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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이랑 Feb 19. 2024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아먹는다


못 일어나서 못 잡아먹었다.


호메로스의 《일리스》를 읽는 독서 모임이 다가오고 있어서 우리 동네 수목원 안에 있는 도서관을 갔다. 요일이었고, 흐렸고, 정오가 한참 지나서야 집을 나섰다.


집을 늦게 나선 이유는 나 자신에 대한 보상과 게으름과 안이함이었다.


전날 토요일에 무리한 나는 아침의 게으름을 나 자신에게 스스로 보상하고 싶었다. 그냥 게으른 것에 불과한데, 힘들었던 나는 아침에 눈을 떴는데도 ‘아냐, 괜찮아. 어제 고생했으니까 빨리 안 일어나도 돼. 더 누워있어. 도서관은 5시까지야, 2시까지 가면 되지.’ 달콤한 속삭임을 되뇌며 침대 속에서 뭉기적댔다.  ‘저번에도 일요일에 갔는데 빌렸잖아. 괜찮아, 있을 거야’란 안이함이 함께 했다.


1시 반 경에 도서관에 도착해 책을 검색했더니, 대여가능” 으로 떴다. ‘거 봐. 있잖아’하며, 유유히 서가 가 찾아보았지만 책은 없었다. 사서분에게 여쭈어보았더니 도서관에서 누군가 읽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도서관 안은 부지런한 분들로 자리가 꽉 차 있었다. 여기 계시는 부지런하신 누군가가 일찍 도서관에 도착해 고전 서가에서 《일리스》를 뽑아 읽고 계신다는 생각이 들자 “일찍 일어난 새가 벌레를 잡아먹는다.”란 속담이 생각났다. 고등학교 영어 시간에 처음 이 속담을 들었던 것 같다. 도서관 안 어딘가에 내가 찾는 《일리스》가 있다고 생각하자 뭔지 모를 아쉬움이 전신을 감쌌다.


평소 같으면 다른 책을 읽으면서 책이 서가에 반납되기를 기다렸을 것 같기도 한데, 왠지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이 생기질 않았다. 아래층으로 내려갔더니, 마침 사서 선생님이 책수레에 반납 도서를 챙겨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있었다. 나는 반납 도서에 혹시 《일리아스》가 있을지도 몰라 함께 따라 타서는 빛의 속도로 확인했다. 《일리아스》는 없었다. 이곳은 수목원 안 도서관, 나는 밖으로 나가 산책하기로 한다. 하늘은 잔뜩 흐렸고 가랑비가 내렸다.


저수지에서 쉬고 있는 물닭과 오리들을 보고 수목원 안을 한참을 돌아다닌 다음에 다시 도서관에 들어가 《일리아스》가 꽂혀 있던 서가를 확인했다. 책은 없었다. 늦게 읽어나 아침도 점심도 걸렀기 때문일까, 원하는 책을 좀처럼 빌릴 수 없는 상황 때문일까, 갑자기 허기가 밀려왔다. 수목원에서 우리 동네 방향으로 걸어가다 보면 유명한 빵집이 있었다. 빵을 사서 집에 가서 허기를 달래고 5시 폐관하기 전에 다시 도서관에 들리기로 한다.


시간은 빨리도 흘렀다. 어쩌면 이렇게 순삭일까. 폐관시간 50분 전이었다. 모자와 장우산을 챙겨 다시 도서관을 향했다. 정오보다 빗발이 굵었다. 외투 양팔이 흥건하게 젖었다. 수목원을 빠른 걸음으로 걸어 도서관에 도착하니 폐관 시간 10분 전이었다. 곧바로 2층 고전 서가로 직행했다. 마침 사서 선생님께서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두 권을 서가에 꽂고 있었다.


《일리아스》를 넣은 배낭을 메고 수목원 안 저수지를 산책했다. 오리 가족이 활기차게 헤엄치고 있었다. 나뭇가지마다 보석 같은 빗방울이 방울방울 맺혔고, 이름을 알 수 없는 나무가 빗물을 품고 샛노란 꽃을 피웠다. 아까 산책 때에는 왜 이 꽃을 못 보았을까. 매화도 몽울몽울 꽃 피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제야 수목원 안에 움트는 봄의 기운을 느꼈다.


처음 허탕을 쳤을 때에는 모든 게 우울했었다. 잔뜩 흐린 하늘하며, 회색빛 저수지하며, 《일리아스》를 빌리지 못하고 헛걸음하는 마음하며가 모두가 모두 회색빛이었다. 다시 도서관을 재방문하여 《일리아스》를 손에 든 지금, 빗방울은 정오 때보다 더 세차고 하늘도 더 흐렸지만 수목원 안에 깃든 봄기운을 살피는 내 눈과 마음은 달랐다. 오늘 하루가 다 가기 전까지는 끝난 게 아니었다. 비록 아침과 점심은 놓쳤지만 저녁은 놓치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오늘 하루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밤’, 오늘과 내일이 공존하는 시간. 오늘과 내일이 함께 하고 내일의 ‘새벽’으로 이어지는 밤이 남았다. 빗발이 세차게 내리친다. 오늘밤 나는 오늘 아침의 게으름을 보완하는 마음으로,《일리아스》를 읽었다.  ‘트로이 전쟁’ 장면이 나왔다. 여전히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그래도 독서 모임 동료들과 조금씩 조금씩 읽어가다 보면  ‘인간’과  ‘세상’에 대해 조금은 더 알 수 있을지도. 어느덧 새벽 찾아왔다.


*호메로스, 천병희 옮김, 《일리아스》, 도서출판 숲, 2007(1판)/2015(2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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