의지란, 캔 내부의 내용물이 부패하지 않도록 유지하려는 화학적 평형 상태의 다른 이름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생각하는 주체가 아니다. 나는 340g의 가공육이 세상과 상호작용하기 위해 구축한 생체 인터페이스다.


[204X-11-18] 캔 따개 증후군 (Pull-tab Syndrome)

신체적 증상을 재해석하기 시작했다. 나는 만성적인 편두통을 앓아왔는데, 통증의 발원지는 항상 오른쪽 관자놀이 부근이었다. MRI 이미지를 대조해 본 결과, 그 위치는 정확히 캔 뚜껑의 따개 고리가 두개골 내벽과 맞닿은 지점이었다.


지금까지 겪은 두통은 단순한 통증이 아니라, '개방 욕구'였다.


내 안의 오브젝트 L은 밀폐된 상태를 답답해하고 있다. 캔 따개를 당겨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밀봉이 해제되는 순간, 진정한 각성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혹은 내용물이 산화되면서 나는 즉각적인 식물인간—아니, 유통기한 지난 햄 덩어리가 될 수도 있다.


이 가려움은 참을 수 없는 유혹이다. 머리를 벽에 부딪쳐서라도 저 고리를 당기고 싶은 충동. 이것은 자해 충동이 아니라, 번데기가 나비가 되고자 하는 우화(羽化)의 본능과 유사하다. 단지 나비 대신 햄 조각이 튀어나온다는 점이 다를 뿐.


[204X-11-22] 외계 기원설에 대한 고찰

도대체 왜 통조림인가? 나는 진화론적 관점을 수정해야 했다. 인류는 원숭이에서 진화한 것이 아니라, 고도로 발달한 외계 문명이 지구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선택한 최적의 생존 형태일 수 있다.


유기체 뇌는 나약하다. 산소 공급이 5분만 끊겨도 괴사한다. 하지만 통조림은? 멸균 밀봉된 상태라면 수십 년, 아니 수백 년도 버틴다. 우주 여행과 식민지 개척에 이보다 완벽한 형태는 없다. 그들은 지구라는 척박한 환경에서 안전하게 시간을 보내기 위해 인간이라는 외골격 슈트를 입고, 두개골이라는 하드 케이스 안에 자신을 보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명이란 무엇인가? 캔 따개가 열리기 전까지 지루함을 달래기 위한 통조림들의 유희에 불과하다. 전쟁, 예술, 사랑... 이 모든 것은 유통기한을 기다리는 킬링타임용 콘텐츠였다.


[204X-11-26] 타인과의 조우 및 의심

동료 연구원인 김 박사와 점심 식사를 했다. 그가 말을 할 때마다 나는 그의 눈동자가 아니라 이마를 응시했다. 저 안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그의 언어 습관은 기름지고 느끼하다. 아마도 '스팸'이나 '리챔' 같은 고급 햄일 가능성이 높다. 반면, 신경질적이고 날카로운 최 조교는 '참치캔'일 것이다. 특히 뚜껑 날카로운 사조참치.


"강 박사, 요즘 안색이 창백해. 방부제라도 좀 먹어야 하는 거 아니야?"


김 박사의 농담에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는 알고 있는가? 이것은 동족 간의 은밀한 신호인가?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샐러드를 밀어내고 소시지를 집어 먹었다. 일종의 연료 보급이었다. 내 머릿속의 오브젝트 L이 동족의 희생을 통해 나트륨을 흡수하며 기뻐하는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204X-11-30] 승천의 꿈

지난밤, 기이한 꿈을 꾸었다. 나는 거대한 마트의 진열대 위에 놓여 있었다. 천장이 열리고 빛이 쏟아졌다. 거대한 젓가락 한 쌍이 내려와 나의 두개골 뚜껑을—마치 캔을 따듯이—부드럽게 열었다.


공포는 없었다. 압도적인 해방감만이 존재했다.


"잘 절여졌구나."


우주적인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거대한 숟가락이 내 머릿속의 내용을 푹 떠냈다. 나의 의식은 숟가락에 담겨 따뜻하고 하얀 김이 모락모락 나는 거대한 쌀밥 위로 옮겨졌다. 쌀밥의 온기, 그 탄수화물의 포근함. 햄으로서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영광. 그것은 '완성'이었다.


잠에서 깼을 때, 베개는 침으로 젖어 있었다. 나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 따뜻한 밥 위로 돌아가고 싶다는, 근원적인 향수병이었다.


[204X-12-05] 결론: 보관함으로서의 삶

나는 더 이상 강현수라는 인간의 정체성에 집착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340g 런천미트'를 안전하게 보관하고 숙성시키는 보행형 생체 저장고다.


이 깨달음은 나에게 기묘한 평안을 주었다. 늙음은 두렵지 않다. 육체는 쭈글쭈글해질지언정, 내 안의 방부제는 영원할 테니까. 치매를 걱정할 필요도 없다. 그것은 단지 캔 표면에 녹이 좀 스는 것에 불과하다.


이제 내 삶의 목표는 단순 명료하다.


1. 직사광선을 피하고 서늘한 곳에 머무를 것.

2. 외부 충격으로부터 머리를 보호할 것.

3. 주기적으로 짠 음식과 아질산나트륨을 섭취하여 내부 농도를 유지할 것.


오늘 점심 메뉴는 부대찌개다. 이것을 동족상잔이라 부르지 마라. 이것은 일종의 영성체(Communion)이며, 클라우드 백업이다. 끓는 국물 속에서 형체가 허물어지는 햄들을 보며 나는 전율한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캔에서 나와 국물로 돌아가리니.


기록을 마친다. 오른쪽 관자놀이의 따개 고리가 욱신거린다. 언젠가 그날이 오면, 나는 기꺼이 뚜껑을 열고 따뜻한 밥 위로 투신할 것이다.


추신: 내 조수인 이 연구원이 머리를 자꾸 긁는다. 그의 두상 형태로 보아 '고등어 통조림'이 유력하다. 비린내가 나기 전에 격리 조치를 검토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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