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노 요코, 『100만 번 산 고양이』(김난주 옮김, 비룡소, 2002)
<그림책 한번 읽어볼까?>
사노 요코의 그림책 『100만 번 산 고양이』는 100만 번이나 살고 죽었다 재생한 얼룩 고양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존재를 만나 행복한 삶을 누리다가 “두 번 다시 되살아나지 않”고 죽음을 맞이하는 이야기를 담았다.
100만 번을 죽고 100만 번을 산 고양이는 100만 명의 귀염을 독차지한다. 고양이가 죽자 고양이와 함께 했던 왕이 울고, 뱃사람이 울고, 마술사, 도둑, 할머니, 작은 여자 아이 모두가 운다. 하지만 정작 고양이는 이들을 싫어한다. 고양이는 이들을 싫어하면서도 죽을 때까지 그들을 떠나지 않는다. 그들과 함께 하며 살다가 죽고, 다시 살아나, 함께 살면서 위로하고 조력하기도 하며 생을 마감하고, 다시 살아난다. 이러한 삶을 100만 번이나 되풀이한다.
얼룩 고양이는 100만 번이나 죽고 100만 번이나 살고 100만 명의 사람과의 관계를 통하고 나서야 그 누구의 고양이도 아닌 스스로의 들고양이가 된다. 무려 100만 번 만에 스스로의 고양이가 된다. ‘누구의 고양이’도 아닌 ‘자기만의 고양이’가 된 장면에서 얼룩 고양이는 길가 음식물 쓰레기통 위에서 두 팔 두 다리를 활개를 치고 누워있다. 누구의 고양이도 아닌 자기만의 고양이가 되었는데, 어딘들 상관있겠는가? 지금 있는 이곳이, 지금 있는 여기가 바로 천국이 아니겠는가?
임금님도 싫고, 바다도 싫고, 할머니도 싫고 다 싫어했던 고양이는 드디어 ‘자기를 무척 좋아’하게 된다. 그리고 이때 비로소 한 명의 진정한 존재를 만나 진정한 삶을 체험하고 비로소 재생이 필요 없는 죽음을 맞이한다.
정재현은 「죽음, 숙명인가 해방인가」라는 글에서 죽음에 대하여 “죽음은 고유한 자기 자신에 대해 새삼스럽게 주목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이때 자기 자신에 주목하는 것은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나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허상을 붙잡고 정체성을 찾는 방식이 아니라 바로 오늘, 현재의 자신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현재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자신, 현재, 사랑 이 세 가지가 중요합니다.(『나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 21세기북스, 2015, p209)”라고 말한다. 마치 『100만 번 산 고양이』에서의 얼룩 고양이의 삶과 죽음을 이야기 하는 듯하다.
그렇지만 우리들은 『100만 번 산 고양이』처럼 실제로 100만 번을 죽고 100만 번을 살 수는 없다. 얼룩 고양이가 100만 번을 살고 100만 번을 죽었다고 하는 설정을 우리들 삶 속으로 가져왔을 때 우리의 100만 번이란 어떤 의미로 상징될 것인가.
얼룩 고양이는 100만 번이나 살며 다양한 인간관계를 체험한다. 우리들 또한 다양한 인간관계 속에서 얽히고설키며 살아간다. 우리가 관여하는 관계망 속에는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여러 다양한 존재가 나와 내 주변을 둘러싸고 있고, 나 또한 그 다양한 존재 중 한 명이기도 하다.
우리는 100만 명의 사람과 밀도 있는 관계를 맺고, 그들과의 관계 속에서 100만 번의 상징적인 죽음을 겪고, 100만 번 다시 되살아나야만 ‘나 스스로의 들고양이’가 될 수 있다. 결국 다양한 사람들과의 농밀한 관계망 속에서 다양한 심리적인 죽음과 심리적인 재생을 통해서만 결국은 내가 나답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을 발견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이는 어렵고도 어려운 일이다.
『100만 번 산 고양이』에서의 얼룩 고양이처럼 다양한 사람들과의 관계망 속에서 풀어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어쩌면 한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100만 번의 심리적인 죽음과 재생을 거쳐 성장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문득 지금, 나는 어느 상황이고 어느 단계에 서있는가?라는 질문을 나 스스로에게 던지게 된다.
*이글은 김영순, 「그림책 속 고양이, 우리 삶을 말하다」(『boon 즐거운 일본 문화, 분 28』, RHK 일본문화콘텐츠연구소, 2019)에 게재한 글을 바탕으로 다시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