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들과 그림책 토론을 하다

<그림책 한번 읽어볼까?>

by 강이랑


처음으로 어린이들과 깊이 있는 그림책 토론을 했다.


지금까지 일본에서의 경험까지 합해 많은 어린이들과 그림책을 함께 보면서 그림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은 있지만, 한 권의 그림책을 보고 진지한 토론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침에 핀 나팔꽃

판교에 있는 작은 도서관에서 이번 달부터 초등학교 3학년 어린이 여덟 명과 책 읽기 수업을 하게 되었다. 8회로 진행되는 수업에 여덟 권의 도서를 선정하며, 초등학교 3학년이 읽으면 좋을 동화책과 함께 세 권의 그림책을 선정했다.


산책길에서 본 마리골드 한 송이

첫 번째 책으로 토미 웅거러의 그림책 《제랄다와 거인》(김경연 옮김, 비룡소, 1996)을 가져갔다. 한 시간 수업이었지만 이 한 권의 책만으로는 혹시라도 시간이 남을 수도 있을 경우를 대비해 토미 웅거러의 또 다른 그림책인 《세 강도》도 지참했다.


찬란한 햇살을 받으며 핀 들판의 분꽃

그렇게 수업을 시작한 나는 그림책을 들고 보여주며 지금까지 해오던 대로 읽어주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른 아무 말 없이 그림책 내용에 집중하며 처음부터 끝까지 읽던 방식과 달리,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때때로 특정 이미지를 가리키며 어린이들에게 질문을 유도하고 어린이들의 발언을 귀담아 들었다. 그렇게 중간까지 진행하는데 집에서 네 번이나 읽어온 여자 어린이가 자신들이 돌아가면서 읽을 수 없겠냐고 제안한다. 반기던 소리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어린이들에게 바통을 넘긴다.


들판에서 만난 강렬한 빛깔의 커다란 분꽃 두 송이

두 여자 어린이가 각각 세 장씩 읽는데 어찌나 맑고 청아한지, 어찌나 또박또박 잘 읽는지, 어찌나 막힘 없이 술술 읽어내는지, 어찌나 귀 기울이게 만드는지, 어찌나 그림책에 집중하게 하는지 다 열거해도 손가락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도중에 읽어주는 어린이 분께 양해를 구하고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페이지에서는 잠깐 멈추고 그림책을 보며 토론을 계속 이어갔다.


일본에 있을 때 유치원 그림책 읽어주기 클럽에도 참여를 했기 때문에 아이들이 얼마나 그림책의 그림을 잘 보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이 그림책을 통해 이렇게 깊이 있는 이야기를 끌어낼 줄은 솔직히 몰랐다. 준비해 간 《세 강도》는커녕 《제랄다와 거인》만으로도 시간이 모자랄 판이었다.


그림책에서 제랄다는 여섯 살 때부터 요리를 잘했다. 제랄다는 “끓이고, 굽고, 조리고, 튀기고, 지지고, 볶는 것은 물론, 연기로 고기를 조리하는 법도” 터득하는데, 그럼 지금은 몇 살일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갔다.


한 남자 어린이가 “스무 살”하고 말한다. 그러자 한 여자 어린이가 “열 살”하고 말한다. 그러자 집에서 네 번 읽고 왔다던 여자 어린이가 제랄다는 “열두 살 이상은 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보았더니, 제랄다의 성장 상태를 이미지를 하나하나 살피며 말해주는 것이 아닌가. 나를 포함해 함께 있던 우리 모두는 그냥 깜짝 놀랐다. 한 방에 정리가 된 것이다.


제랄다의 아버지가 제랄다가 요리한 음식을 너무 많이 먹어서 탈이난 장면에서 벽에 걸어둔 십자가와 어머니 사진을 보면서 종교와 어머니가 부재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 이야기 나누었다. 이야기 속에서 아버지의 부재나 어머니의 부재는 언제나 상징적이다. 인간 내면의 욕망이나 결핍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여러 장면에서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갔지만 이 그림책에서는 역시 음식 장면을 넘어설 수가 없다. 제랄다가 거인을 위해 만든 음식 중에 <신데렐라 식 칠면조 구이> 장면에서 빨간 구두를 신고 있는 칠면조 구이가 나오는데 한 남자 어린이가 불쌍해서 도저히 먹을 수 없다고 말한다. 나는 그래도 한 다리 뜯어서 먹겠다고 말한다. 나는 아주 섬세한 소년의 마음을 알아주기는커녕 소금 뿌리는 발언을 한다. 그러자 다른 어린이가 빨간 구두는 아마도 초콜릿으로 만들었고 빨간 소스를 바른 것일 수도 있다고 아주 진지하게 말한다. 실제로 이 장면을 힌트로 아이들도 자기만의 창작 요리를 각자 지참한 독서노트에 그리고 앞에서 발표를 했는데, 그림책 토론 시간이 너무 길어 그림 그리는 시간이 부족했는데도 아주 집중해서 그리고, 창의적인 요리 이름을 고안하고,

친구가 발표할 때 집중해 들어주는 어린이도 있어 나는 무척 감동했다.


그림책 문장 중에 어린아이를 잡아먹던 거인이 제랄다의 음식을 먹고 “그 맛이 어찌나 좋았던지, 제일 좋아하는 요리, 그러니까 어린아이들을 먹고 싶은 생각이 싹 사라지고 만 거예요”나, 제랄다의 요리를 먹어본 거인의 친구들이 “거인들은 아이들을 먹고 싶은 마음이 싹 가셨지요.”라는 부분에서 어린이 중 한 명이 제랄다가 거인들을 구원하고 구했다는 말을 하는데, 이 말은 이 그림책의 핵심이기도 해서 정말이지 놀라울 뿐이었다.

저녁 무렵 들판에서 만난 방아깨비

심지어 그림만 보는 것이 아니라 문장 하나하나 섬세하게 보고 말해주는 어린이도 있었다.


부엌에 있는 여러 도구와 비축해 놓은 다양한 식재료, 상에 차려진 요리 옆에 놓여있는 소금통이나 소스, 요리에 올려진 하나하나의 재료나 상태까지 세심하게 보고 자신들의 생각을 표현했다.


그림책 《제랄다와 거인》에서 사탕을 손에 든 거인 장면

나는 사탕을 손에 든 거인 장면에서 “거인 손을 봐봐. 칼 대신에 사탕이 들렸어.”하고 말한다. 그러자 한 남자 어린이가 대답한다. “어린이에게만 줬어요.” 그렇다, 거인은 손에 든 그 귀하고 달콤한 새빨간 사탕을 어른이 아닌 어린이들에게만 준다. 그리고 강아지에게도.


책 읽기 수업을 한다며 잔뜩 힘이 들어가 진행도 그림책 읽기도 무언가 부자연스러웠던 나에 비해 어린이들은 쿨하고 담백하면서도 몰두하는 너무 세련된 자세를 보였다. 거인의 사탕을 받을만하다. 나도 어린이들처럼 열려 있는 자세로 상황을 즐기고 성장하는 마음을 잃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저 탐스런 붉은 사탕을 받을 날이 오겠지.


들판에서 본 백일홍 꽃과 분꽃과 마리골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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