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둥거리는 며느리 일자리 알아보시는 어머니
결혼 초, 여자와 그릇은 밖으로 내돌리면 깨지기 마련이라는 사고방식을 갖고 계신 시어머니께선 내가 돈푼이라도 번답시고 밖으로 나다니는걸 영 마뜩잖아하셨다.
남편도 맞벌이에 회의적이었다. 더욱이 내가 직장에서의 바쁜 업무 때문에 아무래도 살림에 소홀할 수밖에 없는 부분도 있었고, 육아 문제로 갈등을 겪었다.
시댁의 기일이나 명절에 좀 더 일찍 내려가서 음식 장만을 하지 못하는 것 때문에 큰동서인 형님과의 미묘한 신경전도 남편의 심기를 자극하였다.
결국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다는 남편의 논리 앞에 백기를 들고 결혼 4년 만에 전업주부가 되었을 때, 앞으로 다시는 직장 생활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남편이 벌어다 주는 월급이 얼마가 됐든 그 한도 내에서 살림과 육아에만 전념하리라 마음 먹었다. 하지만 내가 벌지 못한 만큼의 한 달 수입이 줄어 저축은 아예 꿈도 꿀 수 없게 되었고, 그해에 닥친 IMF 때문에 다달이 밀린 공과금과 혹독한 생활고까지 겪게 되었다.
폐지는 모아뒀다 고물상에 팔고, 먹고 쓰는 걸 절제하며 최대한으로 허리띠를 졸라매도 소용없었다.
아이 둘을 데리고 남의 집 현관문에다 세탁소 스티커를 붙이는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인근 아파트 계단을 수없이 오르내리느라 다리가 퉁퉁 부었다. 종일 쪼그리고 앉아 손이 부르트도록 밤 까는 부업도 해봤지만 소모한 시간이며, 들인 공력에 비해 수입은 형편없었다.
목걸이 체인 조립하는 부업을 하느라 몇 날 며칠 꼼지락거려 겨우 오천 원 받았을 땐 이루 말할 수 없는 비애감을 맛보았다. 친구의 권유로 책 세일도 시도해봤고, 보험회사에도 기웃거렸지만 바윗덩이에 눌린 것처럼 가슴이 답답하고 울렁증이 생겨 생병이 날 것 같아 포기했다.
아이들이 학교에 다닐 나이가 되자 아무래도 아이들 학원비라도 벌어야겠기에 남편한테 시간제 아르바이트라도 해야겠다는 운을 띄웠다.
남편은 썩 달가워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반대도 하지 않았다. 말은 안 했지만 그동안 자기 혼자 벌어서 아이들 교육시키고 식구들 먹여 살리는 일이 무척 버거웠던 듯하다. 하지만 내 나이가 40 고개를 넘어서 직장을 다시 구하려다 보니 일할 수 있는 능력이나 의욕보다도 나이와 외모의 장벽을 넘기가 쉽지 않았다.
나의 왜소한 체격으론 식당 설거지 일마저 결격 사유에 해당했다. 그러다가 아는 사람의 소개로 자그마한 사무실의 경리 일을 보게 되었는데 2년 남짓 다녔던 그 사무실이 영업 부진으로 문을 닫는 바람에 다시 백조가 되었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아침이면 허둥지둥 집을 나서고, 퇴근 후 밀린 집안일에 파묻혀 책 한 줄 읽을 새도 없었는데 이제 밤늦게 자도 '다음 날 피곤할까 봐서 얼른 자야 한다'는 부담감이 없어서 좋긴 하다.
방바닥에 등을 비비고 아무 때고 눈을 붙일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여유롭다. 이러다 완전히 백조의 안락함에 젖어 영영 일할 생각은 하지 않고 출렁거리는 뱃살을 부여안고 이 방 저 방 굴러다니는 재미에 푹 빠지게 되는 건 아닐까?
아직은 좀이 쑤실 정도로 근질거리거나 답답하지도 않고 놀만 한데 시어머니께서는 내가 집에서 빈둥거리자 심기가 무척 불편해지신 듯했다. 하긴, 가뜩이나 힘든 작은아들의 어깨가 그만큼 더 무거워질 수밖에 없게 되었으니 걱정하실 만하다.
시어머니께선 뒹굴뒹굴하는 백조 며느리와 온종일 마주 보고 있으려니 답답하셨는지 운동을 핑계 삼아 삼정동 다리 밑으로 나가셨다. 운동이 끝나고 혈압약을 드시러 집에 들어오셨지만 될 수 있는 한 집에 계시고 싶지 않으신 것인지 도로 나가셨다.
하루는 안방에서 듣자니 거실에서 막내 시누한테 내 취직자리를 알아보라는 전화를 하시고 계셨다. 날마다 빈둥거리는 내 모습이 무기력하게 보이거나 무능해 보이셨을까, 오죽 답답하셨으면 아무 힘없는 막내 시누한테 그런 부탁을 하실까 생각하니 민망하다. 이래저래 작은아들 집에 얹혀 계시는 게 마음이 불편하신 것이다.
친정에다 아이들을 떼어놓고 맞벌이를 하여 결혼 2년 8개월 만에 자그마한 아파트나마 마련하자 기다렸다는 듯, "니까짓 게 돈을 벌면 얼마나 번다고 느그 친정어매한테 애를 맡기고 내 자식 굶기냐? 인자 그만 댕기고 내 자식 뜨신 밥 해멕이고 집에서 살림이나 하면서 애나 키워라."라고 성화이셨던 시어머니다.
언제부터 그렇게 맞벌이를 해야 하는 쪽으로 마음이 바뀌셨는지를 모르겠다.
나이 40이 넘은 나를 오라는 곳이라도 있어서 쥐꼬리만큼의 월급이라도 받고 있을 때 당신이 작은아들 집에 계시는, 존재의 이유가 되셨던 모양이다.
"아야, 어디 일자리 있는가 좀 알아보지 그라냐? 몰라서 그라제. 나가면 일할 데가 쌨다(많다)고 하더라."
시어머니께서 노인정에 다녀오셔서 사뭇 걱정스러우셔서 하신 말씀이다.
열 명 남짓 되는 노인정에 할머니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화투를 치거나 뉘 집 며느리는 어쩌고, 뉘 집 숟가락은 몇 개인지까지 별의별 이야기꽃을 피울 것이다. 시어머니의 말씀을 미루어 짐작하건데 내가 백조가 된 것도 이미 도마 위에 올라 수차례 요리되고도 남는다.
내 나이 이쪽저쪽의 아줌마들이 새벽 일찍 해남 감자밭이나 무안 양파밭, 혹은 담양 포도밭 등으로 일하러 다니는 얘기를 듣고 오신 것인데, 일할 데가 많다는 얘기는 다들 힘든 일은 안 하려고 해서 밭일하러 갈 데가 많다는 얘기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손목이 유난히 약하여 힘든 일을 못하고, 쪼그리고 오래 앉아 있지를 못하니 도저히 시어머니께서 말씀하시는 밭일을 하러 다닐 자신이 없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마냥 놀고만 있으려고는 하지 않는다. 하루하루 백조의 생활이 길어질수록 가계의 빠듯함이 점점 조여오겠지만 당분간만이라도 나만의 휴식 시간을 가진 다음, 앞으로 뭘 해서 먹고 살아야 할지를 진지하게 생각하려 한다.
오라는 데도 없는 경리 일자리만을 고집하는 것도 모양새가 그렇기는 하지만, 설사 오라는 데가 있다 하더라도 경리 월급이 몇 푼이나 되겠냐는 생각이 든다. 경리의 수명도 한계가 있으니 이제는 앞을 길게 내다보고 경험을 쌓으면서 계속 할 수 있는 일을 해보고 싶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고 있다.
베란다에서 내려다보니 정자 툇마루에 앉아 계시는 시어머니가 눈에 들어온다.
노인정에도 안 가시고 혼자 우두커니 앉아서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까?
집에 계시면 마냥 놀고 있는 백조 며느리가 불편해할까 봐서 저기서 저러고 계시나 보다. 오늘따라 홀로 앉아 계시는 모습이 쓸쓸하게 여겨진다.
내가 얼른 직장을 구해야 시어머니께서 우리 집에 계셔야 할 명분을 만들어 드릴 수 있을 텐데······.
감자라도 한 소쿠리 삶아서 정자로 내려가 봐야겠다.