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개의 씨가 들어있었다

어린이문학 연구가의 좌충우돌 생존기

by 강이랑

52개의 씨가 들어있었다

메리골드 씨를 새어보았다. 52개가 들어있었다.

며칠 전이었다. 늦가을 들판 벤치에 앉아있는데 옆에 앉아계시던 여성 두 분이 씨를 머금은 메리골드를 보며 이런 말씀을 하신다.


“햇살과 비와 바람만으로도 이렇게나 많은 씨앗을 품었네. 몇 개나 들어있을까. 한 스무 개 들어있을까. 한번 세어볼까.” 하신다.

나는 한껏 귀를 쫑긋하고 귀 기울인다. 나는 작년에 이미 메리골드 씨앗을 세워본 적이 있다. 늦가을 메리골드가 죽어가며 마른 꽃봉오리 속에 씨앗을 품고 있는 모습이 놀라웠기 때문이다. 그때는 45개인가 60개였던 것 같다.


‘스무 개는 훨씬 넘었는데.’ 말은 못 하고 속으로 생각한다.


두 분 중 한 분이 하나, 둘, 셋 차분히 세기 시작하신다. 스무 개가 훨씬 넘고, 마흔 개도 넘고, 예순 개도 넘도록 계속 세신다. 그리고 “80”하신다. 80개라라니, 세상에 많기도 하다!

그래서 나도 잘 여문 씨를 따 사람들이 잘 오가지 않는 흙길 들판에다 하나하나 뿌리며 다시 세어본다. 52개다.

작은 메리골드 꽃송이 하나하나마다 52개의 씨앗을 담고 있다면 그냥 봐도 수십 송이가 넘게 맺혀 휘어질 정도로 듬직한 한 그루의 메리골드는 얼마나 많은 씨앗을 담고 있을까. 그저 놀랍기만 하다.


이 52개의 씨앗이 흙에 뿌리 내려서 하나하나 꽃을 피운다면 그 또한 놀라운 일이겠지. 기적이겠지. 이 작은 씨앗 하나가 꽃을 피워 이 들판을 산책하는 우리들에게 이토록 경탄과 이토록 놀라운 깨우침을 주고 있으니.

그렇다면 나는 내 안에 어떤 씨앗을 가지고 있고, 그 씨앗을 피워 타인에게 어떤 기쁨을 줄 것인가?

나는 매번 이 한 몸 하나도 잘 건사하지 못해 버벅대는 나날이지 않는가?

52개는 고사하고 하나의 씨앗도 바로 생각나질 않는다.


나는 내가 며칠 전에 따서 세어본 금잔화 52개의 씨앗을 지금 당장 품기로 한다. 내가 싹 틔울 씨앗을 생각하기로 한다. 올해가 가기 전에 52개의 씨로 어떤 꽃을 피워 타인을 마주할 것인가?

재미난 글 스무 편을 쓴다.

길에서 만난 열 명의 어린이에게 찬사를 보낸다.

그리고 열두 개의 씨앗은 내 가까이에 있는 이들에게 기쁨을 주고, 열 개의 씨앗은 자연계에서 만나는 동식물에게 감사를 전하자.


그러려면 내가 우선 꽃을 잘 피워야겠지. 몸도 마음도 어느 정도 건강해야겠지. 스스로 살 길을 찾아 나아가야겠지. 그렇다, 우선은 내가 바로 서야 이 모든 것이 가능하리라.


하지만 나는 봄철, 들판에 버려진 세 송이의 메리골드를 집으로 가져와 화분에 옮겨 심었지만 간신히 몇 송이 꽃만 피게 했을 뿐이지 않느냐. 이런 내가 지금 내 안에 심은 씨로 꽃을 잘 피울 수 있을까. 하지만 이 씨는 마음만 먹으면 곧바로 싹을 틔우고 곧바로 꽃 피울 수 있다.


오후 햇살이 눈부시다.

52개의 씨앗을 품은 금잔화는 햇살 잘 드는 들판에서 자랐다.

그럼 나도 햇살을 쪼이고 와야겠다.

나는 여기까지 글을 쓰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봄햇살처럼 따스한 온기가 가득한 늦가을 들판에 아이부터 지긋한 어르신까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나와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북적거림이었다. 반려견에 들고양이들까지, 잠자리며 나비며 벌 등 곤충과 온갖 새들까지 생명으로 넘쳐나고 있었다.


연배의 두 여성분이 손에 핸드폰을 들고 이름을 모르는 나무들과 꽃을 찍어 이름을 검색하고 있다. 식물들의 이름을 검색하시는 두 분의 몸짓과 눈빛이 살아있다. 두 분은 메리골드의 이름도 검색하신다. 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그분들과 메리골드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눈다.


그중 한 분이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라며 김춘수의 <꽃>을 낭송하신다. 우리는 갑자기 한 팀이 된 듯 정겹게 웃는다. 그리고 서로에게 인사하고 서로의 갈 길을 간다.


나는 오늘 품은 씨앗으로 에세이 두 편을 썼고, 다섯 명의 아이에게 찬사를 보냈고, 친구 세 명과 두 명의 이웃을 마주했으며, 많은 자연계의 동식물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오늘 별다르게 크게 한 일은 없지만 어제보다 더 큰 충만감이 나를 감쌌다. 한 송이 메리골드의 씨앗이 내게 가져다준 힘일 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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