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중반, 우리 동네에 흑백 TV가 들어왔지만, 우리 집은 80년대 초에 컬러TV 시대가 도래할 때까지도 잡음이 심한 라디오밖에 없었다. 집에 TV가 있으면 거기에 한눈을 파느라 공부는 뒷전이게 된다는 엄마의 우려감이 작용하기도 하였지만, 우리 집 형편이 문화 혜택을 누릴 수 있을 만큼 넉넉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TV를 전혀 못 봤던 건 아니다. 골목 맨 안쪽에 사는 덕님 언니네가 우리 동네에서는 처음으로 14인치 TV를 들여놓았다. 마을 사람들은 저녁상을 물리자마자 이상한 궤짝 속에서 사람들이 살아 움직이며 말하는 것을 보기 위해 너나없이 덕님 언니네 집으로 향했다.
어떻게 작은 궤짝 안에 사람이 들어갔을지, 종일 갇혀 있으면 얼마나 갑갑할 것이냐며 얼른 갇힌 사람들을 꺼내줘야 한다고 안타까워하는 사람도 있었다.
“우리 집에 테레비 있지롱!”
걸핏하면 덕님 언니가 혀를 내밀며 너는 봐도 되네, 안 되네, 심통을 부리기 일쑤였는데 동네 조무래기들이랑 ‘나이 먹기’ 놀이나 ‘도둑놈 잡기’ 놀이할 때 덕님 언니를 끼워 주고 그 집 마당에 깔아놓은 덕석에 빼곡히 들어앉은 동네 사람들 틈을 비집고 종종 영화(?)관람을 할 수 있었다.
행란이 집 뒤꼍에서 빠꿈살이(소꿉놀이의 사투리)할 때 덕님 언니에게 콩쥐를 구박하는 팥쥐 엄마 시켜주고 기껏 콩쥐가 되어 놀아줬어도 약발이 금방 떨어져서 한 프로가 끝나자마자 TV가 열 받으면 안 된다고 꺼버리곤 했다.
“이제 그만 느그 집에 가야!”
언니의 입천장 안쪽에 고드름처럼 뾰족하게 달린 뻐드렁니를 드러내 보이듯 입을 삐쭉거리며 눈을 흘기는 강도가 심해질 때면 눈치가 보였다. 그러다가 하루에 열두 번 티격태격하면서도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붙어살다시피 했던 소꿉친구인 미향이네 집에 미닫이문과 네발 달린 17인치 TV가 떡 하니 안방을 차지하고부터 나의 동냥 TV 시대에 서광이 비쳤다.
병아리 모이를 주러 미향이를 따라 하우스에 들어갔을 때 닭똥 냄새가 확 달려드는 열기에 숨이 막히는 것도 마다치 않았다.
부엌 한쪽의 왕겨 광에서 먼지 뒤집어쓰고 놀다가 커다란 무쇠 가마솥 가득 꽁보리밥 짓는 미향이를 도와 풀무질도 해주고, 왕겨도 한 줌씩 넣어주면서 화면 조정시간이 끝나길 기다렸다가 ‘캔디’ 만화영화에다 ‘선화공주’ 인형극까지 맘 놓고 볼 수 있었다.
어떠한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명랑함을 잃지 않았던 캔디에게 음으로 양으로 힘이 되어준 안소니 형제와 삐딱한 반항아 테리우스에 푹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다가 다음 주 예고편을 보고 나면 조석으로 바뀌는 시나리오를 미향이랑 논하며 일주일을 손꼽아 기다렸다.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구슬픈 가락에 흰 거품을 물고 넘실대던 드넓은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짠 바닷바람에 치맛자락이 흩날리던 정화(고두심)가 오매불망 기다리던 도련님(한인수)은 과거 급제했을까, 서로를 향한 애틋한 사랑으로 역경을 극복하고 언제쯤에나 감격스러운 재회를 하게 될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으면 번번이 공부 안 하느냐고 하는 엄마의 불호령에 드라마 보려는 꿈이 무산되는 아픔이여‥‥‥.
엄마 눈치 보느라 찍소리도 못하고 책을 펼쳐보지만, 촘촘히 박힌 글자가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나한테는 공부하라고 해놓고 정작 울 엄마는 저녁 밥숟가락을 놓기가 바쁘게 뒷집 송희네로 ‘여로’를 보러 가셨는지, 우리 집 봉창을 살짝 열고 내다보면 낯익은 울 엄마의 파란 슬리퍼가 어김없이 뒷집 댓돌 위에 얌전히 놓여 있곤 했다.
그렇게 엄마도 즐겨 보시고, 남의 집으로 연속극 보러 다니기에 눈치가 전혀 안 보일 리가 없을 거면서, 왜 남들 다 있는 TV가 우리 집엔 없느냐는 말은 차마 못하고 마음만 동동 굴렀다.
옥녀가 돌아가신 엄마를 떠올리며 옷고름에 눈물을 적시다가 엄마의 유품인 경대를 열면 거울 속에서 “옥녀야! 옥녀야!” 부르던 죽은 엄마 귀신에 화들짝 놀란 옥녀(김영란)의 왕방울만 한 눈이 클로즈업되며 감질나게 끝났다. 그다음엔 어떻게 되었을까, 앞집 담 너머로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소리로나마 내 나름의 장면을 그려보기도 했다.
앞집의 귀가 잘 안 들리는 노마님이 드라마를 할 때면 유난히 TV 볼륨을 크게 틀었다. 비록 화면은 볼 수 없었어도 드문드문 들려오는 TV 소리라도 듣기 위해 울퉁불퉁 튀어나온 앞집 담벼락에 바짝 붙어 있느라 얼굴에 오목판화를 찍으며, 그 집 TV 화면을 담벼락에 스크린처럼 설치할 방법이 없을까, 하는 상상도 했다. 아마 그런 절실한 발상 때문에 엉뚱한 발명을 하게 되기도 하나 보다.
앞집 식구들은 동네 사람들과는 거의 왕래 없이 살았다. 우리 집도 앞집과는 별로 친분이 없어 놀러 가본 적은 없다. 다만, 그 집 뒷마당에서 우리 집 장독대 쪽으로 휘영청 늘어진 시큼한 개살구나무의 열매가 주렁주렁 열려 있는 것을 볼 때면 나도 몰래 입안 가득 침이 고이고, 눈이 절로 감기곤 했던 기억들‥‥‥.
잘 여물어 입을 쫙쫙 벌리고 있는 우리 집 밤나무의 커다란 밤송이들이 아버지가 후려치는 작대기에 빗나가 그 집으로 떨어졌을 때 살며시 담을 넘어가서 주워 왔던 기억만이 있을 뿐이다.
노마님이 노환으로 돌아가시던 날, 주인아저씨가 지역 유지라서인지 그 집 마당에서부터 신작로로 통하는 골목까지 삼단(三段)으로 장식된 조화들이 내로라하는 지역 유명 인사들의 이름이 적힌 리본을 달고 즐비하게 늘어섰고, 문상객 행렬이 끊이질 않았으나 소리 소문도 없이 어디론가 이사를 갔다.
그 후 스물세 살의 꽃다운 새댁 부부가 우리 집 작은방으로 세 들어오면서 앞집 담벼락에 얼굴을 갖다 대지 않아도 되었고, 주인집 딸이라는 특권으로 더는 TV 보러 동네 순회 스케줄을 짜지 않아도 되었다.
새댁인 세욱 엄마는 우리 집 텃밭 너머 제일교회의 주일학교 선생님이었다. 웃으면 한쪽 볼에 예쁘게 보조개가 생겼고, 화 한번 내는 것을 본 적이 없이 항상 생글거렸다. 교회 주일학교 선생님과 학생의 인연을 계기로 동네 아이들이 세욱이의 집에 TV를 보러 드나들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희미하지만, 종일 골목을 뛰어다니며 흙먼지 뒤집어쓰고 놀던 아이들이 만화영화 할 시간이 되면 우리 집 대문을 기웃거리며 눈치를 살피다 우르르 세욱이네로 들이닥쳤다.
세욱 아빠는 퇴근하기가 바쁘게 집에 돌아와 세욱 엄마와 단둘만이 손잡고 오붓하게 ‘쎄쎄쎄! 아침 바람은 찬 바람에~.’ 하면서 마냥 눈 마주치고 있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눈치를 엿 바꿔 먹은 주인집 딸인 나는 물론, 몇 날 며칠이고 씻지 않은 때가 눌어붙어 꼬질꼬질한 동네 조무래기들이 허구한 날 단칸 신혼 방에 들어앉아 있는 광경을 보아야 했다. 소맷단이 콧물 범벅으로 시커멓게 번들거려 광이 나는 매무새로 어김없이 신혼의 단꿈을 무참히 부숴놓는 악동들 때문에 불만의 기색이 역력하던 세욱 아빠‥‥‥.
눈치 없는 아이들이 거의 날마다 신혼 방에 우글거리니 그 속마음이 얼마나 부글거리고 썩어 문드러졌을까. 방구들이 내려앉을 정도로 방귀를 뀌어 독가스를 뿜어대는 것으로 ‘어서 갔으면!’ 하는 불만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세욱 아빠가 그러거나 말거나 속없이 ‘웃으면 복이 와요’랑 주말연속극 ‘왜 그러지’까지 꼭 보고야 말겠다는 일념 하나로 똘똘 뭉친 조무래기들의 단결(?)을 해체시키기엔 역부족이었다.
세욱 엄마가 밴댕이 젓갈 좀 담지 말라고 연신 허벅지를 꾹꾹 찔러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백기를 내리고 있어야 했을 세욱 아빠였다.
‘수사반장’이 끝난 후, 한 아이가 링 위에 서서 다른 아이 코를 건드리며 ‘어린이 감기약 **시럽!’ 하는 선전이 나오면 절호의 기회를 포착한 세욱 아빠가 TV를 푹 꺼버렸다. TV 있다고 유세 떨던 집들의 일관된 핑계인, ‘TV도 열 받으면 안 되니까’ 하면서 세욱 아빠의 인내의 한계로 TV 방영 공급 중단 사태가 되어 버린다.
30촉 백열등의 공급은 드라마가 시작되자마자 ‘영화는 어두컴컴한 데서 봐야 된다.’는 세욱 아빠의 어떤 흑심에 의해 중단된 지 오래였다.
그중에 끈기 있고 얼굴에 철판을 깐 몇몇 아이들은 선전이 끝나고 다른 프로가 시작되면 전등을 다시 켤 거라는 걸 알기에 버틸 때까지 버텨보기도 하지만, 어두컴컴한 정적의 몇 분을 견디지 못하고 하나둘 꼬리를 내리며 단결(?)의 비장한 무리에서 이탈하던 아이들‥‥‥.
밴댕이 소갈머리 같은 심통 아저씨의 역전승으로 TV 보기 쟁탈전이 종결되곤 했다.
한 해 두 해 세월이 흐르고, 이제 내 나이가 그 시절의 세욱 엄마 나이의 곱절도 넘었다.
언제 봐도 미소를 머금고 인자하게 맞아주곤 하던 젊고 예쁜 세욱 엄마도 어느덧 60대 중반의 나이가 되어 있을 테고, 세욱 아빠도 더는 텃세를 안 부리는 연륜이 쌓이고 손자 볼 나이가 되어 있겠지만, 어쩌면 또 다른 텃세로 숙련된 독가스를 분산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 생각하면 아무리 TV를 보고 싶은 마음이 강렬하였다고는 해도 어떻게 남의 집으로 TV를 보러 다녔을까. 더욱이 아무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았을 신혼 방으로 쳐들어가곤 했던 행동은 아무리 철이 없었을 나이였다고는 해도 민폐를 끼쳤다는 미안함을 금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