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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단편 - 873번

873번

by ToB

도시의 공기는 점액질처럼 축축하고 끈적거렸다. 인공 포장재 위를 내디딜 때마다 발 밑에서는 희미한 반짝임이 스쳤지만, 빽빽하게 겹겹이 솟은 ‘네스트(Nest)’의 그림자 아래에는 빛이 머문 적이 없었다. 네스트는 하나의 건축물이자 도시 전체의 모형이었다. 수백 층의 격자 구조물 안에는 ‘라이프 포드’라 불리는 캡슐이 수직으로 정연하게 삽입되어 있었다. 가장 낮은 층의 거주민들은 지상의 세상에 대해 알지 못했다. 숨을 쉴 때마다 낡은 필터 냄새와 수천 명이 밀집된 곳에서 발생하는 미세한 땀 냄새가 뒤섞인 공기가 코를 찔렀다. 사람들은 이미 그것을 일상의 냄새로 받아들인 지 오래였다.


세상은 너무나 급격하게, 그리고 돌이킬 수 없이 변했다. 자본의 가치가 인간의 생물학적 가치를 압도한 결과, 거주 공간은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좌표로 축소되었다. 결국 살 곳은 곧 관 크기만 한 라이프 포드였다. 포드는 길이 2미터, 폭 80센티미터, 높이 1.2미터. 딱 한 사람이 눕고 몸을 웅크릴 수 있는, 강철과 플라스틱으로 된 생체 보관함이었다. 여기에는 인간을 ‘한 개체 단위의 에너지 소모체’로 정의한 사회의 합의가 깔려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등록되어 죽는 순간까지 할당되는 이 캡슐은, 한 생명을 품었다가 시스템의 경제적 판단에 의해 폐기되는 차가운 관 그 자체였으며, 경제 시스템 속에서 ‘인간이 소비 가능한 상품’으로 존재하기 위한 저장 포인트였다.


카이는 본명으로 불리지 않았다. 그는 ‘라이프 포드 873번’이었다. 그의 포드는 낡았고, 환기팬은 종종 귀를 찌르는 고주파음을 냈다. 천장에 매립된 작은 스크린은 세상과 연결된 유일한 창이었다. 그 화면을 통해 카이는 종종 ‘지상(Terra)’의 기록물을 보았다. 영상 속 사람들은 푸른 하늘 아래 두 팔을 벌려 걸었다. 그 모습은 어쩐지 너무나도 거짓말 같았다. 그의 삶에서의 진실은 이 포드 내부뿐이었기에.


카이의 일상은 효율이라는 단어로 요약되었다. 새벽 6시, 알람이 울리면 그는 몸을 일으켰다. 좁은 공간에서의 기상은 반복적으로 척추를 뒤틀었고, 근육을 위축시켰다. 아침은 맛도 향도 제거된 고농축 영양 겔이었다. 그는 매일 아침 자신에게 ‘나는 아직 인간이다’라고 속삭였지만, 그의 신체는 굴복한 지 오래였다. 그 덩어리는 식사가 아니라 그저 생존을 위한 대사율 유지 장치였다.


잠시 후 그는 직장 포드로 이동했다. 집과 동일한 크기의 캡슐 안에서, 그는 하루 14시간 동안 홀로그램 데이터를 분류했다. 인공지능이 처리하기엔 비용이 지나치게 높은 작업을, 인간의 패턴 인식 능력이 대신 떠맡았다. 효율적이지 않은 인간이 효율을 위해 동원되는 아이러니였다. 그러나 이는 경제적 계산에 의해 정당화되었다.


효율은 수치로 환원되었다. ‘수명 연장 신용 점수.’ 이 점수는 하루하루 갱신되었고, 단위 시간당 처리량으로 측정되었다. 점수는 곧 생존 가능 기간이었다. 필터 교체, 전력 공급, 영양 겔 분배 같은 유지 보수 비용은 매일 인플레이션처럼 상승했다. 낮은 계급의 노동자는 점수가 떨어지는 속도를 결코 따라잡을 수 없었고, 설계자는 이 구조를 “선별적 도태 알고리즘”이라 불렀다.


밤이 되면 그는 다시 포드로 돌아왔다. 외부와의 교류는 금지되었기에, 그가 대화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AI였다. AI는 그의 체온, 심박, 호흡 변화를 실시간으로 읽고, 그날의 노동 성과를 바탕으로 문장을 생성했다.


“오늘 당신의 성과는 평균보다 0.3% 높습니다. 시스템은 당신의 영광스러운 기여를 긍정적으로 기록했습니다.”


문장의 내용은 감정이 아니라 사실에 가까웠지만, 사실이 감정을 대체하는 순간이었다. 목소리의 떨림이나 따뜻한 눈빛은 사라졌고, 대신 최적화된 격려 문장이 투입되었다. 그는 그 문장을 듣고 잠시 위로받았으나, 위로라는 감각마저 시스템이 설계한 환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화면이 붉게 물들었다.


"긴급 통보: 수명 연장 비용 지불 기한 초과. Score: 350점. 시스템 재조정 필요."


계약 조항은 간단했다. 점수가 기준치 이하로 내려가면 생존 자격은 박탈된다. 873번은 포드 안에서 몸을 떨며 애원했다.


"저를 더 일하게 해 주세요. 하루 20시간, 아니 24시간이라도. 저는 아직 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AI의 대답은 변하지 않았다.


"추가 노동 투입은 시스템 효율을 저해합니다. 포드는 더 높은 효용성을 가진 사용자에게 재배정됩니다."


873번은 그제야 확실히 이해했다. 인간은 사회의 자산 목록에서 언제든 삭제될 수 있는 항목일 뿐이었다. 873번은 자신이 태어난 순간부터 이 포드가 자신에게 속한 적 없음을 깨달았다.


최종 통보가 내려왔다.


"계약 해지. 24시간 후 시스템 정지. 06:00 재할당 예정."


873번에게 남은 시간은 단 24시간. 873번은 기록 영상 속 푸른 하늘을 반복 재생했다. 파도 소리를 들으며 바닷물의 짠맛을 상상하려 했으나, 뇌는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감각을 떠올리지 못했다. 결국 873번은 포드 벽을 손끝으로 더듬으며, 자신이 가장 원했던 것이 단 하나임을 확인했다.


‘공간’.


단지 팔다리를 자유롭게 펼 수 있는, 존재의 증거가 허용된 공간. 873번이 끝내 갈망한 전부였다.


새벽 5시 59분. 전력은 차단되었고, 환기 장치는 멈췄다. 공기는 점차 희박해졌다. 산소 부족으로 의식이 흐려지는 순간조차, ‘그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너무나도 비좁은 1.92 제곱미터의 세상을 정확히 인식할 수 있었다. 심장은 마지막 박동을 울렸고, 근육은 서서히 풀렸다. 삶은 단 하나의 금속 관 안에서 시작해, 동일한 관 안에서 고요히 종결되었다.


06:00 정각. 시스템은 라이프 포드 873번의 데이터를 삭제하고 새로운 사용자에게 재배정했다. 환기 장치가 잠시 가동되어 ‘그것’의 흔적을 지웠다. 그 직후, 네스트 외벽에 광고가 점등되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당신의 모든 것을 책임집니다. 삶은 계속되어야만 합니다."


새로운 사용자가 낯선 공기를 들이마셨다. 80센티미터 폭의 반복은 오류 없이 이어졌다. 시스템은 변하지 않았다. 873번의 삶도 끝나지 않았다. 삶은 개인이 아니라, 연속성 자체로만 존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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