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시간을 정확히 맞추어 방문해주신 기사님이 10분 만에 냉장고를 척척 운반해 전문 차량에 실어가셨다. 그 사이 동생한테서 전화가 와있었다.
나는 아침 6시에 일어났는데, 동생은 5시 10분에 일어나 아침을 먹고, 매일같이 다니는 장애인복지관에 벌써 도착했다는 것이다. 복지관은 8시가 되어야 문을 여는데 동생은 이렇게 매일 아침 한 시간이나 빨리 도착해 기다린다.
아침마다 동생과 나는 그날 서로가 꾼 꿈을 꺼내 이야기를 나누고, 지금 뭐 하고 있으며, 또 오늘은 무엇을 할 것이며, 무엇을 먹을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그런데 오늘은 둘 다 무슨 꿈을 꾸었는지 도통 생각나지 않고, 나는 방금 전에 방문하신 기사님이 혼자서 그 무거운 냉장고를 운반한 이야기를 꺼낸다.
“마치 H형처럼 그렇게 힘이 세시더라고.”
H형은 동생보다 6살 나이가 많은 형인데 오랫동안 큰언니네 가게에서 일하며 쌀가마니도 척척 들어 올리는 힘이 장사인 형이다. 언젠가 방송으로 설악산 마지막 지게꾼이신 임기종 님의 이야기를 본 적이 있는데 그분만큼이나 힘이 세다.
H형은 부모님이 누군지를 모른다. 갓난아기 때부터 할머니와 살다가 할머니가 포악성을 드러내 생명에 위험을 느껴 도망쳐 나와 장터 빈 컨테이너에서 일주일을 보내고, 교회로 찾아들어가 그 후 교회에서 운영하는 보육원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다가 큰언니를 만나 수십 년간 언니네 가게 살림을 도맡아 하며 가족처럼 지내고 있다.
나는 내가 도저히 하지 못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경외심이 든다.
폐가전 무상 방문수거 기사님도 그렇고, H형도 그렇고, 임기종 님도 그렇다.
폐가전무상방문수거센터에 예약을 해놓고 냉장고를 보내기 전에 문짝 서랍을 하나하나 다 꺼내 깨끗이 닦아 씻어 말린 뒤 다시 끼웠다. 냉장실과 냉동실 모두 제 기능을 못하지만 닦고 나니 너무나 반듯하고 깨끗하다. 건강을 지켜준 소중한 냉장고였다.
냉장고가 떠난 뒤 거실은 새로운 모습을 찾았다. 소형이기는 하지만 내게는 너무 무거운 냉장고가 거실 한편에 자리 잡고 나면, 나는 도저히 움직일 엄두를 못 내고 이사할 때 한번 두면 그대로 고정이 되어버리곤 했는데, 이번에 나는 이 냉장고보다 더 소형 냉장고를 주문하여 택배로 받아 스스로 설치하며 거실을 새롭게 정비했다.
거실 풍경이 바뀌자 뭔가 새로 이사한 기분이 든다.
새로 구입한 소형 냉장고는 12년간 쓴 소형 냉장고에 비해 더 작고 성능이 떨어지지만, 냉장실과 냉동실이 제기능을 하니 나는 이걸로 족하다.
냉장고가 놓여있던 공간에 남아있는 먼지를 닦아내고 밖으로 나가 분꽃에게 물을 준다. 상쾌한 아침 바람이 불자 분꽃 잎사귀가 반응한다. 샛노랗게 활짝 꽃을 핀 분꽃이 환하다. 아주 힘센 기사님 손길에 이끌려 냉장고가 떠나는 모습을 분꽃이 함께 지켜보고 있었구나! 나는 다시 아름다운 한 송이 분꽃 빛깔에 넋을 잃는다. 지금 여기를 힘껏 살아가는 존재가 여기 또 있었구나. 내 건강을 지켜주는 냉장고도 경이롭고, 냉장고를 맨손으로 척척 나르는 기사님도 경이롭고, 분꽃도 경이롭다.
아침 7시, 12년을 함께 한 냉장고를 보내고, 분꽃을 한참을 감상한 뒤, 새로 산 냉장고를 열고 어젯밤에 찻잎을 넣어둔 차가운 홍차를 꺼내 마신다. 한낮 땡볕 더위엔 차가운 물 한 모금이, 차가운 보리차와 홍차 한 잔이 세상 반갑다. 작지만 제 역할을 다 하는 냉장고, 이 여름 네 덕을 좀 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