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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단편 - 인과율

인과율

by ToB

적어도, 이리나를 만나기 전까지는 나는 시간 역행을 믿지 않았다. 소설이나 영화같은 창작물에나 등장하는 상상력의 산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내게 시간의 본질이 흐름이 아닌, 관점의 문제일 수 있음을 가르쳐주었다. 그녀의 시간은 과거를 향해 흘렀고, 나의 시간은 미래를 향해 나아갔다. 우리는 서로의 정반대 방향으로 흐르는 강둑에 서서, 현재라는 찰나의 순간에만 간신히 손을 맞잡을 수 있는 연인이었다.


이리나와의 삶은 '일상'이라는 단어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우리가 함께 영화를 볼 때면, 나는 주인공의 여정을 따라가며 결말을 궁금해했지만, 그녀는 이미 결말을 '기억'한 채, 그 모든 사건이 왜 일어나야만 했는지에 대한 원인을 역으로 추적했다. 그녀는 세상 모든 이야기의 완벽한 스포일러였다.


"현우 씨, 내일 아침엔 늦잠 자지 마."


잠자리에 들기 전 그녀가 속삭였다.


"오전에 중요한 연락이 올 거야. 당신이 꼭 받아야 해."


나에게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였지만, 그녀에게는 방금 겪고 온 과거였다. 나는 그녀의 '기억' 덕분에 수많은 실수를 피할 수 있었고, 그녀는 나의 '예정된 행동' 덕분에 혼란스러운 세상을 조금이나마 예측할 수 있었다. 우리의 사랑은 이 기묘한 정보의 교환 속에서 싹텄다. 나는 그녀의 지혜로운 슬픔을 사랑했고, 그녀는 나의 순진한 희망을 사랑했다.


우리의 육체적인 사랑은 이 모든 역설이 잠시 잊히는 유일한 순간이었다. 서로의 체온을 느끼고 숨결을 나누는 그 찰나의 '현재'만큼은, 시간의 방향도, 인과의 순서도 무의미해졌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나는 과학자로서의 질문을 완전히 떨치지 못했다. 시간을 역행하는 그녀의 생물학적 구조가 나의 것과 만났을 때,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까. 우리는 임신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막연히 추측했다. 생명의 탄생, 즉 엔트로피의 폭발적인 증가는 그녀의 모든 것을 역행하는 신체 시스템과 정면으로 충돌할 터였다. 그것은 우리의 위태로운 관계를 지탱하는, 암묵적이고 이기적인 희망이었다.


나의 또 다른 일상은 피험체 M-01, '레오'의 데이터를 분석하는 것이었다. 수십 년 전 스코틀랜드의 한 요양원에서 80대 노인의 모습으로 발견된 고아. 그는 이리나와 똑같은 '역행인'이었다. 나는 스크린 너머로 그의 생체 데이터, 역행의 속도, 유전자 정보를 들여다보았다. 그의 고독을 상상했다. 아무도 그의 기원을 몰랐고, 그 자신도 몰랐다. 그는 그저 우주가 던져놓은 또 하나의 외로운 변수였다. 나는 언젠가 이리나와 레오를 만나게 해야 할지, 아니면 영원히 격리해야 할지에 대한 윤리 보고서를 작성하며 밤을 새우곤 했다. 두 개의 역설이 만났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우리는 아는 것이 없었다.


운명은 보고서나 서류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레오가 머물던 보육원에 가스 누출 사고가 발생했다는 소식은 평범한 행정 보고 라인을 통해 내게 전달되었다. 그리고 그의 임시 거처가 우리 연구소에서 불과 1킬로미터 떨어진 곳으로 정해졌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때, 내 등줄기에서는 식은땀이 흘렀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정교한 우연이었다.


그리고 오늘.


"박사님! 1시간 전에 임시 거처에 불이 났다고 합니다! 가까운 거주지가 없어서 거처 내부의 모든 인원을 저희 연구소로 대피시킬 예정입니다! 레오가 계속해서 이동하고 있습니다."


막을 방법은 없었다. 그것은 실험이 아니었다. 거대한 자연현상, 우리가 이론으로만 예측했던 '인과적 인력'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다가오는 쓰나미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파도의 높이를 측정하는 것뿐이었다.


"대응팀을 보내! 아이를 이쪽으로 데려와! 어차피 일어날 일이라면, 모든 것을 기록해야 해!"


팀은 아이를 특수 격리 운송함에 넣어 연구소로 긴급 이송했다. 우리는 이 거대한 자연현상이 벌어질 무대를 통제된 실험실 안으로 옮겨놓는 데 성공했다. 마침내 레오는 이리나가 있는 격리실에 놓였다.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일이 시작되었다.


마침내, 아이는 이리나의 몸에 도달하여, 생물학적 역행을 통해 그녀의 몸과 하나가 되었다. 모든 것이 끝나자, 연구소는 침묵 속에서 터져 나오는 과학자들의 흥분과 환호로 가득 찼다. 인류는 신의 영역을 엿보았다. 나 역시 그 경이로움에 압도되어, 잠시 내 앞의 여인이 겪었을 일을 잊고 있었다.


며칠간 우리는 확보된 데이터를 분석하며 밤을 새웠다. 질량-에너지 보존 법칙은 완벽하게 지켜졌고, 국소적인 열역학 법칙의 역전 현상도 명확히 기록되었다. 이리나의 몸에서 채취한 조직 샘플은 레오의 DNA와 모계 관계가 일치함을 증명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때, 한 젊은 연구원이 모두가 애써 외면하던 질문을 던졌다.


"박사님, 그런데 이상합니다. 모계 유전자는 이리나가 확실한데, 부계 유전자 역시 온전한 형태로 존재합니다. 레오는 고아였습니다. 아버지는 누구였을까요?"


그 질문에 통제실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환호성이 잦아들고 모두가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우리는 존재의 기원을 목격했지만, 가장 기본적인 질문에 답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누구인가?'


누군가는 외부에서 유입된 오염된 데이터일 것이라고 주장했고, 다른 누군가는 레오가 일종의 단성생식을 통해 태어난 완벽한 역행 개체일 수도 있다는 가설을 내놓았다. 하지만 스크린에 떠 있는 뚜렷한 부계 유전자 염기서열은 그 모든 추측을 비웃고 있었다.


결국 과학자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합리적인 절차가 제안되었다.


"외부 오염 가능성을 배제하기 위해, 프로젝트에 참여한 모든 연구원의 DNA를 채취해 대조해봐야 합니다."


윤리 위원회의 긴급 승인이 떨어졌고, 나는 아무런 감정 없이 그 절차에 동의했다. 내 뺨 안쪽을 면봉으로 긁어내며, 나는 이것이 그저 미지의 변수를 하나씩 지워나가는 과정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레오는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머나먼 별이었으니까.


결과는 다음 날 아침, 내 개인 단말기로 전송되었다. 나는 무심코 파일을 열었다. 수많은 대조군 리스트의 맨 위에, 붉은색 글자로 떠 있는 최종 결론이 있었다.


부계 유전자 대조 결과: 김현우 연구원과 99.999% 일치.


나는 모니터 앞의 내 모습을, 내 이름 석 자를, 한참 동안이나 멍하니 바라보았다. 세상의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손에 들고 있던 커피잔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났지만, 그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레오. 내가 수십 년간 데이터로만 접했던 그 고독한 역행인. 내가 그의 삶을 분석하며 연민했던 그 아이. 그가 내 아들이었다. 내 아들은 이미 80여 년의 삶을 거꾸로 살아내고, 어제 내 눈앞에서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종착점으로 돌아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 아버지가 된 적이 없었다. 그 '원인'은 나의 미래에 있었다.


그날 이후, 나는 과학자가 아니라 사관이 되었다. 다만 나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결과를 먼저 기록해버린 사관이었다. 이리나의 몸 안에서 내 아들은 10개월에 걸쳐 서서히 소멸해갔고, 나는 그 과정을 데이터로 작성해야 했다. 초음파 화면에 비친 태아의 모습은 내게 생명의 신비가 아니었다. 이미 모든 삶을 살아낸 내 아들의 쓸쓸한 퇴장이자, 그가 걸어온 고독한 80년 인생의 마지막 페이지였다. 이리나는 배를 만지며 미소 지었다. 그녀의 시간 속에서, 이것은 사랑의 결실을 맺기 위한 준비 과정이었지만, 나의 시간 속에서 그것은 내가 저지를 비극의 서막이었다.


그리고 운명의 밤이 왔다. 이리나의 몸에서 레오의 마지막 흔적까지 완전히 사라지고 몇 달이 지난 후였다.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다웠다. 그녀의 시간 속에서는 나와의 사랑이 한창 무르익어 가는 시점이었다. 그녀는 아무것도 모른 채 나를 원했다. 그녀의 사랑은 순수했고, 의심은 없었다.


나는 그녀의 눈을 보았다. 이 사랑스러운 여인. 내가 지금 그녀를 사랑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나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나의 사랑의 행위는, 내 아들을 80년간의 고독한 역행의 삶으로 밀어 넣는 선고가 될 것이다. 그는 태어나자마자 늙은 몸으로 죽음을 향해 걸어갈 것이고, 외롭게 젊어지다 마침내 아기가 되어 어머니의 몸으로 돌아와야 한다. 내가 스스로 기록한 모든 비극의 시작은, 바로 지금 나의 선택에 달려 있었다.


거부할 수 있었을까? 내가 그녀를 밀어낸다면, 이 끔찍한 고리는 끊어지는 것일까? 하지만 내가 여기서 멈춘다면, 내 아들 레오는 존재 자체가 없었던 일이 된다. 나는 이미 그의 모든 삶을 알고, 그의 존재를 슬퍼하고, 그를 사랑하게 되었는데. 그의 존재를 지워버리는 것이 과연 옳은 선택일까? 존재하지 않는 것이, 그 끔찍한 삶보다 나은 것일까? 내 머릿속에서 수만 가지 상상들이 충돌했다. 하지만 모든 결론은 하나로 귀결되었다. 나는 이미 이 거대한 이야기의 일부였다.


나는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따뜻한 체온을 느끼며, 나는 눈을 감았다. 이것은 단순한 육체의 결합이 아니었다. 나는 거대한 운명과 관계하고 있었다. 내 아들의 탄생과 소멸 전체를 껴안고 있었다. 모든 것을 알면서도, 나는 내 아들을 과거로 떠나보내는 행위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저질렀다.


나는 내 아들의 시작이자 끝이었다. 나의 사랑은 그가 갇힌 인과율 그 자체였다. 그리고 나는 안다. 만약 시간을 되돌려 그 운명적인 밤으로 다시 돌아간다 해도, 나는 똑같은 선택을 할 것이라는 것을. 그것이 내가 이리나를 사랑하는 방식이고, 내 아들의 존재를 증명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비극인 줄 알면서도, 기꺼이 그 비극의 일부가 되는 것. 그것이 나의 사랑이자, 나의 형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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