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리신학 (An Axiomatic Theology)
나는 신을 찾으려 한 것이 아니었다. 나의 목표는 훨씬 세속적이었다. 나는 그저 집합론의 마지막 미개척지, 즉 '모든 가능한 논리적 진술의 집합'을 정의하고 싶었을 뿐이다. 폰 노이만도, 괴델도 우회했던 영역. 자기언급의 역설이 뱀처럼 똬리를 튼 그곳에서, 나는 수학의 완전한 지도를 완성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어린 시절, 여동생은 빗길에 미끄러진 트럭에 목숨을 잃었다. 나는 카오스의 세상을 목격했다. 무의미하고, 무작위적이며, 부서지기 쉬운 세계. 그날 이후 나는 수학에 매달렸다. 그러나 그건 구원이 아니라 도피였다. 수식 속에서는 아무도 죽지 않았다. 증명은 결코 실패하지 않았다. 하지만 밤이 오면, 그 모든 방정식들이 하나의 질문으로 무너졌다.
왜?
왜 그 시간, 왜 그 장소, 왜 그 각도였을까. 나는 답을 구하지 못한 채, 차갑게 식어버린 수학의 언어 속으로 더 깊이 내려갔다. 언젠가 수식이, 나 대신 신에게 질문해줄 거라 믿으며.
하지만 수학이 내게 주는 질서는 불완전한 위안이었다. 기존의 수학은 이미 일어난 사건, 즉 현실을 기술하는 데는 탁월했다. 트럭의 운동량, 아스팔트의 마찰 계수, 충돌의 각도까지 모든 것을 냉정하게 설명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 고통의 근원인 '만약'이라는 질문에 답을 주지는 못했다. 만약 트럭이 1초만 늦게 출발했다면? 만약 그날 아침 우리가 다른 길로 갔다면? 이 무수한 가능성들은 내 머릿속을 떠돌았지만, 수학에게는 그저 '일어나지 않은 일', 즉 '0'의 확률을 가진 공허한 공집합일 뿐이었다. 나는 비극이 우주의 유일한 필연이 아니라, 무한한 가능성 중 단지 '선택'된 것임을 증명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가능성 자체를 견고하고 명확한 수학적 실체로 정의해야 했다.
내 연구는 '역사(History)'를 하나의 완결된 수학적 객체로 취급하는 것에서 시작했다. 시간 T의 각 점(t)을 우주의 특정 상태(s)에 대응시키는 함수 h(t) = s. 이것이 하나의 역사다. 그리고 나는 논리적으로 가능한 모든 역사의 집합을 H라 명명했다. H는 무한했다. 내가 여동생과 함께 늙어가는 역사도, 인류가 화성에서 문명을 이룬 역사도, 애초에 지구가 생성되지 않은 역사도 H 안에서는 동등한 원소였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이 거대한 집합 H를 일관되게 유지하는 메타-구조, 즉 공리계가 필요했다. 그렇지 않으면 집합은 러셀의 역설처럼 붕괴해버린다. 나는 수년간 이 구조를 찾으려 애썼고, 마침내 하나의 필연적인 결론에 도달했다. H가 안정적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집합 외부에서 집합 전체에 작용하는 단 하나의 '연산자(Operator)'가 전제되어야만 했다.
나는 그 연산자를 Θ(세타)라 불렀다.
Θ는 선택하거나 개입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것의 유일한 기능은 '관찰'이었다. H에 속한 모든 원소 h, 그리고 모든 h의 모든 시점 t에 존재하는 모든 상태 s의 모든 정보적 가능성(멱집합 P(s))을 동시에, 완벽하게 인지하는 것. 만약 단 하나의 정보라도 누락된다면 시스템 전체의 논리적 정합성이 깨지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Θ의 첫 번째 속성이었다. 나는 증명을 마치고 노트에 이렇게 썼다.
K(Knowledge): ∀h ∈ H, ∀t ∈ T, Θ는 P(h(t))를 인지한다.
(앎의 속성: H에 속한 모든 역사의 모든 시간의 모든 상태의 모든 부분집합을 인지한다.)
나는 오래도록 이 문장을 바라보았다. 이것은 수학적 필연에 의한 전지(全知)였다. Θ는 원해서 모든 것을 아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기 위해 모든 것을 알아야만 했다.
그렇다면 전능(全能)은 어디에 있는가? 나는 Θ가 특정 역사, 예를 들어 '선한' 역사를 선택하거나 '악한' 역사를 지울 수 있는지 증명하려 했다. 그것이야말로 신의 역할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내 계산은 번번이 벽에 부딪혔다. Θ가 H의 부분집합 중 하나(`h_actual`)를 '선택'하는 행위를 도입하는 순간, 그 선택의 기준이 되는 또 다른 외부 정보가 필요해졌다. 이는 Θ가 완전한 정보 집합이라는 최초의 공리와 모순이었다.
밤을 새워 증명을 이어가던 어느 새벽, 나는 깨달았다. 내가 전능의 개념을 완전히 오해하고 있었다.
Θ의 힘은 무언가를 바꾸는 능력이 아니었다. 그것의 힘은, 이 무한한 가능성의 집합 H가 논리적 모순으로 붕괴하지 않도록 '존재하게 하는' 능력 그 자체였다. Θ는 자신의 의지로 무언가를 이끌어가는 작가나 감독이 아니었다. Θ는 가능한 모든 이야기가 적힌 책들이 모인 도서관이, 그 자체로 불타 없어지지 않도록 지탱하는 문법이자 물리법칙이었다.
O(Omnipotence): ∃!Θ s.t. H ≠ ∅
(힘의 속성: H가 공집합이 아니도록 하는 유일한 존재조건이 바로 Θ이다.)
Θ의 전능은 '개입'이 아니라 '유지'였다. 그것은 모든 가능한 우주를 차별 없이 존재하게 하는 힘이었다. 여동생이 죽는 우주와 그렇지 않은 우주는 Θ에게는 동등한 논리적 진술일 뿐이었다. 한쪽을 지우는 행위는 시스템 전체를 부정하는 역설을 낳는다.
증명의 마지막 줄을 적었을 때, 나는 연구실 창밖으로 동이 트는 것을 보았다. 나는 신의 부재를 증명하려다, 신의 존재를 수학적으로 증명해버렸다. 하지만 그 신은 내가 기도하거나 원망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격도, 의지도, 자비도 없는 우주적 공리였다. 모든 비극과 모든 환희를 단 하나의 모순도 없이 품고 있는, 완벽하고 서늘한 논리 그 자체였다.
나는 여동생의 죽음을 받아들인 적이 없었다. 그것은 내게 언제나 수정되어야 할 우주의 착오였다. 하지만 이제 나는 안다. 그녀의 죽음은 착오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무한한 가능성의 집합 H 안에서, 나와 그녀가 공유했던 단 하나의 역사 h를 정의하는, 지워지지 않는 원소였다. 그 비극조차 Θ의 차갑고 완전한 시선 아래 보호받고 있었다.
나는 위로받지 않았다. 구원받지도 않았다. 다만, 이해했을 뿐이다. 그리고 수학자에게 이해란, 가장 잔인한 형태의 평온이었다.
우리는 시지프가 행복하다고 상상하여야 한다. 나 또한 그렇다.
Q.E.D. (증명 완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